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일 작
“탁덕(鐸德)의 길 순명의 길 ”
그날밤 세 사람은 앞일에 대해 숙고에 숙고를 거듭했다.
“우리가 임시로라도 탁덕을 세우지 않으면, 이 씨앗은 흙 없이 뿌려지는 셈이지요. 광암의 뜻도 저버리는 셈이 되는 것이고.. ”
촛불은 여러개 다 타버렸고, 동녘 하늘이 흐리게 밝아올 무렵,
“하늘의 뜻이 사람의 손을 통해 이뤄진다면… 그 손은 얼마나 맑아야 할까.”
동섬이 이렇게 말했고 직암은 이를 받아 중얼거렸다.
“맑기만 해서는… 안 되는 일도 있지요. 때로는 흙투성이 손이 씨를 심습니다.”
그 말에 방 안의 공기가 잠시 멈춘 듯 조용해졌다.
세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았고, 그 눈빛 안에는 아무도 말하지 않은 같은 질문이 깃들어 있었다.
우리가 하려는 이 일이, 정말 천주의 뜻을 따르는 걸까?
“숙사님들,” 승훈이 숨을 고르며 말한다. “우리… 기도합시다.”
다소 어색하고 조심스러운 제안이었다. 직암은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지만 동섬은 잠시 망설여야 했다. ‘기도라.. 그건 내게 아직 생각을 가다듬는 조용한 시간일 뿐인데…’ 정식으로 세례를 받지도 않은 동섬에게는 아직 천주교 기도는 낯선 일 이었다. 실은 직암도 기도에 대해서는 승훈에게 더 듣고 싶은 얘기가 많았다.
그때 명례방에서 추조의 나졸들이 들이 닥쳤을 때 광암과 승훈이 기도에 대해 일동에게 일러 주고 있던 중이었다. 직암 이며 초기 세례자 들은 셰례식 때 천주학에 있어 기도는 천주께 허심 탄회 하게 자신을 아뢰고 일을 상의하는 편한 시간이라는 얘기만을 듣고 그날 통성기도를 하기는 했지만 그 형식과 예절에 대해서는 암암리에 어깨넘어로 알고 있는 정도였다.
하지만 기도의 효험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았기에 직암은 자신의 방에서도 용문산에서도 기도를 올리기는 했는데 무언가 미진한 감을 금할 수 없었다. 동섬에게도 기도에 대해 따로 얘기하지 않았다.
“자네는 기도를 게을리 하지 않았나보군, 그러세, 천주께 기도를 올려 보세.”
지금 이자리에서 궁금한 그런것 들을 다시 묻기에는 어울리지 않았기에 다음기회로 미루기로 하고 승훈의 기도 요령을 주시 하기로 했다.
“괜찮겠죠 형님”
동섬을 돌아보며 확인하듯 물었다.
“하늘이 계시다면… 우리가 외면하지 않도록, 우리가 그분을 닮아갈 수 있도록… 그렇게 빌어봅시다.”
동섬은 그렇게 말했다.
승훈은 방 한복판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았다. 그의 눈빛은 흡사 불씨처럼 빛나고 있었다.
승훈은 이어 천천히 기도의 말들을 읊기 시작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천주님, 천주님, 당신을 믿나이다. 당신을 바라고 사랑하나이다. 제 마음을 다하여…”
거기까지만 읊조리고 속으로만 기도하는지 소리를 내지 않았다. ㅣ
직암도 ‘하늘에 게신 우리 아버지 …’ 하고는 생각에 잠겼다. 방 안은 고요해졌지만 이내 조용히 읊조리는 소리가 다시 들렸다. 누군가는 작게 읊조렸고, 누군가는 눈을 감고 마음속에서 저마다의 언어로 기도를 올렸다.
직암은 조용히 속으로 되뇌었다.
‘이 기도가… 천주의 뜻에 닿을 수 있을까.’
그는 문득 용문산 바위 위에서 바람 소리 속에 감도는 이상한 평온함을 느꼈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 날 밤, 별빛이 유난히 깊었고, 어떤 이끌림 같은 것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신의 응답인지, 마음의 반향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자신의 방안에서 들렸던 ‘보록 처럼 나서 교회를 건설하라’ 했던 그 음성을 떠올렸다. 그때는 기도의 순간은 아니었다.
직암은 무릎을 꿇고 손을 모았으나, 마음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눈을 감자, 오래 전부터 맴돌던 한 물음이 다시 떠올랐다.
‘정녕 우리가 성부른 제도로 하늘의 뜻을 앞질르는 것은 아닐까.’
자신들이 세우려는 가성직 제도. 유교의 사문난적(斯文亂賊)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아니, 이미 그 소문만으로도 누군가는 큰 고초를 겪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고초의 피가, 생명을 살리는, 도탄에 빠진 백서들을 구하는 피가 될 수 있을까.
그는 속으로 조용히 물었다.
‘주님, 당신의 교회를 세우려는 이 발걸음이 오만이옵니까, 아니면 순명입니까.’
한참을 그렇게 앉아 간구하고 묻고 있던 그에게, 문득 마음 한 구석이 서늘하게 열리는 듯했다. 말이 아닌, 환시도 아닌, 그러나 무엇인가 있었던 것만은 분명한 순간.
희미한 바람 한 줄기가 그의 뺨을 스쳐 지나갔다.
누군가 곁에서 숨죽여 우는 듯한 소리도 들리는 것 같았다.
그는 문득, 용문산 바위 위에서 맞았던 그 밤을 떠올렸다.
그때도 그랬다. 말은 없었으나, 길이 열린 것 같은 기분.
불안은 남아 있으나, 두려움이 아닌 책임감이 그것을 감싸안고 있었다.
직암은 눈을 떴다.
이제 그는 확신을 얻은 것이 아니었다. 다만, 한걸음을 내딛을 만큼의 평화를 얻었을 뿐이다.
승훈은 아직도 기도의 자세를 풀지 않은 채 낮은 목소리로 마지막 기도문을 읊었다.
“저희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뤄지이다.”
동섬은 손을 모은 채 한참을 앉아 있었으나, 눈을 뜨며 조용히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나는 어째서 아무런 감응도 느끼지 못하는지요 천주님.’
동섬은 무릎을 꿇은 채, 앞에 놓인 등잔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마음이 조용했다. 아니, 너무 조용해서 불안할 정도였다.
그는 기도문을 외우지도, 소리를 내지도 않았다.
그저 마음속에 조용히 물었다. 자신의 천주학 지식을 인정하고 따르는 두사람의 태도가 고맙기도 하지만 어색하고 계면 쩍기도 했다.
‘내가 그 일을 맡아야 하나?’
그 순간, 오래 전 이벽과 함께 나눴던 말들이 떠올랐다.
그가 담대하게 천주의 도를 전하던 그, 그때, 동섬은 조용히 뒤따랐다. 마치 운명처럼…
지금도 마찬가지다. 직암이 앞장서고, 승훈이 문을 열고 있다.
‘나는 늘 뒤에 서 있었다. 왜일까.’
그는 그것이 두려움 ,겁 때문만은 아님을 알고 있었다.
오히려 그것은 기다림에 가까운 것이었다.
때가 이르지 않았다는 느낌.
자신이 감당해야 할 몫이 아직 보이지 않는다는 막연한 확신.
그는 자신이 지금 나선다면, 너무 이른 말이 되고, 너무 얕은 믿음이 될까 두려웠다.
가성직 제도. 그 뜻은 이해하지만, 자신은 그 위에 서지 못할 것 같았다.
아직은 아니다. 아직은.
그는 무릎을 꿇은 채 마음속으로 조용히 기도했다.
‘천주님, 저를 써주시려면, 제가 감당할 수 있을 때까지 숨겨 두소서.
그리고 제가 해야 할 일이 다가오면, 외면하지 않게 하소서.’
그날 밤, 동섬은 누구보다 조용했지만
가장 오래 깨어 있었다.승훈은 하늘을 향해 말을 건넸고, 직암은 어딘가에서 응답의 실오라기를 붙잡은 듯했다.
하지만 자신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아무 말도, 아무 기척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세 사람의 마음속에 기도는 바라는 것이 아니라, 들어올리는 것이라는 감각이 조용히 내려앉았다. 조용하면서도 무거운 의문.
그러나 그 의문이 그들을 멈춰세우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질문을 품은 채 한 걸음을 내딛는 것.
그것이 이들의 방식이었다.
기도는 천주인들에게 참으로 큰 무기였다. 후일 가성직 제도에서 임시 탁덕, 보탁덕의 품을 받은 일동은 승훈에게 성무일도에 대해 차분이 들을 수 있엇고 이를 전국 방방곡곡에서 적극 시행할 수 있었다.
“제가 북경에서 신부님들께 배운 기도 방식은 이렇습니다. 기도는 언제 하는 것이 좋을까요? 첨례 때 정성껏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할까요? 아니면, 생각날 때마다 그때그때 바치면 될까요? 야소께서 주신 정답은 사실 따로 있습니다. “항상 깨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항상 기도하라’는 이 말씀을 실천하고자 노력했습니다. 이에 따라, 하루 세 번 기도를 바쳤던 유다인들의 전통에 더하여, 밤 기도, 새벽 기도 등을 추가해, 하루에 8번 기도를 바치는 전통이 확립되었습니다.”
“이 기도들에는 기도 내용도 정해져 있었습니다. ‘시편’을 중심으로 성경 등을 덧붙여 읽으며 기도했습니다. 이렇게 시편을 중심으로 정해진 기도 내용에 맞춰, 일정하고 지속적으로 봉헌하는 기도가 바로 ‘성무일도’입니다. 몇 차례의 변화가 있었지만, 시편 150편의 대부분을 한번 순환하는 구성을 갖추었고, 하루 최대 7번 기도할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습니다.”
정약용을 끌어들이기 전에도 직암과 승훈은 그의 모습을 떠올리며 기도를 올렸고, 유항검에게 자네가 신부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권 하기 전에도 둘은 그를 떠올리며 간절한 기도를 올렸다. 10명의 임시 탁덕들을 만나기 전에 모두 그럈다. 직암과 만천은 중보기도를 몸으로 체현하고 있었던 것이다. (계속)
<위 사진, 세계 3대 성모 발현지 중 하나로 알려진 멕시코 과달루페의 성모 성화. 1531년 12월 9일부터 12일 동안 4회에 걸쳐 발현한 성모가 자신의 발현을 증명하기 위해 목동의 망토(틸마)에 자신의 형상을 새긴 기적을 보였다고 알려져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