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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實錄)소설>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99)

안동일 작

“방낙아, 바오로 처럼 나서 교회에 헌신 하거라”

<타산지석 이차돈의 순교>

“어느 왕조보다 불교가 융성했던 까닭에 신라불교는 별 어려움 없이 전래돠고 발전이 이루어 졌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신라의 불교수용은 수월하지 않았습니다. 이를 드러내는 그 대표적인 일이 이차돈 성조의 순교였습니다.”
“순교라는 말을 불가에서도 쓰는 군요.”

그냥 넘어갔지만 실은 성조라는 표현도 그랬다.   성조와 순교라.  일신은 자신이 2백여년 뒤 이 땅의 천주교인 들에게 성조로 추앙받게 될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하지만  이날  들은 이차돈 이야기는 그의 가슴 속에 각인 되었던 모양으로 힘든 일이 있을 때 마다 믿는 신앙은 달랐지만 왠지 그가 떠올랐고 자주 그의 일을 입에 올렸다.

“신라보다 불교를 먼저 받아들인 고구려와 백제에서는 순교자가 없는데 불교를 융성 시켜 그 기반으로 삼국을 통일한 구축한 신라가  불교를 받아들이는 과정이 힘들었고  또 그 과정에 희생 당한  순교자가 있다는 것이 의아하게 느껴지는 게 사실이지요,  거기에는  당시 동쪽으로 치우쳐 있어 중국과 교류가 제한돼있는 신라의 지역적인 상황도 상황이지만 정치적인 상황이 더 크게 작용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이차돈의 순교 이야기는 자연스레 당시 삼국의 상황이 거론되면서 이땅 전체의 불교 역사 강의로 이어졌다. . 직암도 동섬도 불교의 교리, 사성제, 필정도며 공(空)사상, 연기(緣起)사상에 대해서는 여기저기서 몇차례 들은 바 있었고 공사상의 정수라는 금강경을 스승인 성호선생의 지도아래 강독하기는 했지만 이땅의 불교 역사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소양이 없었다. 제대로 된 역사서도 없었고 큰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땅의 유자들이 대개 그랬다.

“불교가 이땅에 전해진 것은 고구려 백제 신라의 순 이었습니다. 유사와 사기등 역사서의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는소수림왕 때 중국 전진에서 온 순도 스님에 의해서 불교가 전해졌고 백제는 10여년 뒤인 침류왕 즉위 초기 인도의 승려 마라난타가 동진에서 백제로 들어옴으로써 전래 되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랬다. 고구려의 소수림왕은 372년 불교를 수용해 율령(律令)을 반포하고 태학(太學)을 설립했다. 그후. 391년에는 국민들에게 불교를 믿어 복을 구하라는 왕의 교시가 내려진다. 백제도 384년 동진(東晋)의 마라난타(摩羅難陀)에 의해    불교가 도래한 직후 부터래 왕실이 적극 나서 불교를 후원했다.마라난타(摩羅難陀)가 동진(東晋)

“고구려 백제에서 불교가 즉각 공인 된 기저에는 저간의 사정이 있었지요. 그 무렵 삼국은 공히 고대 국가의 형태를 갖추어 나가던 시기로 할거해 있는 지방 호족들로 부터  권력을 중앙으로 집중시키는 통치력과 국민을 하나로 묶는 정신적 요인이 필요했습니다. ”

부족국가 때는 하늘로부터 선택받았다는 선민사상과 무속신앙 정도면 충분하였다. 그러나 고대국가 체제가 되고 새롭게 들어선 지도자는 앞에서 사용하던 사상과 신앙을 그대로 선택할 수 없었다. 차별성이 없으면 대중의 지지와 복종을 이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권력자들에게 에게 불교의 업설과 전륜성왕 사상은 매우 끌리는 사상이었을 겝니다. 업설은 선악의 행동에 의해 과보를 받는다는 교리이다. 이런 내용으로 새롭게 등장한 지도자로 하여금 자신이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전생부터 선한 일을 많이 한 결과라고 주장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죠”

전륜성왕은 정법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불교의 이상적인 왕이다. 전륜성왕이 되기 위해서는 전생에 선한 행동을 많이 해서 번뇌가 모두 사라진 보살의 경지에 이르러야 한단다. 이는 왕이  부처가 점지한 훌륭한 인물이라는 사실을 백성들에게 보여주는 근거로 활용될 수 있었다.  고구려와 백제 역시 왕이 나서 불교를 적극적으로 수용한 것도 그런 이유였다.

이차돈의 순교는 신라의  정치 지형과 깊은 관계가 있는 일이었다.  신라는 17대 내물왕 이후에야 고대국가 체제를 갖추었다.  신라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그 이후인 19대 눌지왕(417~458) 때로 본다.  일설에는 그 이전에 아도 화상이 고구려에서 건너와 일선의 모례내에서 전법했다고 얘기 되지만 그 시기는 확인 되지 않는다. 그렇다 해도 아무튼   고구려 백제보다 훨씬  늦었다.  눌지 다음인  20대 자비왕,  21대 소지왕 시절  중국과 고구려의 여러 승려들이 신라에 와서 포교하면서 신봉자가 다수 생겼다고 여겨진다.

그런데 권력에 밀려난 귀족 세력은 무속보다 뛰어난 내세관을 갖춘  왕을 절대시 신성시 하는 불교가 달갑지 않았다. 따라서 자신들의 힘이 상실되게 되는 불교 수용을 강력하게 반대했다. 그 결과 신라의 불교 수용은 고구려와 백제보다 늦었고 더큰  갈등이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

신라는 김 씨에 앞서 박 씨와 석 씨가 돌아가면서 왕위를 계승했다. 그런데 17대 내물왕부터 김 씨 세습제가 되면서 박 씨와 석 씨는 권문새가로 지위가 내여가여 했다. 그들은  전통 무속을 따르는 기득권 귀족 세력의 중심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즉위한 23대 법흥왕은 자신의 신앙도 신앙이었지만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불교 수용을 꾀했으나 권신들의 반대가 치열했다.  이때 등장하는 인물이 이차돈이다.

이차돈은 법흥왕의 5촌 조카이다. 이차돈의 할아버지 아진종은 습보 갈문왕의 아들이다. 갈문왕은 자신은 왕이 아니지만 자식이 왕일 경우 붙여주는 칭호다. 조선의 대원군이다. 법흥왕의 아버지가 지증왕이고 지증왕의 아버지가 습보갈문왕이다. 그렇다면 법흥왕과 이차돈의 아버지는 사촌이다. 이차돈의 아버지 일찍 세상을 떠나 이차돈은 왕실의 도움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런 연유로 자신을 희생해서 김 씨 왕조의 굳건한 토대를 만들 수 있다면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
물론 불교를 자신의 신앙으로 불교를 전적으로 받아들였기에 기능한 생각이었다.

이 점이 직암에게는 가장 절절하게 다가섰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종교를 선택했고 그 선택을 위해 자신을 불사른다.  그의 나이 스물둘이라는 점에 큰 관심이 쏠렸다.

” 이차돈은 뛰어난 이를 뜻하는 이두식 별칭으로 그의 원래 이름은 염촉(厭髑)으로 전해집니다.  삼국유사에는 박 씨라고 나와  있으나 증조부와 법흥왕과의 항렬을 보면 김 씨가 맞습니다. ”

그의 순교 과정을 보면 절실함이 묻어난다.
이차돈이 나이 스물두 살로 중견 벼슬인 사인(舍人)에 올라 있었다.
“당숙인 왕이 고민에 빠져 있자. 이차돈은 대뜸 자신을 이용해 일을 처리하라고 계책을 권한다. 자신을 죽여 왕명의 지엄함을 권신들에게 알려 주리는 것이었습니다.”

현담의 설명에 이어 찾아 본 삼국유사와 후일 건립된 그의 순교비에  나오는 대목들이다.

“신이 들으니 옛 사람은 비천한 사람에게도 계책을 물었다고 하니 중죄를 피하지 않고 대왕의 뜻을 여쭙고자 합니다.”

“네가 할 바가 아니다.”

“나라를 위하여 몸을 희생하는 것은 신하의 큰 절개이며, 임금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은 백성의 바른 의리입니다. 사령을 그릇되게 전했다고 하여 신을 형벌하여 머리를 벤다면 만민이 모두 복종하여 감히 지시를 어기지 못할 것입니다.”

“살을 베어 저울에 달더라도 한 마리 새를 살리려고 했고, 피를 뿌리고 목숨을 끊어서라도 일곱 마리의 짐승을 불쌍히 여겼다. 나의 뜻은 사람을 이롭게 하려는 것인데, 어찌 죄 없는 사람을 죽이겠느냐? 네가 비록 공덕을 짓는다고 할지라도 죄를 피하는 것만 못할 것이다.”

“모든 것이 버리기 어렵지만 제 목숨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소신이 저녁에 죽어 아침에 대교가 행해진다면, 불일(佛日)이 다시 중천에 오르고 임금께서는 길이 편안하실 것입니다.”

“난새와 봉새의 새끼는 어려서도 하늘을 뚫을 듯한 마음이 있고, 기러기와 따오기의 새끼는 나면서부터 바다를 건널 기세를 품었다고 하더니 네가 이와 같구나. 가히 장부의 행이라고 할 만하다.”

이차돈은 왕명이라 둘러대고 절을 창건하기 시작했다. 그것도 권신들이 신봉하는 천신의 사당이 있는  천경림 에서 였다. 이를 본 신하들이 화가 나서 왕에게 달려가 고했다.  왕은 그런 명을 내린 적이 없으며, 절을 지으려 하는 것처럼 조작하여 항의하는 것은 왕실과 왕족 그리고 막 피어나는 불교를  어려움에 빠뜨리려는 계책이라고 꾸짖었다. 그러나 얼마후 사실을 확인한 왕은 이차돈에게 왕명을 거짓으로 꾸며 실행한 죄를 물어 목을 베라고 명령했다.

직암으로서는 이대목이 선뜻 이해 되지는 않았지만 절절하게 다가오는 그 무엇이 있었다. 사실 그때까지 불가에서는 그런 목숨을 건 희생은 없었다는 것이 현담당의 확인이기도 했다.

죽음을 앞둔 이차돈이 발원했다.

“대성법왕(大聖法王)께서 불교를 일으키려고 하므로 저는 신명을 돌보지 않고 인연을 모두 버리니 하늘에서는 상서를 내려 사람들에게 두루 보여주소서.”

그의 발원이 통했는지 참수 후의 상황 역시 신비로운 이적으로  가득하다. 상서가 내렸던 것이다.

일연의 유사는 그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옥리가 목을 베니 흰 젖이 한 길이나 솟아올랐다. 머리가 날아가서 금강산 꼭대기에 떨어졌다. 하늘은 사방이 침침해지고 땅이 진동하면서 꽃비가 내렸다. 왕의 슬퍼하여 흘린 눈물이 옷을 적셨다. 재상은 근심하여 땀이 모자 밖으로 흘렀다. 샘물이 갑자기 마르면서 고기와 자라가 다투어 뛰었고, 곧은 나무가 먼저 부러지니 원숭이가 떼를 지어 울었다. 춘궁(春宮)에서 말고삐를 나란히 했던 친구들은 피눈물을 흘리며 서로 돌아보고, 월정(月庭)에서 소매를 맞잡던 친구들은 창자가 끊어지듯 이별을 애석해 하였다. 상여를 바라보며 장송곡을 듣는 이들은 마치 부모를 잃은 듯하였다.’

그리고는  이렇게 덧 붙혔다.

“개자추가 다리 살을 벤 것도 이 고절(苦節)에 비할 수 없고, 홍연(弘演)이 배를 가른 일인들 어찌 이 장렬함에 견주랴. 이는 임금의 신앙력을 붙들어 아도(阿道)의 불심을 이룬 성자이다.”

사람들은 이차돈의 머리가 날아가 떨어진 곳에서 장사를 지냈다.  터를 잡아서 절을 짓고 이름을 자추사(刺楸寺)라고 하였다.  이곳에 예를 하면 반드시 대대로 영화를 얻고, 사람마다 도를 닦으면 불법을 깨달았다고 대대손손 전했다.

하지만 이차돈의 순교의 일은 삼국사기에는 나오지 않는다. 유교적 논리에 충실했던 김부식은 불교의 이적을 다루기 싫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때 뭔가 경이로운 일이 일어났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위 사진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는 이차돈 순교비. 당초 경주시 백률사터에 있었던 비를 박불관으로 옮겨 놓았다. 
 이 비의 건립연대는 명확하지 않지만신라 헌덕왕 9~10년(817~818년)으로 추정된다.
 순교비는 각각 별석으로 조성된 받침돌과 6면체 몸돌로 구성되어 있다. 몸돌 상단에 원기둥 형태의 촉이 돌출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 덮개돌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 527년에 이루어진 불교 공인을 기록한 현존 최고의 1차 사료라는 점, 특히 제1면의 조각을 통해 신라의 복식사 및 조각사 연구에도 유용한 자료로서 가치가 높다. 높이 106cm이며, 각 면의 너비 29㎝. 
제1면에는 이차돈의 순교장면을 부조하였고 제2∼6면에는 정간(井間)을 치고 각 정간에 자경 3㎝의 글자를 새겨 넣었다. 각 면의 명문은 마멸이 심하여 절반 정도만 판독된다.
그러나 명문의 대강은 삼국유사의 기록으로 미루어 알 수 있으며, 특히 명문 중의 “頸中白乳一丈(경중백유일장)”은 이들 기록과 합치되고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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