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일 작
“탁덕(鐸德)의 길 순명의 길 ”
폭풍 같았던 결단과 각오의 시간이 지나자, 직암과 승훈은 존창의 집이며 인근 곡식 창고, 서당, 방앗간을 둘러보기로 했다. 사실상 집 구경이라기보다는 동리 구경이었다. 존창은 형제들, 인근 부락민들과 함께, 공동생활 이라 부를 만한 공존의 터전을 일구어 놓고 있었다.
존창의 동리 여사울은 뒤편 광덕산 자락을 배경으로 한 초라하기는 하지만 실속 있는 장원 같았다.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없는 게 없는 자급자족의 삶터였다. 존창의 방앗간을 중심으로 20여호가 올망졸망 모여 있는 동리였다.
동리 앞으로 펼쳐진 논 하며 연자방아, 물레방아와 여러개의 매틀이 있는 공동 방앗간 , 큼직한 곡식 창고, 곳곳에 널린 푸성귀 밭과 채마밭, 그리고 외양간에는 소가 열두 마리나 있었다.
“동리 사람들 것입니다. 이렇게 한데 키우면 여러모로 편리하지요.”
그 앞을 지날때 직암과 승훈의 눈이 둥그래지자 존창이 한 말이었다.
존창은 그 말 한마디로, 나만의 소유가 아니라 ‘공동의 삶’을 가꿔왔음을 드러냈다. 공동체 결성에 힘을 쏟았던 직암으로서는 그냥 지나칠 일이 아니었다.
다시 류심히 보니 마을이 자리 잡은 위치도 절묘했다.
광덕산이 병풍처럼 마을을 둘러싸고 있었고, 옆으로는 맑은 아선천이 흘렀다.
비록 뒷산은 나랏님 산이었지만, 초입의 완만한 비탈은 마치 사유지 처럼 존창 마을 사람들이 가꾸며 살고 있었다.
이러자니 예산현 관아와의 관계가 원만해야 했음은 물론이다.
존창은 마을 사람들이 군역이며 조세, 부역 등을 솔선해서 빠짐없이 이행하고 있고 , 관아도 몇몇 일들은 묵인하듯 넘어가 주면서 대체로 존중해 준다고 했다. 이러자니 뒷 사연이 많을 듯 싶다.
참 그런데 여사울이 ‘비슷하다’는 의미의 ‘여(如)’자가 ‘서울’이란 단어 앞에 붙여져서 만들어진 합성어로, “부유한 기와집이 즐비하여 마치 서울에 온 듯한 느낌이 든다]”는 데서 유래된 말이라고 하는 얘기가 있는데 이는 이만 저만 틀린 말니다. 하다못해 최근의 예산 관광지도에도 그렇게 나오는데 잘못된 얘기다.
여기 여사는 우리말 여우, 여시, 여수의 변형으로 여웃골이 그 어원이다. 나중에 이곳에서 야소교 신자가 많이 나와 야소골로 불려 다는 얘기는 오히려 신빙성이 있다. 신유박해 무렵 충청감사 박 종악이 조정에 올린 장궤에는 여사울 100호 가정 가운데 80호 가 야소교 신자 가정이라고 했다.
직암의 눈길이 큰 연자방아에 쏠려 있을 때 존창이 배시시 웃으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 방앗간이 오늘의 저와 마을을 있게 한 일등 공신입니다, 숙사.”
“그렇겠지, 알고 있다네.”
존창이 끄덕였다.
방앗간, 방아터에는 . 해질녁 이었는데도 사람들 여럿이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다. 저마다 일손을 몸추고 일행에게 공손히 인사를 해왔다.
커다란 물레방아가 두개 나란히 있었는데 가을 가뭄이라 그런지 물이 많지 않아 졸졸 흐르듯 서서히 돌고 있었다. 그 뒤편에 있는 큰 연자방아 에서는 큰 소가 무심한 듯 되새김질 하며 돌고 있었고 조금 떨어진 방아틀 옆쪽에서 멍석으로 연신 쌀이 쏟아져 내려오고 있었다. 멍석에 쏟아진 쌀들은 사람의 손으로 옆쪽 중간 규모의 방아틀로 옮겨지고 있었다.
뒤편 중간 규모의 방아틀들은 낮고 작지만, 정교하게 보이는 방아틀 이었다.
수레바퀴처럼 연결된 도르래와 돌림기둥이, 물레방아 에서 길어온 힘을 서서히 모아 곡물의 껍질을 조용히 벗겨내고 있었다.
그랬다. 그 방아틀 들이 바로 이존창이 직접 설계하고 만든, 여자 방아나 물레방아 방아에서 나온 쌀을 한 번 더 곱게 깎아내는 방아, 한 차원 다르게 개조된 ‘연백미’용 방아 틀 이었다.
“이게 바로 존창방아로군. 오늘 에서야 그 실물을 보게 되는 구먼”
존창이 웃으며 다가가 방아의 위쪽 닫혀진 평면 구조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렇습니다. 존창 방아는 허풍이고 조금 개량을 했지요.”
“조금 개량한 게 아닌데 그래”
“겉 껍질만 벗겨선, 밥맛이 덜하더군요. 한 번 더 깎아내면, 속살이 드러나고… 그때 비로소 향이 납디다.”
바로 그 순간, 방아의 나무 지렛대가 한 바퀴 더 돌아가며 희고 고운 쌀이 바닥 작은 멍석에 가만히 내려 앉았다. 세 사람은 그 쌀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다시피 쌀은 구조상, 껍질을 벗겨야 한다. 그래서 탈곡 이후에는 정미(도정)가 필수였고, 이 도정 과정이 쌀의 품질과 등급을 좌우하는 기술이었다. 이존창이 정미업으로 돈을 벌었다는 건, 쌀을 제대로 도정해서 백미로 내놓는 기술과 장비, 인력이 있었다는 얘기인데 이 도정기, 방아틀이 바로 그의 전가의 보도 였던 것이다.
이전에는 대부분 탈곡과 풍구질, 절구 찧기 정도로 쌀을 가공했다. 그래서 현미 수준으로만 먹는 게 일반적이었고, 흰쌀(백미)은 극히 드물고 귀했다. 백미는 부드럽고 흡수가 빠르지만, 손질이 힘들고 농민의 고되고 섬세한 손 작업에 크게 의존해야 했다. .
존창은 절구 대신 수차(水車)와 연계된 맷돌 구조를 개조해, 왕겨와 미강을 단계적으로 분리하는 방식을 고안해. 이를 통해 일종의 반백미 또는 연백미 수준까지 깎아내는 데 성공해 이내 각광을 받았던 것이다.
사실 직암에게는 존창의 백미가 낯설지 않았다. 몇해 전 부터 그가 양근 권가 학당으로 몇 가마씩 실어 왔기 때문이다. 일종의 학당 수업료 이기도 했는데 학당과 집안의 좌장인 녹암은 고마와 하면서도 입이 호사를 하면 마음이 황폐해 진다며 자신은 계속 현미를 고집했다.
녹암은 영양면에 있어서와 포만감 지속에는 현미가 더 뛰어 나다는 지론을 폈다. 이곳 예산의 동료들인 정산 선생과 농은 선생의 절제 검약 생활과 궤를 같이 하는 지론이었다. 어쨌든 백미는 결과적으로 식감은 더 부드럽고, 조리 시간도 줄어들고, 귀한 대접용 쌀로 인식되고 있었다.
승훈의 눈빛을 반짝이며 방아 아래 쌓여 있는 고운 쌀을 만지면서 중얼거리듯 말했다.
“사람도… 그러해야 하지요. 세례 한 번 받았다고, 기도 한번 올렸디고 묵은 죄악과 훈습이 모두 벗겨지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이란 것도, 삶이란 것도… 속껍질까지 벗겨내야 비로소 맑아지겠지요.”
직암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방아는 소리 없이 쌀을 깎고 있었고, 그 안에서 한 시대의 결심이 돌고 있었다.
그날 다시 간략하게 듣게 된 존창의 성공담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도정 기술을 개발 했다고 해서 금방 큰 돈을 벌 수있는 일은 아니었다. 농은 홍유한 선새의 소개로 양근 권씨 형제를 스승으로 모시게 됐고 천진암 강학에 나오면서 존창은 어학의 귀재이자 이재에도 영리했던 역관 최창현을 알게 돼 친하게 됐다. 둘만의 무슨 얘기가 오갔는지 창현의 소개로 송파 에서 쌀 유통업을 하고 있던 그의 인척 이대용을 만니게 되면서 그의 쌀 사업이 일취월장 하게 된다.
그런데 존창의 성공에는 이용후생의 가치를 추구 했던 현 임금(정조)의 역할도 지대 했다. 현 주상이 즉위 직후부터 숙종 이래의 악법인 금난 전권 폐지를 추진하지 않았더라면 이대용같은 믿을 만한 미곡상을 만날 수 없었고 만났다 하더라도 사업으로 이어 질수 없었다.
당초 자신의 다섯마지기 논에서 나온 소출과 주면 친한 이들의 내포 쌀을 자신 방식으로 희게 도정했던 존창은 이를 한양에 팔아야 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한양 시전 육의전 미곡점에 들고 갔었다. 원칙적으로 지방 곡물의 도성내 판매는 관허시장인 시전의 일이었다. 마포나 송파에 사설시장인 난전이 있다고 하지만 이들을 언제든 단속하고 치죄 할 수 있는 권리인 금난전권을 종로통 육의전 시전상인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노론의 돈줄이었다.
약아빠진 시전 상인들은 존창의 백미를 날로 먹으려 들었다.
그럴 때 마침 존창 백미의 상품성을 알아 본 이대용이 나섰고 대용은 거룻배를 삽교 포구로 동원해 와 존창의 쌀을 송파 나루로 실어 냈고 존창의 백미는 한양의 양반가와 관가로 유통됐다. 그야말로 날개 돚힌 듯 팔려 나갔다. 송파 장시(場市)는 삼남 지방과 한양을 잇는 곡물 유통의 역할을 하면서 육의전을 압도 했고 한양 내 힘께나 쓰는 집안에서는 “이존창네 내포쌀이 아니면 안 먹는다” 는 말이 나올 정도로 명품 쌀로 인식됐다.
그러니 내포평야의 쌀은 존창의 방앗간을 거쳐야 진짜 내포쌀이 된다는 말이 나올 정도 였다. 존창의 농토는 계속 늘어갔고 여사울 호동리에 들고 싶어 하는 내포 주민이 점점 늘었던 것이다.
” 다 우리 직암 숙사님과 강학 형제들 그리고 나랏님의 덕이 지요. 모두 천주님 은혜 라고 생각 하고 있습니다. 천주를 만나지 못했다면 창현도 만날수 없었겠지요. 숙사 저는 제가 일군 이 알량한 재산이 제 개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
“그래야지, 그래서 내가 자네를 좋아 하고 존경하고 있다네.”
“존경이라뇨, 당치 않습니다. 숙사.”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