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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實錄)소설>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115)

 안동일 작

“탁덕(鐸德)의 길 순명의 길 ”

반계 유형원은 농지 개혁, 조세 제도 개혁, 과거제도 개선, 징병제도 개선 군현제도 개선등 나라 살림 전반에 걸친 개혁 개선안을 내놓았지만 그의 현책은 추후라도 하나도 채택 된 것이 없었다.

반계수록에 담긴 내용은 현실 법제의 모순을 근본적으로 개혁해 안정된 백성들의 생활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지역적인 불균등과 신분적인 특권을 해소해 모든 사람이 자기 몫을 차지할 수 있는 사회의 실현에 목표를 둔 대안이었다.

그러나 그 개혁의 주체를 왕의 결단, 집권층의 개과천선에 둠으로써 당시 권력구조상 실현될 수 없는 것이었고 왕조가 새로이 개창되어야만 실현될 수 있는 이상안(理想案)이었다. 그 이상안은 외 육촌 동생이지만 생전에는 한번도 만난 적이 없다는 성호 이익에 의해 집대성되고 더욱 구체화 되었지만 현실화는 요원하기만 했다.

직암 권일신은 이 나라에 당쟁이 없었으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 한 적은 있지만 자신이 남인으로 태어난 것에 대해 불만을 갖거나 안 그랬 었으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해 본적은 없었다.
오히려  자신이 남인이라는 것에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다. 바로 실학(實學) 때문이었다.

실학은  여러차례 강조한 대로 공리공담으로 빠져든 도학, 주자학의 관념적 세계에서 벗어나 실제의 세계에서 빚어진 온갖 민생문제와 사회문제를 해결 하는 방안을 제시하는 학문이었다.

직암은 어려서 부터 성리학, 도학의 사변적인 경향이 너무도 싫었다. 특히 이기론이 그랬다. 세상과 인간이 리와 기의 결합이라는 것은 이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순서와 차별성이 뭐 그리 큰 일이라고 사생결단을 하고 싸워야 하는지는  이해 되지 않았다.  리가 먼저고 기가 나중이면 어떻고 기가 모였을 때 리가 생겨 난다면 또 어떠랴 싶었다.

10대 초반 어린시절, 우연히 용문사 주지스님이 ‘가슴에 화살이 와서 박혔는데 이 화살은 누가 어디서 어떻게  쏜 것이고 무슨 독이 묻혀 있는가를 먼져 따져야 하겠냐’는 ‘삼계 화택’의 일갈을 들었던 이래 굳어진 사고였다. 그리고 그는 운명적으로 또 환경적으로  도학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실학을 만났다.

도학은 중국 송대에 와서 크게 발흥한 정주 성리학의 별칭 이었지만 철학이란 말이 없었던 그 무렵 사변적인 성리학 논리를 콕 집어 이르는 말로 널리 쓰여지고 있었다.

반계의 개혁안은 상당히 온건하고 현실적이었다. 한마디로 실학적 이었다. 성호에 의해 구체화된 노비제도 개혁안 만 하더라도 노비 세습제를 폐지해야 한다는 전제 아래 공전제가 실시될 때까지는 종모법(從母法)만을 실시해 노비 수를 줄이자고 했다. 그 뒤에는 이들을 품삯을 주고 고용하는 용역제로 전환시킨다는 현실적인 안을 제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도학파 집권 노론세력에게는 이정도도 어림 반푼 없는 소리였던 것이다.

반계의 개혁안은 실현되지 않지만 현실 문제의 해결을 위해 학자가 일생을 바쳤다는 미담은 후세 학자들 특히 재야의 남인들 에게 영향을 주어 실학 학풍을 일으키는 데에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었다. 직암도 그 중 한사람이었고 자신이 그 대열에 함께 서 있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서인 노론에서도 이런 자각을 한 사람이 있었지만 그 수는 극히 소수였고 자신 집단 안에서 경원시 됐다.

그런데 정산은 뜻밖의 말을 했다. 조선이 이나마라도 지탱하고 있는 것이 실힉파들이 그토록 경원하는 성리학 때문이라고 한 것이다.

“자네들이 그리 경원하는 이기 논쟁만 하더라도 그렇다네, 꼭 쓸데 없는 공리공담은 아니라는 것이 내 생각일세, 세상의 원리나 이치를 알고자 하는 일이  당장 쌀을 주지 않는다고 해서 백안시 한다면 인간이 동물과 다를것이 무엇이겠는가?  다만 그 정도가 지나치면 말 그대로 공리공담, 음풍농월이 될 수도 있다는 경계를 잊지 말아야 겠지.”

정산은 잠시 쉬었다가 말을 이었다.

“자네들은 서양의 희납이라는 나라에 대해서 나보다 잘 알텐데, 그렇지 않은가?”  희납은 희랍, 그리스의 당시 표현이다.

“책에서 보기는 했지만 숙사보다 어찌 잘 알겠습니까?”

” 그 시절 그 나라에서는  그렇게 도학이 발전했고 호민 정치가 있었다고 하는 군.”

“그렇다고 하지요.”

“공 맹 시대 쯤이라고 하던데  놀라운 일이기는 하지 … 왕과 관리를 백성이 뽑았다니…그런데   그 시절 백랍도 라는 유명한 도학자가 자신과 같은  도학자 들이 정치를 해야 나라가 온전해 진다고 하지 않았던가”

백랍도는 플라톤의 중국식 음차 표기다.

“예, 그랬다고 합디다.”

“각국의 왕이며 정객들이 충실히 도학을 연마하지 않으면  나라에 불행이 생길 것이라고 했다지 않은가?

“그랬죠, 책에서 읽었습니다.”

“그런데 고대 희랍의 도학자들이 꿈꿨던 도학 정치가 우리 조선  역사에서 실현되고 있다 한다면 자네들은 어찌 반응 하실텐가?.”

“중종 조 시절 조광조 선생이  도학 정치를 표방하고 개혁을 하려 했지요.”

“조광조 선생 만이 아닐세, 나는  유교  성리학자들이 본격적으로 나라를 이끌었던 선조 이후의 시기부터 우리는 본격적으로 도학 정치를 했다고 보고 있다네.  그 정치의 성패는 논외로 하더라도…그 중심에 이기논쟁이 있었지.”

짐작 할만했다.   정산은 조선 개국시기 고려조에 대한 의리로  초야에 은거 해야 했던 사림의 진출을 도학 정치의 시작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초야의 사림이 주구장창 도학에 몰두 했다는 것은 사실 아닌가.

많이들 알려진 대로  중종조에 한번 반짝 했던 사림은 그 후 이 왕가의 방계였던 선조의 즉위와 함께  다시 그 시대를  열었다.  물론  사림파의  세상이 열렸다고  해서 이들이 사회 전체를 전일적으로 지배한 것은 아니었다. 아직 훈구파들은 대지주 로서 지방 유지로서  별도 관직이  없이도 영향력을 유지했다. 사림파의 지배권은 이들의 권익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제한적으로 행사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런 한계가 있기는 하지만 사람의 도학자들은 그후  2백 여년간 국정을 주도했다.  임진년과 병자년에 엄청난  전란을 겪었 으면서도 풀잎처럼 일어나  동서 남북의 사색 당파로 당파를 지으며 자신들의 도학 이론이 옳다고 목청을 돋우며  정권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나라를 끌어 왔던 것이다.  칼을 들지 않은 학자들이 경제와 군사를 통제하며 두세기 이상  나라를 이끌었다는 것은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일이었다. 서양 나라 사정이야 자세히 모른다 해도 중국과 일본만 해도 모든 권력은 8할이 무력에서 나왔다.  그리고 저들의  권력 쟁탈전에는 조선의 유가 아니게 피의 살육이 뒤 따라야 했다. 환국이라 불렀던 조선의  권력 교체의 경우 목숨까지 빼앗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는 것이다.

“그 같은 도학 정치를 정착시키는 데 기여한 두 사상가가 있다네, 누군지 아시겠는가?” .

“퇴계 선생과 율곡 선생을 말씀 하시는게 아닌지요?”

“그럴 줄 알았네, 틀린것은 아니지만  반쯤만 맞았네 , 내 생각과는 달라,”

이기 논쟁하면 대뜸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를 떠올리게 되지만 정산은 이이 대신 화담 서경덕을 꼽았다.

이황은 ‘이기이원론’에서 ‘이(理)’를 강조하는 ‘주리론자’이고, 이이는 ‘이기이원론’에서 ‘기(氣)’를 강조하는 ‘주기론자’로 인식되고 있지만  ‘이(理)’가 ‘기(氣)’를 존재할 수 있게 한다는 ‘본질론’에서 보면 이황과 이이는 입장이 서로 같은 ‘도학자’라는 것이 정산의 설명이었다.

반면  화담서경덕은 ‘이(理)’는 ‘기(氣)’의 ‘원리’일 뿐이라는 ‘기일원론자’이며, ‘반(反)도학자’라는 것이었다.

이왕 논쟁을 하려면 극명하게 양쪽에 서서 행해야지 어정쩡한 자세는 이도 저도 아닌게 된다는 것이 정산의 지론이었다.

화담 서경덕과 퇴계 이황이 이와 기로 우주 만물을 해석하는 이기론 논쟁을 펼치면서 사림파 시대의 철학적 토대를 구축하는 데 이바지했다는 것이 정산의 해석이었다.

이황이 세우고자 하는 것은 ‘이(理)’ 였다.   ‘이(理)’는 무형(無形)이고, 무색(無色), 이니 직접적인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주자, 주희의 입장이 그랬다.
서경덕이 세우고자   한 것은 기(氣)였다. 이(理)는 기(氣)의 조리(條理: 체계(體系)를 이루는 원리)이니 기(氣)를 알면 이(理)를 알게 된다고 보았다. 주희를 성토한 왕양명의 입장이 그랬다.

‘기(氣)’는 실제로 존재하고 나날이 경험하는 것이니 직접적인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천지만물(天地萬物)이 기(氣)로 이루어져 있듯이 인간(人間)도 기(氣)로 이루어져 있다. 인간의 정신지각(精神知覺)은 기가 크게 또한 오래 모인 것이니 어찌 기(氣)를 인식하지 못할 것인가?”  주기론자들의 지론이다.

서경덕은 우주의 기본 단위인 ‘기’가 우주의 법칙인 ‘리’보다 먼저라고 생각했다. 삶과 죽음을 논한 <귀신사생론(鬼神死生論)>에서 “(기)는 끝없는 허공에 가득 차 있다”면서 “그것이 크게 모이면 천지가 되고 작게 모이면 만물이 된다”고 말했다.  기의 상호작용에 의해 ‘이’가 형성된다는 것이그의 입장이었다. ‘기’가 ‘이’보다 먼저라는 그의 이론은 기일원론(氣一元論)이다.

이황은 서경덕을 비판했다. ‘이’가 있고 나서 ‘기’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퇴계문집> 제25권에 실린 ‘고요하여 조짐은 없지만 만물은 이미 갖춰져 있음을 논함(論沖漠無朕萬象已具)’에서 “이는 사물이 있기 전에 먼저 ‘이’가 있음을 말한 것이니, 임금과 신하가 있기 전에 이미 임금과 신하의 ‘이’가 있었고 아버지와 아들이 있기 전에 이미 아버지와 아들의 ‘이’가 있은 것과 같다”는 주자의 말을 인용했다.

여기서 직암과 승훈은 혼란을 느껴야 했다. 지금까지 자신들이 배운 천주학의 근본 원리가 천주의 뜻과 존재가 먼저 있는 주리론에 가까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확히 구명 하지는 않았지만 남인 실학은 남인의 비조를 퇴계 이황선생에 두고 있지만 이기론에 있어서 만큼은 왕양명의 주기론 쪽에 서 있다고 느껴 왔기 때문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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