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일 작
“방낙아, 바오로 처럼 나서 교회에 헌신 하거라”
<원효와 설총 그리고 판토하의 칠극 >
“그토록 융성했던 신라의 불교가 그토록 무력하게 무너져 버린 까닭은 무엇이라고 생각 하십니까?”
직암이 물었다.
“모두 다 인간의 욕심 탐욕과 어리석음 때문이지요. 불교 내적으로 보면 승가들의 일탈이 가장 큰 문제 였다고 생각 됩니다.”
현담이 즉각 답했다.
“ 탐욕과 어리석음이라 그렇겠죠, 어디서나 언제나 그것이 가장 큰 문제이지요. 특히 스님들과 같은 지도급 인사들의 그것은 폐해가 클 수 밨에 없지요.”
동섬도 거들었다.
“우리 불가에서는 탐욕을 탐 진 치 셋으로 나누어 삼독이라 부릅니다. 욕심, 고집과 성냄 그리고 어리석음을 말하지요. 끊어야 한다 하면서도 끊기 어려운 숙명같은 어려움이지요, 인간사 일이 잘못될때는 모두다 이 삼독이 사람의 마음속에서 꿈틀대며 일어나 정심을 갉아 먹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맞는 말이었다.
“그렇지요, 우리 중생들이 미혹에 빠져 있는 것은 모두 탐진치로 대표되는 욕심과 어리석음과 때문이지요. 천주학에서는 3독을 7종죄라 해서 일곱가지로 더 세분하고 있습니다.”교만 ;
“칠극을 말씀 하시는 군요”
현담은 칠극을 읽은 모양이었다. 볼수록 놀라운 승려였다. 칠극의 방적하는 칠죄종(七罪宗)을 교만, 질투, 탐욕, 분노, 식탐, 음란, 나태로 들고 있었다.
“저는 선비님들의 천주학 에서 말하는 원죄가 바로 불가의 삼독을 말하는 것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의 마음속에 애초부터 자리잡아 있는 탐진치가 바로 원죄가 아니겠습니까?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에 죄를 지었다는 사연을 하나의 상징으로 여기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잠시 후 실펴 보겠지만 고려조도 마찬가지 입니다. 고려조는 어찌보면 신라보다 더 불교의 기반이 탄탄했는데 그만 승려들이 그 탐욕의 굴레에 쌓여 잘못된 길을 걸은 까닭에 오늘의 이 모양을 보이고 있습니다. ”
내 탓이요 하고 자신을 탓하는 속죄는 천주학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수행하는 승가에게 가장 큰 장애는 애욕과 수마의 굴레라고 얘기돼 왔습니다.”
“수마라면?”
애욕은 알아 들을 수 있었지만 수마는 언뜻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의외로 쉬운 말이었다.
“잠, 졸음을 말합니다.공부 하는데, 특히 참선을 방해하는 가장 큰 마장이라고 얘기되지요. 하지만 조심스럽고 남 부끄러워 수좌들 대부분 말은 않하고 있지만 육신의 애욕, 이성을 탐하는 그 욕망인 애욕이 아주 큰 장애 입니다. 승가들의 일탈 중 가장 큰 일틸이 이 애욕에서 나옵니다.”
듣고 보니 그랬다. 이성에 대한 애욕을 탐하려니 돈과 권력이 필요 했고 급기야는 자식을 낳게 되고 자식에게 향하는 관심과 물적 토양 획보는 더 큰 탐욕과 부정을 낳게 마련이었다. 실은 라마 공인 이후의 천주교 사제단에서도 이런 일이 횡횅 했었다. 그래서 공회는 사제 탁덕들의 독신제를 명문화 공고화 했던 것이다.
“불교의 승가, 스님들은 부처님 시절 부터 독신이 원칙 이었지요?”
” 그렇습니다. 불교에서 출가 수행자 비구, 비구니 는 기본적으로 독신이 원칙입니다. 이 원칙은 부처님 시대부터 이어진 전통으로, 출가자는 결혼과 가정을 이루는 것을 금지하고, 오직 수행과 가르침에 전념해야 합니다. 부처님(고타마 싯다르타)은 출가 수행자의 생활을 세속과 완전히 단절하는 형태로 정리했습니다.”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에도 불교가 혼탁해지는 시기 승가의 은처 문제는 심각하게 대두 되곤 했지요. 특히 신라 말기와 고려 말기에 이 문제가 크게 불거졌습니다.”
“대처라고 하던가요, 스님들도 부인을 얻을 수 있다는 그런제도를 용인하는 됴파보 있다 하던데…또 우리 조선역사 에도 뛰어난 대처승이 있을 텐데…”
“아닙니다. 승가는 독신이 원칙입니다. ”
현담은 단호했다.
.” 신라조의 고승 원효스님 혼인 이야기는 무엇입니까? 설총이 스님과 어느 공주의 아들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 역시 그말씀이 나오는 군요. 원효스님는 일반적인 승려들과는 달리, 파격적인 수행 방법을 택한 인물이었습니다. 기존의 계율과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불교 사상을 대중적으로 전파하는 데 초점을 맞춘 혁신적 승려였기 때문에, 결혼을 했을 가능성이 없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달리 생각하고 있습니다. ”
“삼국유사와 삼국사기 에서는 공히 요석공주가 진평왕 또는 무열왕의 딸이라고 전하지만, 신라 왕족 계보에서 ‘요석공주’라는 인물은 명확하게 등장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요석공주는 실존 인물이 아닐 수도 있으며, 설화적인 인물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원효와 요석공주 이야기가 후대에 만들어진 전설일 수 있다고 보는 것이지요..”
” 또 설총은 유학자로서, 신라에서 유교를 본격적으로 발전시킨 인물입니다. 불교 승려인 원효가 아들을 낳아 유학자로 키웠다는 점이 다소 어색하게 보이기도 하지요.”
. “하지만, 원효의 불교 사상에는 대중적인 실천적 가치가 강조되었으므로, 만약 원효가 이두라는 문자를 만든 설총의 아버지라면, 전설을 만든 이들은 불교와 함께 유교를 통해 서도 신라 사회에 현실적이며 실천적 가치를 강조 하려 했을 수도 있지 않았나 생각 하고 있지요.”
그얘기는 그쯤에서 접어졌고 남은 불교사가 이어졌다.
신라는 혜공왕(765~780년) 이후 왕권이 급격히 약화되었고, 진골 귀족들의 왕위 쟁탈전이 극심해졌다. 780년에는 혜공왕이 반란으로 살해되었고, 이후 약 150년 동안 극심한 정치적 혼란이 지속되었다. 중앙 정부가 약화되면서 지방 호족들이 성장하면서 중앙의 통제력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지방에서 성주(城主), 장군 등 군사력을 가진 세력이 독립적으로 운영되면서 중앙 정부의 영향력이 축소되었다.
특히, 견훤(후백제)과 궁예(후고구려, 태봉) 같은 호족들이 독립적인 세력을 형성하면서 신라는 사실상 지방 분열 상태에 놓였다. 결국 927년 후백제 견훤이 경주를 공격하여 경애왕을 살해하면서 사실상 신라는 멸망의 길로 접어들었다. 935년 마지막 왕 경순왕이 고려 태조 왕건에게 항복하면서 신라는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시기 신라 패망기로 갈수록 불교계가 권력과 결탁하며 타락하는 모습이 두드러졌다. 특히 왕실과 귀족들의 권위가 떨어지자 사찰들은 독자적으로 사치를 일삼으며 백성들을 수탈하는 일이 많아졌다.
큰 사찰들은 농토(전답)와 노비를 대량 보유하여 일종의 봉건 영지처럼 운영되었다. 사원들은 조세를 면제받으면서도 스스로 농민을 부려먹었고, 지방 호족들과 결탁해 세력을 확장했다. 거기에 승려들의 은처 문제와 황음은 풀섶에 불을 지피는 일이었다.
기존의 교종(화엄종, 법상종 등)불교가 권력 중심으로 변질되면서 선종(禪宗)이 본격적으로 성장했다. 가 왕실과 귀족 중심이었다면, 선종(禪宗) 은 기존의 화려한 사찰 중심의 불교가 아닌, 개인 수행과 직관적인 깨달음을 강조하는 형태였다.
혼란·혼탁·타락의 시대가 된 통일신라 말기 중국에 유학을 다녀온 유학승들이 선종(禪宗)을 들여오고, 그들은 신라 사회를 병들게 한 신분제도를 날카롭게 비판했다. 선종은 귀족과 결탁한 ‘기득권 불교’을 비판하며, 중생 모두가 깨달을 수 있는 존재이고 불성(佛性)을 지닌 존재임을 천명했다. 이런 흐름의 중심에 이엄의 수미산문 등 구산선문이 있었다.
선종은 귀족보다는 지방 호족과 연결되었고, 이 때문에 후삼국 시대의 새로운 불교 세력으로 자리 잡았다. 이 시기 대표적인 선승(禪僧)으로는 이엄을 위시해 도선(道詵, 827~898년) 이 있는데, 그는 풍수지리설과 선종을 결합 해 후삼국 시대 여러 호족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후백제(견훤)와 후고구려(궁예)는 불교를 각각 다르게 활용했다. 궁예는 불교를 신정 정치(神政政治)와 결합하여 “미륵불”을 자처하며 종교적 왕권을 주장했다. 견훤은 불교보다는 유교적 정치 이념을 강조하며 왕권을 다졌다. 왕건이 본래 섬겼던 궁예(弓裔)는 “내가 미륵불의 화신이다”라고 선언하며 불교를 정치적 도구로 사용했지만, 지나치게 독선, 독재적이었고, 이를 견디지 못한 신하들이 반란을 일으켜 왕건을 옹립했다.
현담과 함께하는 불교사는 고려조로 넘어 갔다.
“고려를 창건한 왕건과 불교는 단순한 후원 관계를 넘어, 그의 왕권 정당성과 고려 건국 이념의 핵심이었다. 왕건은 불교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후삼국 통일을 이루었으며, 스스로 불교적 이상군주로 자리매김하려 했습니다.”
왕건(王建, 877~943)이 태어났을 때, 그의 집 근처 연못에서 용이 나타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단다. 이 설화는 불교적 요소가 강하게 반영된 것으로, 불교에서는 용(龍)이 불법(佛法)을 수호하는 존재로 여겨진다.
왕건이 아들 혜종(惠宗)에게 남긴 유훈인 “훈요십조(訓要十條)”에는 불교를 나라의 근본으로 삼을 것을 강조하는 조항이 있다. 특히 제2조에서 다음과 같이 불교의 중요성을 명확히 했다.
“나는 불교의 힘으로 나라를 세웠으니, 후손들은 반드시 불교를 우대하라.”
이렇게 해서 불교는 고려의 정치, 문화, 사상, 예술 등 모든 분야에 깊숙이 자리 잡았다.
왕실은 불교를 통해 권위를 정당화하고, 국난이 닥칠 때마다 불교적 의례와 기도를 통해 이를 극복하고자 했다. 대표적인 예로, 거란의 침입 당시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을 조성하여 나라를 보호하고자 한 것이 있다. 몽골 침략 때도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제작하여 국난을 극복하려 했다.
초기에는 호족이었던 왕건이 경도 돼 있었던 선종(禪宗)이 득세 했지만 시일이 지나면서 과 교종(敎宗)을 아울러 포용하는 정책을 펼쳤다. 선종은 풍수지리 사상과 결합하여 지방에서 계속 큰 영향력을 행사했고 교종은 경전 연구와 교리를 중시하면서 국가 주도 불교 행사의 주역이 됐다.
보조국사 지눌(知訥, 1158~1210)이 선종과 교종을 통합하는 정혜쌍수(定慧雙修) 와 돈오점수(頓悟漸修) 사상을 제창하여 고려 불교의 흐름을 바꾸었다. 이는 조선조에도 이어진다.
충렬왕(忠烈王) 이후 원(元)나라의 간섭이 시작되면서 티베트 불교(라마교)의 영향이 들어왔다. 고려 왕실은 티베트 불교를 수용했고, 이때 일부 승려들은 권력을 등에 업고 정치에 과도히 개입했다. 그러면서 불교의 타락이 눈에 띄게 시작, 심화 됐고 승려들이 정치에 개입하면서 사찰이 경제적 특권을 남용하는 일이 많았다. 신라말기의 현상이 되풀이 됐던 것이다.
고려 말(14세기 후반) 성리학(性理學)이 들어오면서 불교의 폐단을 비판하는 유학자들이 등장했다.
공민왕(恭愍王)은 왕권 강화를 위해 신돈(辛旽)과 힘께 불교를 바탕에둔 개혁을 시도했지만, 이내 두사람의 관계가 틀어져 실패로 돌아가 불교의 쇠퇴를 막지 못했다. (계속)
<맨위 사진은 광주 천진암 성지 입구에 있는 빙천수 약수터, 한 여름에도 얼음 같은 찬물이 바위 속에서 나온다. 조금 더 올라가면 권일신, 이벽 성조들의 묘소가 나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