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일 작
“방낙아, 보록 처럼 나서 교회에 헌신 하거라”
<타산지석 회암사의 흥망성쇠>
분위기가 다른 이야기가 시작된 것은 무학이 두 백년 쯤 뒤에 조선에 동쪽으로 부터의 변란이 있을 것이고 이를 넘기면 또 한 두 백년 쯤 뒤에 서쪽에서 서학이 도래 할 것을 예언 했다는 현담당의 얘기 때문이었다.
현담은 그 얘기가 무학스님과 태조 이성계의 마지막 만남에서 나왔다고 했다. 서산 대사 휴정의 ‘산수집’에도 소개가 돼 있고 회암사와 용문사에서는 그 말이 대대로 전승되고 있다했다.
무학 대사가 풍수지리에 따른 도참 예언에 일가견 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작금의 서학 도래 까지 예언 했다는 것은 직암과 동섬에게는 귀가 번쩍 뜨이는 소식 이었다.
두 사람의 뇌리에 그 역사적인 장면이 그려졌던 것이다.
“어쩐 일이시오, 태상왕, 통 뵙기 어렵더니…”
무학이 일어서 합장으로 그를 맞았다. 주 거처가 회암사 정전이기는 했어도 태상왕은 여기저기 바삐 다니는 듯 했다. 무학도 여기저기 운수방납을 했기에 둘이 마주치는 일이 거의 없었던 것이다.
“자리 보전하고 누워 있다기에 병문안 왔더니만 멀쩡 하시구료려. 안심했소.”
실제 무악은 계속된 만행으로 몸살이 들어 며칠 누워 있어야 했다. 70을 넘기고 보니 젊을 때와는 달랐다.
“아무튼 오랜만에 뵙습니다 전하”
“무학당, 나는 그대 를 피한 적이 없소. 다만, 그대도 아시겠지… 세상은 이미 달라졌소.”
무학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태상왕. 제가 처음 뵈었을 때는, 장수였고… 그 다음은 국왕이셨고… 지금은… 그냥 사람입니다. 부처가 아닌 사람 ”
부처나 돼지가 아닌 사람은 두 사람 만이 아는 농담이었다. 태조는 웃지 않았다. 그저 손을 뻗어 감주전 기둥에 손을 얹었다.
“나는 사람을 믿었소. 삼봉도, 내 자식들도, 백성들도… 그리고 스님도. 그런데 지금은… 누구도 믿지 않게 되었소. 나 자신도 마찬가지요.”
무학은 생각에 잠긴듯 그런 이성계를 바라만 보았고 이성계가 말을 이었다.
“대사, 내가 이 짓을 잘한 일인지 모르겠소. …나라를 세운 것은 맞지만, 백성들의 마음이 편안한지… 나 하나의 야심과 욕심 때문에 고려 천년을 무너뜨린 건 아닌지…하늘이 웃고 있는지, 울고 있는지도 모르겠소…”
“전하, 나무는 뿌리를 버리지 않으면서도 새순을 틔웁니다. 고려는 마르지 않은 뿌리요, 조선은 자라나는 가지입니다. 전하는 제 몸을 베어 길을 연 자입니다. 그것이 옳았는지는 하늘도 섣불리 말 못할 일이옵니다. 다만 백성은, 봄이 오면 씨를 뿌리고, 겨울이면 불을 지피며 살아갑니다. 전하께서는 그 계절을 바꾸신 분이옵니다. 그 계절이 따뜻했는지 추웠는지는, 다음 임금이 짓고 백성이 말할 것이옵니다.”
“다음 임금? 다음 임금이 짓는다…방원이 그놈이…”
태조는 혼잣말처럼 중얼 거렸다.
“전하,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르고, 달은 차면 기울지요. 궁궐이든 풀섶이든, 흙으로 돌아가는 건 다 같은 이치옵니다. 다만 전하께서는 물줄기를 바꾸셨고, 달을 붙잡으려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것이면 족하옵니다.”
태조가 긴 침묵 끝에 무겁게 말했다.
“무학당… 고려를 멸한 죄는, 무수한 사람을 죽인 죄는 내 목숨 하나로 씻을 수 있을까요. 이 나라, 이 백성… 내가 저들을 더 나은 세상으로 이끌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요… 장차 조선이 과연 천년을 갈 수 있을까요?”
무학은 땅을 보다가, 고개를 들어 북천의 별을 바라보며 조용히 읊조렸다.
“하늘은 형체가 없으되 뜻은 있으니, 산천의 기운은 사람을 살리고도 나라를 넘긴다 하였지요. 전하께서 나라를 연 것은 하늘이 허락한 바이나, 후세가 그 뜻을 잊는다면 그 나라 또한 허물어질 것 이옵니다.”
“어찌, 어떤 모습으로 허물어진단 말이오?”
무학은 한참을 말이 없었다. 조용히 눈을 감고 마치 저 먼 미래의 물결을 귀로 듣는 듯이…
“전하… 이 조선이 하늘의 뜻을 따르고 백성을 근본으로 삼으면, 천년을 누릴 수도 있사오나… 성현의 도가 헛되어지며, 스스로만 높이고 남을 업신여기고 … 왕실과 조야의 사치가 있게 된다면, 이 나라는 두세 백 년 안에 큰 혼란을 겪을 것이옵니다.”
“지난번 정궁 지을 때도 그러시지 않았소? 그 일은 내 힘으로도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을 대사도 잘 알지 않소?”
한양 천도가 결정되고 정궁을 짓는 과정에서 무학과 정도전은 궁궐의 위치와 방향에 대해 논쟁을 벌여야 했다. 무학은 인왕산을 진산으로 삼고 북악산과 남산을 좌청룡과 우백호로 삼아 궁궐을 동쪽을 향해 배치하자고 주장했다. 반면, 정도전은 전통적으로 임금은 남쪽을 바라보고 정사를 봐야 한다며 북악산 아래에 궁궐을 지어야 한다고 반박했다. 결국 정도전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경복궁이 북악산 아래에 건립되었다.
이 과정에서 무학은 혀를 차면서 두백년 (200년) 뒤에 가서 내 말을 생각하게 될 것 이라고 혼잣말처럼 얘기했는데 동석했던 사관이 이를 공론화 했던 것이다. 무학은 그때 아무런 뜻이 없이 한 얘기라고 둘러대야 했었다. 그런데 2백년뒤 정말 동쪽으로 부터 변란이 일어 났다. 임진왜란(1592년)으로 도성이 무너지고 불타는 등 큰 혼란을 겪게 됐던 것이다. 그러자 무학의 예언이 다시금 회자 됐고 유학을 지상 명령을 떠받들던 선조 임금 조차도 신료들과 이를 공론의 장에서 되새겼다. 실록에도 나온다. 동섬 등은 실록을 볼 수 없었지만 다른 저술들에 많이 언급 되기에 들은 바 있었다.
무학의 진지한 도참 이야기가 이어졌다.
” 그리하여 언젠가, 동쪽에서 빛이 솟고, 서쪽에서 믿음의 말씀이 돌아와, 이 땅에 새 사상과 새 제도가 들어서리니… 그때에도 정신을 못 차리면 사직이 무너지고, 백성이 다시 길을 묻게 될 것이옵니다.”
태조는 놀라며 말했다.
“서쪽의 말씀이라니… 대사 무슨 도참의 기서를 읽은 것 입니까?”
무학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풍수는 형세를 보고, 도참은 바람을 듣는 법이옵니다. 허나 바람은 늘 진실만을 말하지 않사옵니다.
오직 마음이 고요할 때, 진실의 기운이 들리옵니다. 전하께서 그 마음을 아신다면, 훗날 백성들이 스스로 구원의 빛을 따르게 되리이다.”
태조는 계속 의아한 표정이었다.
“ 실은 연경에 있을 때, 사막 너머에서 온 장사치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머리는 황색, 말씨는 거칠고 억세었지요. 그런데 그가 하는 말은 이상하게 맑았습니다.”
“무슨 말을 하던가요?”
“하늘은 하나고, 그 하늘 아래 모든 사람은 다 귀한 존재라 했습니다. 부자도, 종도, 남자도 여자도 없이, 오직 ‘사랑’이 율법이란 말을 하더이다.”
이성계는 놀란 듯 고개를 들었다.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그런 세상은…”
무학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모르지요. 다만, 그 말이 수백 년 뒤에 동쪽으로 오리라는 생각은 들었습니다. 그때가 되면, 우리 조선은 큰 시험을 받을 것입니다.”
“무슨 시험이요?”
무학은 천천히 대답했다.
“그 말씀을 받아들일 그릇이 준비되어 있다면 조선은 천년을 누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외면하고 두려워하고, 백성을 다스릴 자들이 자신을 하늘처럼 여기게 된다면… 두세 백 년도 안 되어 큰 흔들림이 올 것입니다.”
잠시 사이를 누었다가 무학이 말을 이었다.
“그때가 되면, 그 말씀이 다시 살아 가장 낮은 자의 입을 빌려 퍼지게 될 것입니다. 그 말씀은 칼도 아니고, 깃발도 아니고, 다만 마음을 움직이는 불씨 같아서 불붙으면 꺼지지 않을 것입니다. ”
이성계는 그 말을 새기듯 듣고는, 조용히 물었다.
“대사, 그 불씨가 부처님의 불과 다르지 않습니까?”
무학은 빙그레 웃었다.
“다르지 않지요. 돼지 눈엔 돼지만 보이고, 부처 눈엔 부처만 보이는 법이니까요.”
어둠은 깊고, 마른 솔향이 밤기운에 섞여 스며들었다.
이성계가 중얼거리듯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내가 물길을 잘 튼 것인지 아닌 것인지 모르겠으니 그때의 일을 거정하게 된다오.”
무학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라를 세우는 일이 어찌 옳고 그름만으로 재단되겠습니까. 그저 물이 흘러야 할 자리에 물길을 튼 것일 뿐이지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 나라가 어찌될지 나는 모르오. 내 손에 들려진 칼은 더는 무겁기만 하고, 나의 이름은 역사가 알아서 할 일이오. 허나, 나를 만든 이는 결국 스님이었소. 염치 없는 부탁 이지만 왕사께서 기도를 계속 올려 주시오.”
무학은 손을 모아 합장하고,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먼곳에서 산새 소리가 들렸다. 두견새였다. 태조가 먼저 일어섰다. 무학도 함께 일어섰다.
한발 디디려 하는 태조의 발걸음이 약간 휘청 했다. 무학이 냉큼 손을 뻗어 태조의 어깨를 받쳤고 태조가 무학의 어깨를 받쳤다. 자연 어깨 동무한 형국이 됏다. 70 노장들의 어깨동무라…
오랜 세월, 함께 산을 넘고 계곡을 건너던 기억이 스치듯 지나갔다.
“세상은 불덩이 속과 같습니다. 그 불이 꺼질 때, 연기 속에서도 진실은 남습니다.”
그 말에 태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밤 이후, 두 사람은 다시 만나지 않았다.
그로부터 일 년 뒤, 무학은 입적했고 삼 년 뒤, 태조는 생을 마감했다.
“현담 스님, 깨달음이란 무엇입니까? 석가모니가 이미 깨달아 법을 세웠는데 왜 스님들은 또 깨달아야 한다고 그렇게 벽면 수행을 하는 겁니까? ”
현담의 긴 이야기가 끝났을 때 직암이 물었다. 전형적인 우문이었지만 직암에게는 현담같은 현승의 답을 듣고 싶은 오랜 의문사항 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