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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實錄)소설>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117)

 안동일 작

“탁덕(鐸德)의 길 순명의 길 ”

허균의 호민론과 천주사상

“자네들 홍길동전 읽어 보았지?”

“예 읽어 보았습니다.”

 공식적으로는 금서 였지만 누구나 암암리에 읽어 보는 소설이다. 더러는 한글본으로 더러는 한문본으로 읽었다.. 

 당시 까지 최대의 기피인물로 꼽혔던  허균은 볼 수록 대단한 인물이었다. 허균에 대한 평가는 상반된다. 한편에서는 총명하고 영민하여 능히 시를 아는 사람이라 하여 문장과 식견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쪽에서는 그 사람됨에 대해서 경박하다거나 인륜도덕을 어지럽히고 이단을 좋아하여 행실이 바르지 못하다는 등 부정적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의 생애를 통해 보면 몇 차례에 걸친 파직의 이유가 대개 그런 부정적 평가를 대변해 주고 있다. 

 기록에 따르면 정치 쪽으로는 말한대로 등용과 파직, 유배며 방랑이 반복되는 등 부침이 심했지만 집안 내력으로 문장은 뛰어나  그 이름이  명나라에 까지 널리 알려졌으며, 부친 허엽, 이복 형 허성, 친형 허봉, 친누나 허난설헌과 함께 허씨 5문장으로서 명성을 떨쳤다. 

 자유분방하고, 사회비판적이고, 다양한 사상들을 믿고, 다양한 출신의 사람들과 거리낌없이 교류했으며, .  오만 했지만 워낙에 똑똑하고 박식했기에 그를 싫어하는 사람은 많았어도 업신여기는 사람은 없었다는데 ‘조선에 태어난  천지간의 한 괴물’ 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선조가 막 등극한 1569년에 강릉에서 태어난 그는  5세 때 부터 부친에게 글을 배우기 시작해 9세 때에 시를 지을 줄 알았다.  부친 허엽이 바로 성경덕의 애 제자 였다.  12세 때에 아버지를 잃고 더욱 공부에 전념했다. 서애 유성룡(柳成龍)에게서도 꽤 오랜기간 학문을 배웠다.

 허균은 26세 때인 1594년(선조 27)에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로 급제하고 1597년(선조 30)에는 문과 중시(重試)에 장원을 했다. 그는 급제한 이래 등용과 파직을 반복한다. 장원 이듬해 황해도 도사(都事)가 되었으나 서울의 기생을 끌어들여 가까이했다는 탄핵을 받고 부임한지 6달 만에 파직됐다.  

  뒤에 재주를 아낀 왕에 의해 부름을 받아 다시 입조해 형조정랑,. 사복시정(司僕寺正)등을 역임했는데 그 무렵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원접사의 종사관이 되어 활약했다. 학사였던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을 영접하고 필담을 나누면서 글재주와 넓은 학식을 알렸다.  누이 난설헌의 시를 주지번에게 보여 이를 중국에서 출판하는 계기를 만들기도 했다.  직후에 삼척부사가 됐으나 이 또한 세 달이 못 되어 불상을 모시고 염불과 참선을 행했다는 탄핵을 받아 쫓겨났다.  당시 선조가 탄핵문을 보고 “문장을 좋아하는 자는 불경도 읽었으므로 허균도 그에 불과할 것”이라며 두둔했으나 여러 번 탄핵하자 파직을 허락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바로 이듬해에 다시 내자시 정(內資寺 正)으로 복귀한다. 그 무렵 허균의 글 재주는 하늘을 찌르고 있어 그 해 여름, 가을, 겨울의 아홉 달 동안의 벼슬아치의 법전 시험(고과)에서 스물 일곱 제목이 장원을 하는 놀라운 일을 달성한다. 

 그는 1608년 12월에  공주목사로 기용되었지만 이번에는 서얼 서류(庶流)들과 가까이 지낸다 하여 또 다시 파직 당했다. 목사 시절 처 외삼촌 심우영을 통하여 서얼인 서양갑과 이재영 등을 사귀었다. 이들은 명문가의 서자들이었다. 특히 정승의 서자인 이재영은 허균과 친분이 두터웠던 사이였고 기생출신인 그 어머니와 함께 공주로 오게 해서 돌봐 주기까지 했다. 이때 이들 서얼 친구들은 7서 동맹 이라해서 결사를 조직했는데  이 동맹이  후일  허균에게 큰 화근으로 돌아오게 된다. 

 공주목사를 그만 둔 후에는  산천을 유람하며 유유자적 하며 지내면서 부안의 명기 계향(매창)을   만나 희대의 염문을 뿌리기도 했다.   

 허균은 1609년(광해군 1)에 명나라 책봉사가 왔을 때 이번에도 접대 종사관으로 발탁돼 문명을 다시 날려 새 임금의 눈에 든다.  이 해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고 이어 형조참의가 됐다. 1610년(광해군 2)에 전시(殿試)의 시험을 주관하면서 조카와 사위를 합격시켰다는 탄핵을 받아 전라도 함열(咸悅)로 유배됐지만 곧 해배 됐고 몇 년간 태인(泰仁)에 은거했다.

 허균은 1613년(광해군 5)  앞서 언급한 서얼 출신의 서양갑(徐羊甲) · 심우영(沈友英)등이 인목대비 어버지 살해 기도 사건으로 처형 당하게 되자 신변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서 였는지 권신 이이첨(李爾瞻)에게 적극 다가가 대북(大北)에 참여해 다시 입조한다.   7서 동맹의 사건은 일종의 역모로 비화 됐지만 동맹 성원들이 허균의 이름은 입에 올리지 않는 의리를 보여 주었다. 

  1614년에 천추사(千秋使)가 돼 중국에 다녀왔고  그 이듬해 에도 동지 겸 진주부사(冬至兼陳奏副使)로 중국에 다녀왔다. 두 차례의 사행에서 많은 명나라 학자들과 사귀었고  귀국할 때에 태평광기(太平廣記)를 비롯해 세 수레분의 많은 책을 가지고 왔다. 그 가운데에는 천주교 서책과 기도문, 그리고 구라파 지도가  있었다.

 허균은 1617년(광해군 9) 좌참찬이 됐다. 그런데 인목대비의 폐모론을 주장하다가 폐모를 반대하던 영의정 기자헌(奇自獻)과 사이가 벌어졌고 일단은 허균이 승리해  기자헌은 길주로 유배를 가게 됐다. 그러자 그 아들 기준격(奇俊格)이 아버지를 구하기 위하여 허균의 죄상을 폭로하는 상소를 연속해서 올렸고  허균도 맞 상소를 올려 변명했다. 

 그 와중에 허균은 이이첨과 관계가 멀어지게 된다 이 무렵 이이첨의 외손녀인 세자빈이 아들을 낳지 못하자 허균의 딸이 양제(세자의 후궁)로 내정되어 입궐했다. 허균에 대한 이이첨의 경계는 한층 강화되었다. 그런데 이 와중인 광해군 10년(1618) 8월10일 남대문에 “포악한 임금을 치러 하남 대장군인 정아무개가 곧 온다…”는 내용의 벽서가 붙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이첨 측은 이 격문이 허균의 오랜 심복인 서얼 현응민(玄應旻)이 붙였다고 몰아가 허균을 옭아 넣는다.

 그때  허균을 모해하는 기준격의  장문의 상소가 다시 올라왔고 허균을 상대로한 혹독한  국문이 열렸다.  국문의 기간은 열흘 남짓 짦았지만  무수한 고문이 가해졌다. 결국 허균과 기준격의  대질 심문,  지난  7서 사건과 그간의 저술이 문제가 돼 역적 모의를 했다는 결안이 내려지고   심복들과 함께 저자거리에서 능지처사 거열형을 당해 이승을 하직해야 했다.  

  증언에 따르면  수감 중에도 부하들에게만 심문이 이루어졌고  본인에게는 고문만 하고 제대로 된 심문이 없었으며  이이첨이 의금부에 드나들며 허균을 안심시키다가 창졸간에 끌어내 처형해버렸다고 한다.

 허균은 심문 받는 줄 알고 나왔다가 자신이 죽는다는 걸 알자 경악하여 임금에게 “잠깐만! 아뢰올 말이 있습니다!” 라고 외쳤지만 신하들이 “닥쳐라 역적 놈아!” 라고 욕을 퍼부었고 결국 한마디도 못하고 끌려나가야 했다. 자신이 역적이라는 문서에 서명하라고 하자 동의 못한다고 버텼지만 억지로 서명하곤 사지가 찢어졌단다. 그의 나이 48세  였다.   

 허균은 유교집안에서 태어나 유학을 공부한 유가로서 학문의 기본을 유학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이단으로 지목되던 불교, 도교에 대한 성취도 높았다.  특히, 불교에 대해서는 한 때 출가하여 중이 되려는 생각도 가지고 있었다.  불교를 믿는다고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당하고서도 자기의 신념에는 아무런 흔들림이 없음을 자작시와 친구에게 보낸 편지글에서 밝히고 있다. 그는 도교사상에 대해서도 주로 그 양생술과 신선사상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은둔사상에도 지극한 동경을 나타냈다.  

  ” 한마디로 교산 허균 선생은 예교(禮敎)에만 얽매어 있던 당시 유가 선비사회에서 보면 이단시할 만큼 다각문화에 대한 이해를 가졌던 인물이며, 편협한  시각에서 벗어나 핍박받는 하층민의 입장에서 정치와 학문에 대한 소신을 피력해 나간 시대의 선각자였다고 할 수 있네” 

 정산은 근기 남인의 실학 정신의 원류를 허균 선생에서 찾아야 할 것이라는 자신의 견해를 직암과 승훈  두사람에게 강력하게 설파 했다.  뒤에 설명하는 그의 탁월한 평생지론  「호민론(豪民論)」이 그 강력한 전가가 될 수 있다고 했다. 

 허균은 국문학사에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인 「홍길동전」을 지은 작가로 인정되고 있다. 한때 이론이 제기되기도 했으나 그보다 18년 아래인 이식(李植)이 지은 택당집(澤堂集)의 기록을 뒤엎을 만한 근거가 없는 이상 그를 「홍길동전」의 작가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의  파란만장한 생애와 그의 논설 「호민론(豪民論)」에 나타난 사상을 연결시켜 보면 그 구체적인 형상화가 홍길동으로 나타났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천하에 두려워해야 할 바는 오직 백성일 뿐이다. 홍수나 화재, 호랑이, 표범보다도 훨씬 더 백성을 두려워해야 하는데, 윗자리에 있는 사람이 항상 업신여기며 모질게 부려먹음은 도대체 어떤 이유인가?

국가를 다스리는 사람과, 함께 하늘이 맡겨 준 직분을 다스릴 사람은 인재(人才)가 아니고서는 되지 않는다. 하늘이 인재를 태어나게 함은 본래 한 시대의 쓰임을 위해서이다.

그래서 인재를 태어나게 함에는 고귀한 집안의 태생이라 하여 그 성품을 풍부하게 해주지 않고, 미천한 집안의 태생이라고 하여 그 품성을 인색하게 주지만은 않는다.>

 그의 저작 ‘성소 부부고’ 에 나오는 호민론 과 유재론의 한 대목이 다.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의 성소(惺所)는 허균의 또다른 호이고, 부부고(覆瓿藁)는 ‘장독 뚜껑이나 덮을 만한 보잘것 없는 원고’이라는 의미다.

 본래 ‘장독 뚜껑’이라는 표현은 쓸모없는 책을 비유할 때 사용하던 전통 표현이다.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완성한 뒤 인종에게 올린 글인 진삼국사기표에서도 이 표현이 나온다. 현대 감각으로는 작가들이 장난 삼아서 “제 책은 냄비 받침으로나 쓰세요”라고 너스레를 떠는 것과 비슷한 느낌의 제목이다.  원작이 공간되진 않았고 후일 허균의 외손자 이필진(李必進)이 발문을 쓰고 편찬했다. 

 「호민론」에서 작자는 백성을 항민(恒民) · 원민(怨民) · 호민(豪民)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호민은 고대사회에서 촌락에 사는 힘이 있는 백성을 가리키던 말이다.

그에 의하면, 항민은 일정한 생활을 영위하는 백성들로 자기의 권리나 이익을 주장할 의식이 없이 법을 받들면서 윗사람에게 부림을 당하면서 얽매인 채 사는 사람들이다.

원민은 수탈당하는 계급이라는 점에서 항민과 마찬가지이나 이를 못마땅하게 여겨 윗사람을 탓하고 원망한다. 그러나 이들은 원망하는 데에 그칠 뿐이다. 그러므로 항민과 원민은 그렇게 두려운 존재가 못 된다.

< 참으로 두려운 것은 호민이다. 호민은 남모르게 딴 마음을 품고 틈만 엿보다가 시기가 오면 일어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기가 받는 부당한 대우와 사회의 부조리에 도전하는 무리들이다. 호민이 반기를 들고 일어나면 원민들이 소리만 듣고도 저절로 모여들고, 항민들도 또한 살기를 구해서 따라 일어서게 된다.

진(秦)나라가 망한 것은 진승(陳勝) · 오광(吳廣) 때문이고, 한(漢)나라가 어지러워진 것은 황건적(黃巾賊)이 원인이었다. 당(唐)나라도 왕선지(王仙芝)와 황소(黃巢)가 틈을 타서 난을 꾸몄다. 끝내 이 때문에 이들의 나라는 망하고 말았다. 이들은 모두 호민들로서 학정의 틈을 노린 것이다.

  우리 조선의 경우를 보면 백성이 내는 세금의 대부분이 간사한 자에게 흩어지므로 일이 있으면 한 해에 두 번도 거둔다. 그래서 백성들의 원망은 고려 때보다도 더 심하다. 그런데도 위에 있는 사람들은 태평스럽게 두려워할 줄도 모르고 ‘이 나라에는 호민이 없다’고 한다.

 견훤(甄萱) · 궁예(弓裔) 같은 자가 나와서 난을 일으키면 백성들이 이에 동조하지 않는다고 어찌 장담할 수 있겠는가.  위에 있는 사람들은 두려운 형세를 바로 알고 정치를 바로 하여야 한다. >

 기성 양반네들이 놀랄만 하다.  기성의 권위에 맞서고  백성이 주체가 되는 개혁을 내세운 그의 정치사상을 가감없이 보여주는 글이 바로 호민론이다.

“대단하지 않은가?  허균 선생은  한마디로  말하면, 백성을 사랑한,  사람을 사랑한 사람 이라네.  그에게는 천인 기생 서얼의 차별이  없었네 오히려 그쪽을 편애 했다고 할 정도일세 . 그는   헐벗고 힘없는 약자가 살 수 있는 세상을 꿈꿨던 선각자 라네.  우리 남인 실학자들이야 말로 그를 본받고 그의 사상을 구현해야 하는 책무가 있다고 할 수 있지. 그렇지 않은 가? ”

 두 후학의 동의 구하는  정산의 결론 이었다.  

 그런데 그의  사상에는 천주학의 가르침이 내재 돼 있다는 귀가 번쩍 뜨이는 소리를 정산이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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