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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實錄)소설>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102)

 안동일 작

 “방낙아,  보록 처럼 나서 교회에 헌신 하거라”

 <타산지석 려말선초의 불교>

  “아다시피 고려말 불교가 제 역할을 못하고 권문세족들과 결탁해 있었다면 이들의 대척점에 서 있었던 세력이 신진 사대부라 불리는 젊은 유학자들 이었습니다. 그들이라고 해서 온통 백성들 편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상대적으로 나라의 안위와 백성들의 삶을 생각 하는 경향이 높은 개혁파라고 할 수 있었지요” 

 그러면서 이야기가 유학으로 번져 나갔고 유학의 한계, 엄밀히 말하면 작금 조선의 주자학, 성리학의 문제가 다시금 거론됐다. 현담과는 처음이었기에 다시금 이라는 표현은 동섬과 직암에게 해당된다. 

 현담과 동섬은 그때 자신들이 조선 땅의 불교 역사를 함께 살펴보고 있는 것은 종교가 일반 백성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갖는지 또 바람직한 형태가 어떤 것인지 따져 보는데 있다는 것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유교도 종교라고 했을 때, 유교의 변천과 작금의 영향력을 알아보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었다.

“지난달에 영주 부석사에 일이 있어 갔다가 소수서원 앞을 지났는데 그곳은 별천지 더군요.  쇠락한 절과 너무도 대비 되어  눈물을 쏟아야 했습니다. 안 에도 보고 싶었지만 승복을 입고 언감생심 엄두도 못냈지요.” 

그럴법 했다. 소수서원은 이 땅에 유학을 들여 왔다는 안향선생이 배향돼 있는 서원이었다.  

 고려말의 신진 사대부들이 바로 안향의 후예들이었다. 안향(安珦, 1243~1306)은 고려 중기의 문신이자 성리학의 도입자로 알려진 인물이다.  “유학을 안향이 이 땅에 처음 들여왔다”는 말은 사실과 다르다. 정통 유학은 이미 고구려, 백제, 신라 시기부터 한반도에 전해져 있었고 나름 발전을 거듭했다.  고구려는 태학에서 사서오경을 가르쳤고 신라는 설총, 최치원과 같은 당나라에서도 알아주는 유학자를 배출했고 백제는 아직기 왕인 등을 통해 일본에 유학을 전하기도 했다.  불교 국가인 고려도 초기 부터 국자감을 통해 경학(經學)이 교육되었다. 특히, 고려는  과거 제도를 통해 유학을 관료 등용의 기준으로 삼았다. 문벌귀족 사회에서 유학은 이미 주요한 학문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안향은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주자의 저서 주자전서(朱子全書) 등을 가져와 고려에 전파했다. 이를 통해 고려의 유학이 기존의 경학 중심에서 성리학 중심으로 전환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성리학은 고려 말 신진사대부를 거쳐 조선 건국의 이념적 기반이 되었다. 

 용문사를 찾을 무렵의 동섬과 직암으로서는 아직까지 유자, 선비를 자처하기는 했지만 성리학의 사변적 고답성에 너무도 아쉬움을 느끼고 있었고 특히 위계질서 신분차별을 공고화 하는 독선과 아집에 진작부터 치를 떨고 있는 터였다. 

 공자(孔子)와 맹자(孟子)로 대표되는 초기 정통 유학은 ‘인의예지(仁義禮智)’를 핵심 가치로 삼았고, 인간의 도덕적 수양과 사회적 조화를 중시했다. 그리고 개인의 도덕적 성장과 사회적 실천을 강조했다. 

 이레 반해 주자는 공 맹의 사상을 계승했다지만 철학적 깊이를 더해 사변적 우주론적 체계를 세웠다. 실천보다는 궁리를 중시했다. 

 인간 수양에 있어 정통 유학은  스스로를  수양한 연후 남을 다스린다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윤리를 내세웠다면 성리학은 구체적 경세 보다는 ‘격물치지(格物致知)’를 강조하면서, 철저한 학문적 탐구를 통해 ‘이(理)’를 깨닫고 도덕적 완성을 이룰 것을 주장했다.  ‘수양론’에서도 ‘거경(居敬)’과 ‘궁리(窮理)’를 강조하며, 도덕적 자각과 이론적 탐구를 우선해야 한다고 했던 것이다.  

현실 정치관에 있어서도 정통 유학은 왕도(王道) 정치, 덕치(德治)를 강조했지만 주자학은 명분론(名分論)과 존왕양이(尊王攘夷)를 더 내세웠다. 우주론에 있어서 성리학은 이기론, 태극설 등 철학적 체계가 강화됐는데 이는 누가 뭐래도 저들이 그토록 폄하하는 도가의 영향을 받은 것 이었다.  

  고려말에 이런 성리학을 신봉하는 신진사대부의 중심인물이 정몽주와 정도전(鄭道傳, 1342~1398)등 이다. 이들이 동북방에 근거를 두었던 용장 이성계와 손을 잡았고 그를 옹립해 건국한 나라가 조선이다. 당시 고려는 어떻게 손을 써볼 도리가 없을 정도로 패망의 기운이 역력했다. 

“고려말의 혼란 부패상이 불교의 책임만은 아니겠지만 이럴 때 민초들의 종교인 불교가 힘을 발휘 했어야 했는데 당시 불교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아는대로 결국 조선 건국 후(1392), 성리학을 국교로 채택하면서 억불정책(抑佛政策)이 시행되었고, 불교는 크게 위축되었다.  그렇다고 유교가 민생을 윤택하게 했다고는 할수 없었다.

 “불씨잡변 이라고 들어 보셨죠?”

 “예 잘 압니다. 우리 유자들의 필독서지요.”

 불씨잡변은 조선 건국의 주역 이라는 삼봉 정도전이 조선을 개국하며 조선이 유교를 국가 이념으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면서 불교 폐단을 바로잡기 위한 사상적 논거를 마련하고자 집필 했다는 저술이다. 

“불교를 비판하기 위해 쓰여진 그 책이 오히려 불교의 논리와 교리를 널리 알렸다는 사실에 대해 어떻게 생각 하십니가?” 

“그런점이 다분하지요, 저희들도 그랬습니다.”

 불씨잡변은 명도 선생이리는 유자와  부처를 풍자한  ‘불씨’와 대화 혹은 비교를 통해 불교교리를 조목조목 반박하는 형식으로 쓰여져 있다.  그러려니 연기론(緣起論)과  공(空) 사상, 사대(四大, 受 想 行 識) 육근 (六根) 오온(五蘊) 팔정도 (八正道)등 불교 주요 교리와 용어를  간략히 설명할 수 밖에 없었는데 그설명이 꽤나 일목요연했던 것이다.  직암도 그랬고 동섬도 실은 본격 불교 지식을 그 책에서 처음 접했다. 

 “불교가 세상을 ‘공’이라 하여 허무주의적 태도를 조장하며, 인간 사회의 윤리를 해친다고 주장하면서 공의 개념이 설명되지 않습니까?   윤회설(輪廻說)은 비합리적이며, 실제로 증명할 수 없는 허구라고 본다면서 오히려 연기론을 설명하고 있지요. 연기론이 만물의 존재를 ‘인연’에 의해 설명하는데  이는 인과율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고 지적하고 있지만 많은 이들은 증명할 수 없다는 비판 보다는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다는 연기론에 눈길을 보냅니다.  출가(出家)를 비판 하면서  불교가 가정과 사회를 떠나 출가하여 수행하는 것을 강조하는데, 이는 가정을 해체시키고 국가 질서를 해친다고 비판 했지만 승가 제도와 역사가 설명되고 있습니다. 허허허 ”

그랬다.  동섬과 직암 같은 실학 유자들은 대뜸 행간을 먼저 읽었던 것이다. 

 불씨잡변의 한 대목이다.  

 “불씨의 경우는 그 말이 고상하고 미묘하여 성명(性命)⋅도덕(道德)의 논의를 오감으로써 사람을 현혹함이 양주(楊朱)와 묵자(墨子)보다 더 심하였다. 주자(朱子)가 ‘불씨의 말이 더욱 이치에 가깝지만 참된 것(眞)을 크게 어지럽힌다’ 라고 한 말은 이를 가리킨 것이다.”

 불교가  고상하고 수승하다는 말을 주자까지 동원해 인정하고 있다. 

 “저 불씨는 사람이 사악한지 정의로운지 올바른지 그른지는 가리지 않고 말하기를, “우리 부처에게 오는 자는 화를 면하고 복을 얻을 수 있다”라고 한다. 이것은 비록 열 가지의 큰 죄악을 지은 사람일지라도 부처에게 귀의하면 화를 면하게 되고, 아무리 도가 높은 선비일지라도 부처에게 귀의하지 않으면 화를 면할 수 없다는 말이다.”

 천주학의 천당론과 이신칭의론을 처음 접하고  느끼는 의문을 그대로 전하고 있다.    

“부처 섬기기에 매우 독실했던 양 무제(梁武帝)나 당 헌종(唐憲宗)과 같은 이도 모두 화를 면하지 못하였으니, 한퇴지(韓退之)가 “부처 섬기기를 더욱 근실하게 할수록 연대(年代)는 더욱 단축되었다”고 한 말이 또한 매우 깊이 있고 분명하지 않은가?”

 ‘세종임금은, 또 우리 조상님들은 천당에 안 계시고 갈 수 없다는 말인가’ 와 매우 흡사했다. 

 “아무튼  불씨잡변은 조선 초기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의 사상적 토대가 되었지요. 조선 왕조는 이 정도전의 사상을 바탕으로 불교를 억압하고, 성리학을 국교로 삼았지요. 그 결과 아는대로 초기부터 불교 사찰은 대거 철폐되었고, 불교는 장기간 쇠퇴의 길을 걸어야 했습니다.”

“다시 강조 하지만 그렇다고 성리학이 이 나라와 이땅의 중생을 구하는 학문과 종교가 될 수 있었습니까?”

 현담의 비판은 직암과 동섬도 익히 공감하고 있는 바였다. 

 조선 성리학의 사변적이며 공리공담적인 측면은 날이 갈수록  깊어져 우주론이자 실상론이라는 이기론이 더욱 심화되어 퇴계 이황(이기호발설)과 율곡 이이(이기겸발설)의 격렬한 논쟁으로 이어졌고 이는 결과적으로 붕당, 사색당파로 까지 이어졌다. 이후 주자학은 더욱 경직돼 사상적 다양성을 완고하게 배제했다. 

  성리학적 명분론에 입각한 사문난적(斯文亂賊)이 횡행하게 됐고 거기에 기필코 허례허식을 조장하는 예송론까지 더해져 어떻게 손 써볼 수 없는 형국이 됐다는 것이 동섬과 직암의 결론 이었다.  직암의 스승인 성호 이익 같은 실학자들이 이런 경직성과 고답성을  비판하면서 다시 원래의 실천적 유학(정통 유학)의 가치가 강조돼야 한다는 흐름을 선도하게 된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고 또 다행한 일이었다. 

 다시 불교로 이야기가 돌아 왔다. 

“유교와 불교는 양립할 수 없는 적대의 관계가 아니었음에도 또 유학이 무오류의 전능한 도구가 아니었음에도  조선조는 그렇게 불교를 배척하고 탄압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교는 끈질긴 생명력을 보이면서 그 명맥을 유지 했습니다. 부처님의 법력이 아니고서는 설명한 길이 없지요.”

“스님도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부처님의 법력이라…” 

“그럼요, 저희같은 승려들이 이나마 먹고 사는 것도, 처사남들 계신 이 절에 저런 단청과 범종이 남아있는 것도 다 부처님 공덕과 법력 아니면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

직암과 동섬은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끄덕 였다.

“고려말에서 시작해 조선 으로 이어지는 시기의 불교의 부침과 애환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바로 이웃 고을 양주의 회암사 입니다. 회암사지에 가보셨지요?”

“가보았지요 큰 절터가 남아 있지 않습니까? “

 양근 바로 옆고을인 양주의 회암사는 고려 충숙왕 때에  인도출신 고승 지공선사가 창건한 것으로 알려진 큰 절이다. 나옹선사 무학대사 등  유명한 승려들이 수도한 곳으로도 유명한 이 절은 고려말 에서 조선초에 걸쳐 전국에서 가장 큰 규모, 요사채 3백칸을 자랑하며 크게 번성했던 곳이라고 했다. 

 동섬과 직암도 자주 그 앞을 지났는데 그곳은 언제 어떻게 폐사되었는지 알 수 없이 예전의 화려했던 모습을 잃고 황량하고 쓸쓸한 절터에  덩그라니 요사채 하나와 부도 3개만 남아 있었다. (계속)

 

<위 사진 양주 회암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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