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일 작
“방낙아, 보록 처럼 나서 교회에 헌신 하거라”
<타산지석 회암사의 흥망성쇠> 마지막
“계속 깨달음 깨달음 하시는데 도대체 그 깨달음이란게 무엇을 뜻 하는지 궁금합니다. 석가모니가 처음으로 깨달음을 얻으셨다고 하는데 그 깨달음하고는 내용이 다른 것입니까?”
“ 정곡을 찌르시는 질문이십니다. 역시… 깨달음은 물론 석가모니 부처남께서 처음으로 이루셨지요. 선비님들도 잘 아시는 사성제, 연기법 팔정도를 깨달으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만 이는 추후에 쉽게 설명하신 것으로 당초에는 세상과 인간사의 원리와 까닭을 각고 끝에 깨우치신 것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도 처음에는 이 어려운 얘기를 사람들에게 해봐야 알아듣는이 없겠다고 해서 혼자만 간직하려 하셨다지 않습니까? 우리 선가에서는 깨달음이란 ‘내가 누구인가?’ ‘이 세계는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직관적이고 즉각적인 이해를 의미한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아는 것’ 또는 ‘참된 본성을 직관하는 것’이라고 설명됩니다.”
“스님은 스스로를 선가의 일원이라고 여기시는 군요”
“그렇습니다. 저도 10년 선방에서 참선 했습니다. “
“참선 얘기는 그렇지 않아도 궁금한 게 많은데, 다시 하도록 하고, 깨달음 얘기부터 먼저 들려주시죠.”
“ 한마디로 깨달음은 논리적 이해나 감정적인 자각이 아니라, 직접 체험하는 것입니다. 단순한 지식적 이해가 아닙라는 얘기 입니다. 마치 불을 직접 만져 봐야 뜨거움을 아는 것처럼, 수행을 통해 직접 체험해야 한다는 것이 우리 선가의 입장입니다. 그래서 참선을 합니다.”
“그렇다면 선종에서는 연기법이나 사성제 팔정도 초기 법문을 높이 여기지 않게 되겠군요.”
“그렇습니다. 그런 말씀도 한 방편이라고 보는 경향이 있지요. 불립문자라고 들어 보셨지요. 아무튼 석가도 깨 달았는데 나라고 못할것이냐 하는 용맹정진으로 참선, 좌선에 매달립니다.”
“굳이 좌선을 고집해야 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석가모니가 행한 득도 의 방식이 바로 좌선이기 때문입니다.”
“석가를 만나면 석가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고 했더더니 석가모니를 인정하기는 하는군요.”
“그럼요, 천상천하 유아독존이 종조이신데요, 그 말은 그정도로 철저하게 구애받지 말라는 얘기입니다. 들어 보시죠, 석가모니 부처님은 정각(正覺)을 얻은 뒤 강가에 있는 보리수 아래에 계속 머무셨습니다. 그때 부처님은 한번 결가부좌한 그대로 이레 동안 해탈의 기쁨을 누리면서 앉아 계셨다고 하지요. 그 기쁨과 환희를 이레동안 만끽 하신 후 이레째 되던 날 초저녁 경 부처님은 그 자리에서 일어나 연기(緣起)의 법을 열두개의 범주로 생각하셨다고 초기 경전에 나와 있습니다.”
“이레 동안이나 환희와 기쁨이 지속됐다는 말씀이군요. 그것이 바로 선정 삼매의 환희인 게로군요.”
직암은 대뜸 간절히 기도할 때 임하는 성령을 떠올렸다.
“그렇습니다. 선종의 출발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부처님이 맛보신 그 삼매의 기쁨을 나도 느껴보자, 못할 것이 무엇 있겠느냐 하는 만용에 가까운 용맹성이 생겨난 것이지요. 용맹정진의 확철대오라고 말하지만 어찌보면 매우 이기적이고 개인적인 욕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기적이고 개인적인 욕망이라…참 솔직하십니다. 참 화두는 무엇입니까? 불교 교단 처음부터 있던 것이 아니라고 하던데…” .
“그렇기는 합니다. 화두란 깨달음을 위한 핵심 물음이나 주제를 의미하지요 수행자는 이 화두를 집중적으로 묻고 들여다보며 궁극적인 깨달음을 얻게 된다고 얘기됩니다. 중국 선불교의 중흥조 조주선사 이후, 보통 ‘이 뭣고?’ 같은 질문을 반복하면서 자기 의식의 근원을 탐구하는 것이지요. 이를 간화선이라고 합니다. 화두 없이 하는 선을 묵조선이라고도 하는데 화두가 없었던 것은 아니죠. 석가모니 부처님의 화두는 생노병사 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
간화선은 선불교(禪佛敎)에서 수행하는 대표적인 방법 중 하나로 화두 (話頭)를 놓고 참구 방식의 선(禪) 수행을 말한다는것, 특히 부처를 죽이겠다는 임제 선사의 임제종(臨濟宗) 계열에서 강조하고 있다는 것은 직암과 동섬도 들어 알고 있었다.
” 깨달음은 단순히 “아, 그렇구나” 하고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수행(修行) 을 통해 체험해야 한다는 것이 선불교의 입장이자 논리 입니다. 깊은 의심이 극에 달할 때, 문득 깨달음이 찾아온다는 것이지요.”
“이해는 되는데 그런데 왜 도대체 10년 20년씩 앉아 있어야 한다는 것인지는 쉽게 동의 할 수 없겠습니다.”
” 깨달음을 얻기 위해 오랫동안 앉아 있는 게 이상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사실 모든 능력은 오랜 훈련을 필요로 합니다. 깨달음은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으로 완전히 체득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경전을 읽으면 “아, 집착이 없으면 자유롭겠구나!”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세속의 생활에서 화가 날 때, 정말로 “아, 집착을 내려놓으면 되지!”라고 하면서 바로 화가 풀리는가요? 그렇지 않지요! 그래서 그 깨달음을 실제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작동하도록 익숙해질 때까지 앉아서 계속 수행하는 겁니다. 단순히 머리로 아는 것과 몸과 마음에 배어 있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 그렇다고 해서 꼭 토글에서 몇년씩 나오지 않고 벽만 바라 보고 앉아 있어야 하는 가요? 세상과는 완전히 등을 지고. ”
”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핵심적으로는 외부 자극을 최소화해서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기 위해서입니다. 혼자 조용히 있으면, 벽을 보면 온전히 자기 내면으로 집중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세상의 눈으로 볼때 생산적이지 못한것은 틀림 없지요. 인정 합니다.”
“그렇다면 그 어렵게 증득한 깨달음의 상태란 무얼 말하는지, 깨닫게 되면 어떻게 달라지는지 궁금하군요. 부처님 말고 깨달은 사람이 있기는 한 겁니까? ”
“ 실은 저도 모릅니다. 선배 조사님들의 어록이나 행장을 따르면 깨달음은 자기와 세계가 둘이 아니라는 것(不二)을 체험적으로 아는 것이랍니다. ‘나는 나’, ‘세상은 세상’이 아니라 나도 세상도 근본적으로 하나의 흐름 속에 있음을 깨닫는 것이랍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좋다-나쁘다’, ‘옳다-그르다’ 같은 이분법적인 사고로 구분하지만 깨달음의 상태에서는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좋다” ‘나쁘다’ 라는 생각조차 본래부터 존재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낸 것임을 자각한다는 것이지요. 이 상태를 무아(無我) 또는 공(空) 이라고 합니다. 또 보통 사람들은 과거를 후회하거나 미래를 걱정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깨달은 사람은 오직 지금 이 순간, 있는 그대로를 온전히 경험하며 살아가게 됩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불가에서 말하는 ‘직지인심(直指人心)의 상태입니다.”
깨달음에 대한 현담의 결론이 이어졌다.
” 한마디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서 갑자기 초능력을 가지거나 특별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지요. 그러나 삶을 바라보는 방식이 완전히 바낍니다. 번뇌와 집착에서 벗어나게 된다고 합니다. 더 이상 외부 환경에 의해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과거와 미래에 매달리지 않고, 지금 이 순간을 충만하게 살아가게 됩니다. ”
꽤나 장황했지만 현자를 의미하는 것 아닌가. 선정 삼매의 환희심을 탐하는 현자라…
” 이같은 개인의 깨달음이 이 중생계 전체에는 어떤 의미를 갖게 됩니까, 좀 전에 스님이 깨달음에 대한 희구가 어찌보면 이기적이고 개인적인 욕망이라고는 하셨는데…”
“그렇습니다. 저도 그래서 상구보리 하화중생을 추구해야 하는 불가 전체의 입장에서 간화선에 너무 집착하는 작금의 불교계 세태에 대해 문제가 있다고 생각 하고 있습니다. ”
현담의 고백이기도 한 다짐이 이어졌다.
” 선사(禪師)들은 오랫동안 앉아 명상하지만, 결국 그 깨달음을 삶 속에서 실천하는 것이 진짜 수행이라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참선을 오래 해야 한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실제로 자유롭고 평화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것, 그리고 그것이 자기 자신 뿐 아니라 주변과 나아가 중생 전체가 그렇게 되는 것이 목적이 돼야 한다는 거지요.”
“참으로 옳으신 말씀입니다.”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그 깨달음을 삶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불교는 얼굴을 제대로 들수가 없습니다. ”
현담은 그 점에서 조선불교의 주류로 등장해 온 선종, 선가는 매우 이기적이 었다고 라고 할 수 있다며 다시금 자책했다. 하지만 자책은 불국토사상과 미륵사상 얘기로 이어지면서 더 커질 수 밖에 없었다.
“우리 불교에는 보살도라는 이타행의 큰 덕목이 있습니다. 부처가 될 지혜와 덕이 있음에도 ”
“이땅을 불국토 로 만드겠다는 것이 보살의 원력입니다. 불국토는 말 그대로 “부처의 나라”, 부처의 세계란 뜻으로 단순히 죽은 뒤 가는 극락만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대승불교에서는 이 현실 세계, 이 ‘사바세계(娑婆世界)’를 바로 불국토로 만드는 것이 핵심 염원입니다. 이 사바세계는 원래 고통과 번뇌로 가득한 ‘견디기 어려운 세계’지만 그 속에서 중생을 깨우치고 함께 고통을 덜어주면서, 결국 이곳을 불국토로 바꾸는 길이 바로 보살의 길이고 우리 불교가 비장하고 있는 미륵사상 입니다. ”
“현담스님 같은 내명한 불자들이 꿈꾸는 불국토는 어떤 모습 일까요?”
“그 세계는 단순히 괴로움이 없는 곳이 아니라, 고통 받는 자를 향해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는 이들이 늘어가는 세계입니다.차별 없고 평등하며, 모든 생명이 존엄한 세상 고통이 덜하고, 사람들이 서로를 도우며 살아가는 세상, 탐욕, 성냄, 어리석음을 줄이고, 지혜와 자비로 관계 맺는 세상입니다.”
애 끓는 웅변이었다.
이상적으론 천주학에서 말하는 천주님의 나라와 비슷했다. 그러나 방식과 무게중심이 달랐다. 천주학의 중심 개념은 사랑이다. 천주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이웃에게 실천하는 것, 바로 그것 이었다. 반면 불교의 자비와 지혜는 고통을 깨닫고 줄이기 위한 개인의 실천이다. 천주학에서는 구원은 천주의 은총과 그로 향한 믿음 에서 비롯된다면 불교는 자각(自覺)과 실천으로 자기 안의 불성을 발견해야 한다고 말한다. 어딘지 외롭게 느껴졌다.
평등사상은 천주학과 불교가 다르지 않았다. 하느님 앞에서 인간은 평등 하고 불가에서는 모든 존재가 본래 불성(佛性)을 지닌 대등한 그리고 무한 가능성의 존재였다.
보살의 큰 바람 ,서원인 중생무변 서원도(衆生無邊 誓願度)는 울림이 큰 덕목이었다. ‘끝없는 중생을 모두 건지겠다’ 이는 보살의 전가의 보도격인 사홍서원의 첫 구절로, 보살이 세운 네 가지 서원 중 하나다.
“끝없는 고통 속에 있는 모든 존재들을, 내가 반드시 다 건져내겠다.”
이건 단순한 ‘자기 구원’이 아니라, 타자를 위한 존재, ‘대속’이 아닌 ‘대비’의 실천 아닌가. 천주학에서 말하는 ‘성인의 삶’, ‘사랑의 실천’과 맞닿아 있었다.
현담은 조선 불교가 유교 이념 아래 억눌렸지만, 몇몇 승려들은 민중 속에서 고통받는 사람들 가까이 있었고, 임진왜란 때 서산대사, 사명대사 같은 이들이 보여준 행동은 일종의 보살행이라 할 수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거기 까지였단다. 조선불교는 이제 힘을 쓸 수 없을 정도로 훼철 됐다는 것이 현담 스님의 진단이었고, 하소연 이었다. 개인적 깨달음의 환희를 맛보기 위해 목숨을 건 승려 불자는 있었어도 진정한 보살도를 행하려 목숨을 건 승려는 무학 보우 이래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는 고백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