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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實錄)소설>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114)

 안동일 작

“탁덕(鐸德)의 길 순명의 길 ”

정산의 계속되는 당부는 천주학 공동체를 결성하더라도 성호의 가르침, 실학의 뜻을   펼쳐 나가라는 것이었다.  정산은 실학(實學)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실학은 헛된 학문’이라는 뜻의 허학(虛學)과 대립되는 실제의 학문이라는 뜻이다.
이 실학이란 말을 그무렵  본격적으로 사용한 이가 정산 이병휴다. 정산은 자신의 최근 저서 심해(心解)에서 공리공론(空理空論)에 몰입해 있는 당시의 조선 유학, 성리학의 폐단을 지적 하면서 실학을 정립해야 한다고 주창했다.  당시의 조선 성리학 전체를 허학이라고 매도까지 하지는 않았지만 실학이 아니라면 허학이라는 얘기아닌가.

정산의 수필집인 ‘심해’ 필사본은 녹암이 구해와 직암도 함께 읽었다.  정산은 최근까지 녹암등 다른 제자들의 도움을 얻어  스승이자 숙부인 성호의 문집 정리에 힘을 쏟고 있었다.   심해는 그 뒷 애기와 자신의 감흥을 다룬  글을 묶은 책이었다.   병휴가 결론 지우고 녹암이 적극 찬동한 성호의 학문 태도는 근면과  규율을 중시하면서, 정치의 기본은 민생의 안전과 백성의 보호 (保民)에 있다고 파악하고 이를 위한 다양한 개혁방안을 제시한 실학의 발흥이자 천착 바로 그것 이었다.

그런데 실학이란 용어 자체는 유교 내에서 쓰이는 보편적인 단어 였단다.
“이 땅에서 실학 이란 말을 처음 사용한 이가 누군지 아는가?”
엊저녁 실학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 하면서 정산이 직암에게 물어 왔었다.
“정산 숙사 아니십니까?”

“아닐세 자네들 할아버지 되시는 권 자 근자 공께서 처음 사용하셨다고 기록에 나온다네.”

“그렇습니까? 처음 듣는 소리 입니다.”

정산은 정학과 같은 뜻, 내지는 버금하는 뜻으로 선대들이 실학 이라는 말을 사용 됐다는 예를 들려 줬다.

조선 태조 시대  권근  “경전을 깊이 공부해서 실학을 하는 선비를 얻어야 합니다”
세종 시대 황희   “허명에만 힘쓰고 실학에 힘쓰지 않습니다”
세조  “실학에 힘써야 한다”
율곡 이이  “중국 고대 삼대 (三代 하, 은, 주) 를 목표로 삼아 실학에 힘 써야 한다”

“물론 우리가  말하는 요즈음의 실학과 저분들이 말한 실학은 서로 다른 내용이기는 하지만 시대와 상황에 맞는 학문이라는 점에서는 그 맥이 통한다고 할 수 있지, 어느 시대든지 ‘실학’으로 불릴만할 학문이 있다는 얘기라네”
승훈과 직암은 고개를 끄덕였다. .

정산은 ‘심해’ 에서 사변 중심으로 흐르고 있는 성리학을 보완해 경세치용과 이용후생, 실사구시의 태도를 강조한 반계 유형원과 성호 이익의 학문이야말로 이 시대의 실학이라고 힘주어 강조 했었다. 그런데 정산은 남인 실학의 태옹을 지봉 이수광 에서 찾고 있었다. 천주학과도 관계가 있었다.

“자네들이 금과 옥조로 여기는 이마두의 천주실의를 이 땅에 처음 본격적으로 소개한 이가 누군지 아는가?”
“지봉 이수광 선생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네 스승님과 내가 우리 근기 남인들의 터전을 만든 어른이라고 여기고 있는 지봉, 그분이 실학적 기반 위에서 서학의 대표격인 천주학에 관심을 가지고 이를 요약해 자신의 저술에 썼지.”

“그 책이 지봉유설 아닙니까?”

“그렇다네, 지봉유설 대단한 책이고 지봉선생 대단한 분이시네.”“

지봉(芝峯), 이수광(李睟光,)은 1563년 생으로  직암 승훈 등 보다는 거의 2백년 앞선 인물이다.  선조, 광해군, 인조 세 임금 밑에서 병조좌랑, 안변부사, 이조판서에 이르기까지 내외직을 두루 역임했고, 뛰어난 문장실력을 인정 받아 서장관, 정부사로 네 차례나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러면서 당시의 세계적인 선진국 명나라에서 그 문화를 보고 배우는 한편 베트남, 시암, 류큐 왕국의 사신들과 교류, 국제적인 안목을 키울 수 있었다. 관리로서 임진왜란과 정묘호란을 모두 치른 인물이다. 광해군 집권시 기득권 세력이었던 북인과 비판적으로 거리를 둔 남인이었기에 남인 실학의 토대를 연 인물로 꼽힌다.

지봉은 두 차례의 전란으로 피폐된 나라의 부강과 백성들의 살림살이 개선을 위한 사회, 경제 정책을 강구하려 했다. 그러면서 그는 무엇보다도 실천, 실용의 학문 보급에 힘썼다. 무실을 강조하면서 실생활에 유용한 학문을 섭렵하고 정리했다. 선현들의 사적을 모으는 한편 이를 현재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 고민했다
“지봉”이라는 호를 딴 그의 저서 지봉유설은 이런 고민의 결과물이다. 총 3천 4백여 조목을 25부문 180여 항목으로 나누고 있는 방대한 분량의 우리나라 최초의 문화백과 사전이다.

권1 천문,(時令) , 권2 지리,제국(諸國),에서 시가해 권3 군도(君道),병정, 권 5∼7 유도(儒道), 권 9 궁실(宮室), 복용(服用), 권 20 훼목(卉木) · 금충(禽蟲) 등 의 25 부문으로 분류되어 있는데 그 박람강기는 혀를 내 두르게 한다.

이수광은 이 지봉유설을 통하여 실용·실리 추구의 정신과 실증·민본 정신 등 무실 정신을 역설했다. 고증적이고 실용적인 이수광의 학문 태도는 공리공론을 일삼던 당시의 학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지봉유설 에서 가장 특기할 만한 내용은 서구 문명을 소개한 것이다.  두 번째 권의 제국부(諸國部)에서  일본, 유구(오카나와) 버마, 베트남, 시암(태국)  카자스탄, 영국 등 외국의 개요를 적었는데 영국을 제외 하면 중국에 조공을 바치던 주로 동남아 국가의 이야기인데 어느 나라던지 백성을 위하는 한가지 고유정책을 소개하고 있는 것이 이채를 띤다. 이 2권 끝에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를 거론 하고 있는데 천주학의 주요사상과 교황제도 까지 소개 하고 있었다.

<有利瑪竇者, 泛海八年越八萬里風濤, 居東奧十餘年. 所著天主實義二卷.>
‘이마두(利瑪竇)라는 사람이 있어, 8년 동안이나 바다에 떠서 8만 리의 풍랑을 넘어 동월(東粤)에 와서 십여 년이나 살았다. 그가 저술한 천주실의 두 권이 있다.’
정산 이병휴와 직암 권철신 등의 관심이 여기 쏠리는 것은 당연 했다. 언급한 대로 성호 이익도 지봉의 소개로 천주실의를 접했다.
지봉은 ‘서양의 발전을 이끈 수승한 진리 천주학이 중국의 유학과 여러면에서 근본을 함께 하고 있는 것이 많은데 중국의 오늘날 유학이 공리공담의 사변으로 흐르고 있어 안타깝다’는 이마두의 소회를 소개하고 있다.
지봉유설이 1610년대에 쓰여 졌고 천주실의(天主實義)가 1590년대에 나왔다고 하니 20년 정도 전의 꽤 따끈따끈한 지식이 실린 셈이다.

 

“그리고 보면 자네들의 천주학 인연도 연원이 꽤 되는 셈일세.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자네들의 천주학이 일차적으로는 개인 신앙과 믿음의 차원에서 시작되고 귀결 되겠지만 공동체를 염두하고 있다면 실학을 공부했던 유자들 로서 선인들의 실사구시 이용후생의 가르침을 잊어서는 안될것이며 작으나마 이를 실현 하기 위해 힘써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다네”
“명심하겠습니다. 숙사, 나만 잘되자고 천주학을 믿고 교회 공동체를 만들겠디는 것이 아닙니다. 저희들로서는 이 땅의 살길이 천주학에 있다 보고 있습니다.”
“천주학의 중심 사상이 자애와 평등이라니 기대는 해 보겠네. 하지만 각오들은 했겠지만 쉬운길이 아닐세”

“반계 선생의 수록 읽어 보았지?”

“예 보았지요.”

반계수록(磻溪隨錄)은 반계 유형원(柳馨遠) 선생이 저술한 남인 실학계의 총서 였다. 이수광의 유설이 백과 전서였다면 반계의 수록은 통치 제도에 관한 개혁안을 중심으로 저술한 본격 정책서 였다. 26권 13책으로 된 방대한 저술이다. 수록(隨錄)은 책을 읽다가 수시로 베껴 둔 것이라는 뜻이나 이는 저자의 겸사이고 체계가 정연한 저술이다.

“그 절절한 호소와 개혁 방안이 채택 되었는가?”

“하나도 채택 되지 않았습니다. ”
“선대 왕들도 잘 쓴 책이라고 하고 나라에서 대대적으로 간행해 배포 했지만 그 개혁안들은 전혀 실행되지 않았지 않은가, 우리 스승님의 개혁안도 그렇고…”

“그렇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길이 필요합니다.”

반계 유형원은 1622년 한성에서 태어났다. 북인이던 아버지 유흠이 인조 반정으로 장살된 이후, 관직을 단념하고 1673년  향년 52세의 나이로 아깝게 사망 할 때까지 일생을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다. 남인 실학자의 첫 세대 인사 중의 한사람으로 성호 이익과는 외 육촌 형제가 된다.

반계수록 , 이 책은 저자가 관직의 생활을 단념하고 경기도 지평 전북 부안 우반동 등에 칩거해 22년간에 걸쳐 연구하고 고심했던 내용을  담은 책이다.  본편과 고설(攷說)로 나뉘어 있는데 농지 제도인 전제(田制), 학문의 방법을 다룬 교선(敎選),  관리의  임명과 과거제도를 다룬 임관(任官),  그리고 지리 군현제들을 다룬 속편(續篇)으로 나누어 자신의 개혁안을  설파하고 있다.

후기 ‘서수록후’에는 작금의  현실이 개혁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절박하다고 파악하고 있는 심정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데  현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책을 기록, 정리하고 현실에 적용시킬 가능성을 심사숙고해 체계적으로 개혁안을 제시했으니 부디 적용되가 바란다는 간절한 염원을  술회하고 있다.

반계는 특히 농업국가인 조선의 근간인 토지제도에 대해 부쩍 천착 했는데  대토지를 소유한 자와 송곳을 꽂을 만한 조금의 토지도 소유하지 못한 자가 있을 정도로 토지가 일부의 사람에 의해 집중되어 있다는 점을  적시하면서 가난한 농민은 유망(流亡)하게 되고 그 피해는 이웃의 농민에게 넘겨진다고 보았다. 여기에 각종 무거운 세금의 부과와 세정의 문란은 농민 경제를 파탄으로 몰고 왔다는 사실을 들었다.

“진한(秦漢) 이후의 법제가 개인적인 욕구를 채우기 위해 제정됨으로써 그 모순이 고쳐지지 않아 폐단이 쌓이고 쌓였다. 그래서 마침내는 중국이 오랑캐에 멸망되었고, 우리 나라는 외침을 받아 천하의 수치를 당하였다.폐단이 있는 법을 고치지 않고는 세상이 잘 다스려질 수 없으며, 폐단이 폐단을 낳아 오랜 시간을 지내는 동안 실처럼 얽히고 설켜 그 근본을 찾지 않으면 이를 해결할 수 없다” 고 설파 한다.

일례로,  사욕에 바탕을 둔 법제로 조선땅 에만 존속해 있는  노비세습제(奴婢世襲制)를 들면서, 이는 천하의 악법 중에 악법이라고 질타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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