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일 작
“방낙아, 바오로 처럼 나서 교회에 헌신 하거라”
<타산지석 이차돈의 순교>
“그가 보인 결기는 정말 대단합니다. 스물두 살이라는 나이가 더 놀랍고…그런데 자비와 지혜를 강조한 불교에서 그런 결기가 나올수 있는 겁니까?”
현담이 이차돈에 대한 설명이 끝냈을 때 직암은 그가 숨도 고르기 전에 물었다.
“불교의 가르침은 자비와 해탈을 강조하지만, 동시에 불퇴전(不退轉)이라 해서 한 번 길을 정하면 물러서지 않는 굳건한 수행자의 자세도 중요시 합니다. 이차돈 성조야 말로 그런 불퇴전의 용맹정진을 실천한 불자 이십니다.” 이어지는 현담의 말이 직암 동섬 두 사람의 가슴을 흔들었다.
“그런데 그가 그렇게 강해질 수 있었던 계기라면, 단순한 신앙심 이상의 어떤 확신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단순한 교리의 믿음이 아니라, 당시 신라의 나라 안 상황속에서 불교가 가지는 의미, 즉 새로운 세계관과 가치관을 지키려는 결연한 의지가 있었던 것이라는 겁니다.”
불도를 최상으로 여기는 스님이 쉽게 할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단순한 불심, 신앙심 이상의 그 무엇이 있다는 말 아닌가. 직암과 동섬은 동시에 서로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이차돈 성조가 선택한 길, 그것을 통해 더 큰 가치를 이루려 했던 것은 무엇일까요?”
직암이 짐짓 성조라는 단어를 함께 사용하며 물었다. 김씨 왕권의 강화 보다는 사회개혁, 하화중생의 길 이었다는 답을 기대하고 던진 질문이었다.
역시 기대 이상의 답변이 이어졌다.
“아마도 이차돈 성조는 당시 신라 사회의 문제점, 특히 완고한 골품제 속에서의 호족 귀족들의 전횡, 거기서 파생한 백성, 중생들의 고초와 아픔을 해결 할 수 있는 불교의 평등과 개혁의 요소를 체득하고 있었을 겝니다. 그가 법흥왕과 어떤 논의를 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알려진 대로 왕권 강화를 위한 계책이라기 보다는 더 큰것을 염두한 불교 공인을 위한 도구로 스스로를 바쳤다는 점에서, 단순한 순교자가 아니라 사회 정혁적 인물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경이로운 눈으로 현담을 바라보던 동섬이 맞장구를 치고 나왔다.
“그렇습니다. 이차돈을 단순한 신앙인의 차원을 넘어서서 시대를 바꾸려 했던 정혁가, 사상가로 본다면, 그의 강인함이 조금은 이해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
정혁은 혁명의 완화된 표현이다. 동섬의 견해가 이어졌다.
“이차돈 성조의 결단은 단순한 불교 신앙의 문제를 넘어, 오랜 고심 끝에 나온 시대적 선택이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불교 자체가 본래 비폭력과 자비를 강조하는 종교라, 순교나 극단적인 결단을 강조하지 않는 다지만, 이차돈의 경우는 신앙을 넘어선 나라를 생각한 대승적 차원의 결단이었던 겁니다. ”
역사에도 조예가 있는 동섬은 당시 신라의 백성들은 대부분이 호족 권문세가들의 장원에 속해서 소작을 하는 농노와 다름없는 생활을 했던 것으로 나와 있다고 했다. 호족의 장원에 속해 있지 않으면 농사지을 땅도 집칸도 제대로 마련하지 못하는 형편이었다는 것이다.
그랬다. 그 시기 불교의 평등 자비사상은 단순한 개인 신앙을 넘어 이 나라 백성들을 이롭게 하여 결집시키고 새로운 질서를 제공할 수 있는 도구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기득권 귀족 세력들이 불교공인을 결사적으로 반대했기에. 이차돈은 이를 돌파하기 위해 자기 목숨을 내걸어 승부수를 던졌던 것이다.
동섬이 직암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런데 나한테 더 놀랍게 다가서는 것은 자신의 죽음이 사회 변혁의 기폭제가 될 것을 예측하고 이를 계획적으로 감수했다는 점이야. 어쩌면 이는 전통적인 불교적 가치관보다는 오히려 유교적 ‘대의’와 맞닿아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고 느껴지는데 그 무렵 유교도 전해져 있었을 테니…”
“안 그렀습니까? 스님” 동섬은 고개를 돌려 현담에게도 동의를 구했다.
“그렇습니다. 이차돈성조가 상황을 꿰뚫어 보면서 철저히 준비한 모습을 보면 그는 단순한 이상주의자가 아니라 전략가 이기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처형 당시 “하얀 피가 솟구쳤다”는 전설은 단순히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파급효과를 노린 계산된 연출이 아니었나 생각 됩니다. 그런 이적이 사실이냐 아니냐를 따지기 이전에 이런 연출 혹은 구전은 급속도로 전파돼 귀족들을 제압하면서 신라의 불교공인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지요.”
직암과 동섬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가운데 현담의 결론이 이어졌다. 두 사람은 이 절에 오기를, 현담을 찾기를 참 잘했다고 다시금 온몸으로 확신했다.
“결국, 이차돈성조가 그렇게 강하게 결단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의 죽음이 나라와 백성 생활을 변화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었을 겁니다. 자신의 죽음이 의미 있는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고 확신했을 때 뜻을 지닌 사람은 강해지는 법이 아닙니까?”
동섬이 혼자말처럼 한마디 보탰다.
“이점에서 보면, 이차돈의 모습은 불교보다 오히려 라마의 초기 천주교 순교자들과 더 닮아 있는 것 같아. 라마의 천주교 순교자들이 단순히 신앙을 위해 죽은 게 아니라, 기존의 사회 질서를 넘어 새로운 세계를 보고 있었기 때문에 죽음을 받아들였던 것처럼 말이야.”
직암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현담은 빙그레 웃었다.
이차돈에 대한 여운이 세사람의 가슴에 오롯이 남은 채로 신라 불교의 역사는 다시 이어졌다. 실은 이절을 찾을때 부터 타산지석 불교에 대해서 알아 보기로 했기 때문에 직암 동섬은 다음에 하자는 현담을 재촉 했다.
“ 이차돈의 순교가 있고서야 공인된 불교는 법흥왕의 대를 이은 진흥왕대에 일취 월장 크게 발전하게 됩니다. 신라 왕실은 왕이 곧 부처라는 입장에서 전륜성왕 사상으로 왕권을 강화하고 국가의 지도이념으로 삼았습니다. 호족들의 장원은 차례로 해체 됐지요. 이 시절에 완공된 황룡사는 당시 삼국을 통털어 최대의 사찰로 나라 불교의 중심지 였으며 이를 통해 신라는 백성을 결집시키고 국운융성을 도모 했습니다.”
“신라의 불교사상은 청소년 들에게도 전파돼 큰 영향을 주었는데 특히 세속5계를 내세운 화랑제도는 청소년 인재를 양성하여 국가의 역량을 키웠습니다.”
화랑제도야 말로 직암과 동섬을 사로잡는 청년들의 조직이었다.
화랑의 세속오계로 유명한 원광법사등 고승들은 불법 전파 외에 국가 운영에도 많은 역할을했다. 불교가 확산되자 스님들의 출가가 늘어나고 중국으로 유학 가서 많은 경서를 가지고 돌아왔다.
자장율사를 비롯한 많은 고승들의 역할과 김유신 김춘추 등 화랑 출신 인재들의 배출과 가세는 삼국 통일의 기반을 다졌고 끝내는 삼한 일통의 큰 일을 달성하게 된다.
통일 이후 신라 불교는 더욱 더 발전해 갔다. 중국에 유학 간 스님들은 화엄사상과 더불어 유식사상을 배워 왔다. 화엄사상은 우주의 모든 사물은 그 어느 하나도 홀로 있거나 홀로 일어나는 일이 없고 모두가 서로의 원인이 되며, 대립을 초월하여 하나로 융합하고 있다는 교리이며 유식사상 ( 唯 識 思 想 )은 마음 외에는 어느 것도 존재할 수 없으며, 마음에 의하여 모든 것이 창조된다는 교리다.
그런데 원효(元曉, 617~686)는 중국으로 가던 중 깨달음을 얻어 유학을 중단하고 신라에만 머물렀으나 화엄과 유식을 융합해 인간 현실의 문제에 천착, ‘화쟁(和諍)’이라는 개념으로 불교를 발전시켰다. 스님의 명성과 저술은 중국과 일본에 널리 알려져 신라불교의 위상을 드높였다. 그는 모순과 대립을 한 체계 속에 하나로 묶어 담는 기본구조를 가리켜 화쟁이라 했다. 화쟁이야 말로 궁극의 깨달음이라는 것이다. 천주학에서 유대 보록의 이신칭의가 있다면 조선 유학에는 퇴계 이황의 주리론이 있었고 조선 불교에는 원효의 화쟁이 있었다.
그무렵 의상(義湘, 625~702)대사는 당나라에 유학, 화엄을 공부하고 돌아와 화엄 9찰을 열어 화엄사상을 전파하며 신라 불교를 발전시켰다.
화엄과 유식 같은 불교의 사변적 교학은 한문과 경전에 의지하여 공부해야 하는 까닭에 왕실과 귀족층에 국한되어 유행했고, 일반 백성은 이를 이해 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이에 ‘나무아미타불’을 열심히 하면 죽어 극락정토에 태어날 수 있다는 정토신앙과 관세음보살을 열심히 부르면 액운을 멀리하고 소원을 성취할 수 있다는 관음신앙 등이 일반 서민 계층의 환영을 받았다.
달도 차면 기우는 법, 통일신라 후반기가 되면서 왕실과 귀족들이 불교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시작했다. 왕실은 불교 사찰을 지원하면서도, 동시에 불교 세력과 결탁해 권력을 유지하려 했다.
귀족들이 대규모 사찰을 세우며 사치와 향락을 누리는 한편, 승려들도 부패하고 세속적인 삶을 즐겼다. 사찰들은 국가의 지원을 받으며 점점 더 많은 토지를 소유하게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사원이 아니라 장원(莊園)을 운영하면서 조세를 면제받고 농민들을 부역에 동원했다. 민중들의 불만이 커졌다.
9세기 후반부터 신라 중앙정부, 왕실의 통제력이 약해지면서 지방 호족들이 성장했다. 호족들도 불교를 이용하긴 했지만, 기존의 국가 중심 불교보다는 새로운 종파(선종 등)에 관심을 보였다..
기존의 불교가 왕실과 귀족 중심이었다면 호족들은 좀 더 독립적이고 실용적인 불교를 원했던 것이다.
불교는 이미 왕실과 결탁해 있었고, 사회 개혁보다는 권력 유지에 집중하면서 백성들에게 신뢰를 잃었다. 선종(禪宗)이 등장하면서 불교 내부에서도 새로운 변화가 시도되었지만, 신라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계속)
위 사진. 합천 해인사에 있는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고려가 몽골의 침입을 불력(佛力)으로 막아내고자 1236년(고종 23년) 강화군에서 조판에 착수하여 15년이 지난 1251년(고종 38년)까지 총 16년에 걸쳐 완성한 고려의 대장경이다. 현존하는 세계의 대장경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일 뿐만 아니라 체재와 내용도 가장 완벽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는 팔만대장경은 2007년도에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현재 보존되어 있는 대장경판은 조선 시대에 다시 새긴 것(보유판)과 일제 강점기 때 다시 새긴 135판 을 합해 총 81,352판(板)이나 된다 경판의 개당 총 길이는 68 혹은 78센티미터이며 폭은 약 24센티미터, 두께는 2.7~3.5센티미터의 범위이다. 이 경판을 모두 쌓아올리면 그 높이가 무려 3000미터가 넘는다. 이는 백두산보다 더 높은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