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일 작
“탁덕(鐸德)의 길 순명의 길 ”
직암과 동섬이 반석방 승훈의 본가로 그를 찾았을 때 승훈은 출타하고 집에 없었다. 기별을 하기도 그렇고 해서 무작정 찾아 왔더니 그랬다. 하지만 마침 함께 마당에 나와 있었던 승훈의 모친 여주 이씨와 그의 부인 나주 정씨가 매우 반갑게 맞아 주면서 안에서 기다리시면 곧 찾아 오겠다고 했다. 승훈은 부친과 함께 살고 있었다. 바로 인근에 집을 하나 장만해 분가해 살고 있었는데 을사년 그 사달이후 부친이 본가로 들어 오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동욱 대감의 부인인 여주 이씨는 이가환의 친누이 였고 승훈의 부인 나주 정씨는 약전과 약용의 친누이였다. 직암은 승훈의 혼인 때도 참석을 했었고 두 고부와는 가환의 집안 대소사에서 마주친 적이 여러번 있었다. 남인들은 여느 양반들과 달리 허례가 다분한 내외의 법도를 별로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기에 이야기도 자주 나눈 꽤 이무러운 사이였다. 승훈이 부친과 함께 마실삼아 출타한 곳이 바로 이웃 이란다. 여전히 그토록 반갑게 맞아주는 두 고부의 내색이며 부친과 함께 동네 마실을 다니는 것으로 보아 생각보다 신관이 엄혹 하지는 않은 듯 해서 적이 안심이 됐다.
승훈의 방에서 승훈의 부인이 내온 다과상을 마주 하고 방안을 둘러보니 안심은 확신으로 자리 잠았다. 승훈이 서재처럼 사용하는 작은 사랑의 방에는 다 태웠다고 하던 천주학 서적들이 즐비 했다. 책 시렁 한켠 구석에는 로사리오도 오롯이 놓여 있었다. 직암과 동섬은 서로 쳐다보며 안도의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 였다.
직암의 시선이 흰 국화가 피어있는 뜨락에 잠시 머물러 있을때 승훈이 급하게 문을 밀고 들어섰다. 승훈 몇 달 사이 무척이나 초췌해져 있었고 눈밑의 검은색이 유난히 두드러졌다.
“숙사님들 께서 어떻게 이 어려운 걸음을… 제가 찾아 뵈야하는데…” .
동섬과 직암은 일어서서 그를 맞아 서로 한쪽 손을 동시에 잡았다.
“얼마나 심려 고초가 많으셨는가? 그나마 다행이 여전 하시네 마실도 다니고…”
“아닙니다. 마실은요, 아랫 동네 친척댁에 일이 있어 부친과 함께 모처럼 나갔는데…”
승훈은 굳이 절을 올리겠다고 했다. 승훈은 두 숙사에게 늘 깍듯 했다. 하기는 동섬은 승훈의 부친인 이동욱 대감보다 나이가 많았다. 직암도 이 대감과는 두살 차이 밖에 나지 않았다. 동욱이 워낙 어려서 혼인을 했기에 18세에 얻은 장남이 승훈이다. 게다가 두 사람은 승훈이 가장 따르는 외삼촌 정조 이가환과 가장 막역한 사이이기도 했다.
동섬에게 먼저 큰절을 올리면서 승훈은 눈물을 훔쳤다. 직암에게 절을 할 때는 거의 흐느꼈다. 두 사람도 찡한 코를 느끼면서 반배로 응대했다.
“제가 죄인입니다. 저 때문에 숙사님들 이며 우리 교우들이 그토록 고초를 겪어야 했지요”
“왜 만천 자네 때문인가. 내가 그날 추조를 다시 찾아가지만 않았어도 사달이 그렇게 크게 번지는 않았을탠데…”
이승훈은 고개를 깊이 숙였다.
“광암 형님을… 끝내 그렇게 보낼 줄은… 모두 제 잘못입니다. 광암 형님께 목숨을 걸어야 한다고 계속 들이 대지 않았더라면 형님이 그렇게 유명을 달리 하실 일이 없었을 텐데, 정작 저는 저만 살겠다고..제가 죄인입니다. 도마 형제는 산골에서 귀양 살고 있고 마대 형제는 아직도 장독에 시달려 절뚝이고 있다니…”
직암이 고개를 저으며 다시 그의 손을 잡았다.
“그건 우리가 감히 헤아릴 수 없는 천주님의 시간이었다네, 이백다.,.”
“이 벡다, 야소 께사는 백다에게 물으셨다지요? 세 번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동섬이 어디서 들었는지 분위기 있는 멋진말을 했다.ㅣ
방 안에 바람이 돌았다. 창호가 소리 없이 흔들렸다.
“저는 야소의 사랑을 배반하고 벽이문 까지 쓴 변절자 입니다.”
“그 사정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네, 어쩔 수 없는 고육책 아니었나?”
동섬이 먼저 이렇게 말햇고 직암이 이어 받았다.
“말 안 해도 알고 있다네, 그리고 그 벽이시라고 했던가 나는 오히려 그 시에서 자네의 천주로 향한 그리움을 느꼈다네..”
“그러셨군요 부끄럽습니다.”
“그런데 그 시 자네 솜씨가 아닌것 같던데 소암이 초를 잡았지 않았나?”
소암은 그의 부친 동욱의 호였다.
“어찌 그걸 숙사가 아십니까?”
“춘부장과 우리가 동문수학한 세월이 얼만인데 그걸 어찌 모르겠는가 ?”
“그래도 결안은 제가 냈습니다.”
“그러니 홍문교를 건너 그리워 한다고 했겠지 허허 ”
저간의 사정이 있었다.
이동욱은 여러번 연경 사신단의 서장관으로 뽑힐 만큼 문장가얐고 명필 이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그때 아들 승훈이 북당에서 세례를 받을 때 참관 했었다. 용인 정도가 아니라 적극 후원을 했던 것이다. 그라몽 신부와도 몇 차례 필담으로 교분을 쌓았던 것으로 직암은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가 불거지자 이는 큰 화근으로 돌아 올 일이었다. 승훈 한사람 뿐 아니라 동욱과 집안 전체가 재기 불능의 멸문지화에 빠질 일이었다. 그러니 더 적극 나서 천주학 서적을 불태웠고 승훈의 다리몽둥이를 분질러 놓았다고 소문을 냈던 것이다.
한참의 침묵이 있은후 동섬이 승훈의 잔에 차를 따르며 말했다.
“만천 자네는 조선의 첫 영세자 아닌가? 그게 보통의 인연인가. 나는 천주께서 그 순명을 헛되이 쓰시지 않으실 것이라고 확실히 믿고 있다네.”
이승훈은 한참 침묵하다 말을 이었다.
“두 분이 저 같은 사람을 다시 찾으실 줄은 몰랐습니다. 면목이 정말 없습니다. 특히 배교문을 작성해 동네 방네 떠들어 댔는데… 저는 그저 물러나 있어야 되는게 아닙니까? ”
직암이 부드럽게 웃으며 대꾸 햇다.
“우리가 여기서 물러난다면 광암은 어떻게 되겠나?”
창밖에서 바람 한 줄기 지나고, 종이창이 살짝 떨렸다.
“그렇다면 숙사님들 께서는 무슨 계획이라도?”
“그렇다네 이제, 우리 교우들 위해 남은 길을 걷도록 하세나”
“숙사들 깨서는 저 같이 나약한 자를 믿을 수 있으십니까?”
“믿지 않았으면 오지 않았네.”
“또 이렇게 와보니까 자네가 변심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할수 있었네, 저 천주학 책들이며 저 장궤들은 무엇인가?”
“실은 나도 흔들렸다네, 동섬형님 아니었다면…”
직암은 자신이 흔들렸던 때의 얘기를 들려 줬고 용문사에서의 각오와 현담당의 조언들을 들려 줬다.
“이제 막 교우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중이 아니었소? 조선에 탁덕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우리 생각이오, 당분간 . 탁덕, 신부는 오지 않습니다.”
동섬은 탁덕, 신부라는 용어를 중복 사용해 강조했다.
탁덕(鐸德)은 신부(神父)의 중국식 한자 용어다. ‘덕을 치는사람’ 의 뜻으로 더 높은 하느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직능을 가진 사람이라는 뜻이다. 아다시피 신부(神父)는 영혼의 아버지라는 뜻. 신부는 신자들에게 새 생명을 주는 점에서 아버지가 아들을 낳는 것과 같은 입장이라는 얘기다.
사도 바오로는 코린트의 편지에서 ‘여러분을 내 사랑하는 자녀로 생각하고 교훈하려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또 중국에서는 장군의 명령을 선포할 때에는 금탁(金鐸)을 쳤고 천자(天子)의 명령을 선포할때에는 목탁(木鐸)을 쳤다고 한다.
세사람의 얘기는 여기까지 이어지고 일단 그쳐야 했다.
집 주인 동욱이 들어와 떠들레 인사를 했고 안채에서 저녁이 준비 됐으니 소찬이지만 모처럼 반주나 한잔 하자고 헤서 안채로 들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형님들이 여기까지 왠일 이십니까? 오셨다고 해서 이내 달려 오려고 했는데 저쪽 얘기가 길어가지고…”
동섬이 있어서 였겠지만 동욱이 직암을 형님이라 부른 것은 처음이었다. 같은 스승 밑에서 동문수학 한 사이지만 워낙에 동욱은 어려서부터 총명함과 필력을 드러낸 준재여서 주변의 사랑과 인정을 일찍 부터 받았고 급기야는 스승 성호가 가장 아끼는 수 제자이자 친 조카인 이용휴의 눈에 쏙 들어 18세의 동욱에게 두살 연상인 자신의 딸을 짝지워 주기 까지 했다. 동섬의 절친인 가환의 매형이 된 것이다. 가환 누이는 용모가 뛰어 났기에 탐을 내는 남인가 들이 많았는데 짝이 따로 있었던 것이다.
소암 동욱과의 반주를 곁들인 저녁 밥상에서 앞으로의 계획 등 구체적인 얘기는 서로 애써 피했지만 엄청난 정보를 직암과 동섬은 들을 수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