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일 작
“방낙아, 바오로 처럼 나서 교회에 헌신 하거라”
<타산지석 이차돈의 순교>
조직이라는 표현이 생경하기는 했지만 교회 공동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 졌다.
“천주학도 널리 퍼지게 하려면 인재들이 있어야 합니다. 초기 불교가 바로 그랬습니다.”
현담이 강한 어조로 말했다. 생각해 보니 지금이야 조선땅에서 쇠락해 있다지만 천축(인도)의 한 변방 작은 나라에서 시작된 불교가 어떻게 국제적으로 융성할 수 있었는지 궁금하기는 했다.
“그렇겠죠. 종교의 일이건 무슨 일이건 사람의 일 일테니까요. 대충 얻어 듣기는 했지만 천축에서의 초기 불교 의 모습 특히 전교 모습이 궁금하군요.”
“오늘 제가 두분을 찾은 것도 그런것 들을 일러 드려 참고가 됐으면 해서 였습니다.”
“스님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
이렇게 해서 현담의 불교사 강의가 펼쳐지게 됐다.
“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을 얻은 후 처음에는 이를 전할지 망설였으나, 범천(梵天, 브라흐마)의 간청을 받고 전법을 결심했지요. 이후 사르나트(녹야원, 鹿野苑)에서 오비구에게 최초의 설법(초전법륜, 初轉法輪)을 함으로써 불교의 전법이 시작되었습니다.”
“저희 불자들로사는 대단한 일로 여기고 있습니다. 부처님도 처음에는 사람들이 알아 들을것 같지 않아서 혼자만 음미하려 했답니다. 그런데 브라만 최고의 신이 나서 가르침을 펼쳐 달라고 했다는 겁니다.”
“부처님은 출가 후 고행할 때 함께 수행했던 다섯 비구를 찾아가 사성제(四聖諦)와 팔정도(八正道)를 설법함으로써 불교 공동체의 시작을 열었습니다.”
“사성제 팔정도라면 인생의 모습과 바른 생활의 길을 일러주는 타박할 수 없는 평이한 가르침인데 종교적인 신앙의 대상으로 삼기에는 부족한것이 아니었습니까?”
직암이 물었다.
“그게 불법의 묘미입니다. 초기 불법에서는 신비스런 일이나 이적이 나타 나지 않습니다. 후에 중국에서 대승불교가 발전 하면서 그런 전설과 신앙 요소가 생겨나게 됩니다. 이 뛰어난 가르침을 만든 부처가 인간 일리가 없다는 사상이 생겨나는 것이지요.”
조금 더 듣고 싶은 얘기였지만 일단은 넘어가기로 했다.
“아무튼 이 다섯 명은 곧 아라한(阿羅漢)이 되었고, 오 비구가 아라한이 된 후, 이들의 전볍으로 바라나시의 야사라는 젊은 브라만이 출가하면서 그의 친구 50명도 함께 출가했죠. 이렇게 제자가 늘어나면서 불교 승가, 승단의 기초가 형성되었습니다.”
최초의 아라한과 개종한 브라만이 승단의 기초가 됐다는 얘기다.
“브라만이라면 당시 힌두교 승려 계급을 의미 하는 것 아닌가요? ”
“개종을 했다는 얘기군요.”
“그렇습니다. 그때 부처님도 자신감을 얻으신 모양입니다. 제자들이 60명으로 늘어나자 부처님은 각기 다른 지역으로 전법을 떠나도록 권유했습니다. 이 권유, 전법의 선언이야말로 중요한 대목입니다.”
이때 붓다는 이렇게 선언했단다. ‘비구들이여, 두 사람이 같은 길을 가지 말고 각기 다른 방향으로 가서 법을 전하라.’ 야소의 전교선언과 흡사하다. 야소는 둘이 함께가라 했는데 석가는 혼자 가라고 한것이 다르기는 하지만. 이를 통해 불교는 인도 각지로 퍼지기 시작했다.
“ 부처님과 초기 제자들은 도시와 마을을 돌며 걸식하며 전법 했습니다. 부처의 전법이 수승하다는 것은 소수의 제자들에게만 가르침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대중들에게 전해졌다는데 있습니다. 계급을 초월한 보편적인 가르침, 제자들의 적극적인 전법, 공동체 중심의 운영이야 말로 초기 불교가 성공적으로 전파될 수 있었던 핵심 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군요”
직암과 동섬의 가슴에 울리는 그 무엇이 있었다.
현담의 설명과 찾아 읽은 불교 역사서에 따르면 불교가 인도사회에서 초기에 각광을 받은 이유는 브라만교와는 다른 평등을 설파하는 가르침에 있었다. 불교는 기존 브라만교의 복잡한 의례와 카스트 제도에 반발하여 등장했다. 붓다는 평등과 깨달음을 강조하며, 기존의 제의적이고 계급적인 종교 질서를 거부했다. 제자를 받는 데 신분을 따지지 않았으며, 모든 계급(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에게 문호를 열었던 것이다. 역시 평등사상은 모든 사람들에게 매혹적으로 다가서는 모양이다.
“인도에서의 초기 번성은 왕조의 후원도 한몫했습니다. 특히 아소카 왕(기원전 268~232년)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불교는 국가적 종교로 자리 잡았지요.”
아소카는 불교를 정치적으로 활용하며, 이합집산하던 인도의 왕조를 통일해 나갔다. 각지에 대한 불교 포교를 장려했다. 논리적이고 철학적인 체계를 갖추면서도 개인의 수행을 강조하는 실용적 가르침이 큰 매력 이었던 모양이다. 명상과 윤리적 실천을 강조하는 불교는 전쟁과 불안이 많던 시대에 큰 위안을 주었던 것이다.
” 종래의 뜬구름 잡는 듯한 천축 사상과는 다른 현살적 종교였던 불교는 또 상인들과도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번성했습다. 이에 따라 실크로드를 따라 불교가 확산될 수 잇엇습니다. 특히 혼자만의 깨달음 보다는 대중들의 교화를 중시했던 대승불교는 여러 지역에서 영향력을 키웠습니다.”
그랬던 인도에서 굽타 왕조(4~6세기) 시기 힌두교가 다시 부흥하면서 불교는 쇠퇴의 길로 들어선다. 비슈누와 시바를 중심으로 한 힌두 신앙이 다시 강력해졌고, 불교적 개념이 힌두교 내부로 대폭 흡수되었다.
초기의 수행 중심 불교가 점점 더 형식적이고, 사원 중심의 폐쇄적인 구조로 변했다. 일부 사원은 부유해졌고, 일반 민중과의 거리감이 커졌다.
12세기 이후, 이슬람 세력이 북인도를 침공하면서 불교 사원과 수도원이 대대적으로 파괴되면서 불교 학문과 전통이 급격히 쇠퇴했다.
“불교는 인도 내에서 영향력을 잃어가던 반면, 중국, 티베트, 동남아시아 등지로 확산되며 중심지가 외부로 이동했습니다. 중국이야 말로 불교가 꽃을 피운 중흥지였습니다. ”
불교사 강의는 자연스레 중국으로 무대가 넘어왔다.
“불교가 중국에서 번성하게 된 이유는 역사적, 문화적 측면의 여러 요인들이 작용했지만 역시 수많은 인재들이 나서 신앙 참구와 전교에 나선 것이 가장 큰 요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교는 중국에서 한(漢) 왕조 말기(23세기) 이후 계속된 혼란기, 특히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시기에 크게 퍼졌다.
유교는 기존 질서 유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으나, 국가가 혼란에 빠지자 기존 체제가 무너졌고, 불교는 새로운 신앙적 위안을 제공했다. 불교의 윤회사상과 업(業) 개념은 중국의 전통적 조상 숭배, 사후 세계에 대한 전래 신앙과 쉽게 융합될 수 있었다. 자비(慈悲)와 공덕(功德) 개념은 유교의 효(孝) 사상과 연결되었고, 조상의 공덕을 쌓는 방식으로 재해석되었다.
연기(緣起) 사상이 노장사상의 무위(無爲) 개념과 조화를 이루면서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널리 받아들여졌다.
무엇 보다 남북조 시대부터 불교는 황실과 귀족들로부터 강력한 후원을 받았다.
북위(北魏, 386~534년)의 효문제(孝文帝)는 적극적으로 불교를 장려하며 불교 사원과 석굴을 건립했다. 유명한 운강석굴(雲岡石窟)도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석굴의 석불은 당시 황제들의 모습을 본떠 제작 되고 있었다.
수(隋)·당(唐) 왕조에서도 불교는 국교 수준의 대우를 받았으며, 특히 경전을 들여와 번역하는 작업이 활발히 전개됐다. 인도 출신의 구마라습(鳩摩羅什), 현장(玄奘) 등이 번역한 경전들이 널리 읽히면서 불교 철학이 정착 정립 됐다. 중국인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유교, 도교 용어를 차용하여 설명함으로써 불교가 중국 사상과 융합될 수 있었기에 불교 철학은 다변화 하면서 여러 단계 도약했던 것이다.
” 인도 불교는 출가 수행 중심이었지만, 중국에서는 재가 신자도 실천할 수 있도록 변화했습니다. 특히 정토종(淨土宗)이 등장하면서 “아미타불을 염불하면 극락에 갈 수 있다”는 간단한 신앙 방식이 널리 퍼졌고 또 선종(禪宗)은 “마음속에서 깨달음을 찾는다”는 단순하면서도 강력한 가르침으로 중국인의 실용적 사고방식과 잘 맞아떨어졌습니다.”
그무렵 불교 사원은 단순한 종교 공간을 넘어 교육, 복지, 경제 활동의 중심지로 기능했단다. 많은 사원들이 농지와 노동력을 보유하면서 생산 활동을 하였고, 여행자와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구제 사업을 펼쳤다.
“중국 불교는 당나라 때 최전성기를 맞이했지만, 이후 송·원 시대부터는 불교가 유교(성리학)에 밀려 다소 쇠퇴했어도, 여전히 중국 문화와 사상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
“탄압이 없지는 않았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현담당은 중국의 불교 탄압을 어찌 생각하고 계시는지요?”
” 중국에서도 불교에 대한 배척이나 탄압은 당연히 있었지요. 종교가 새로운 문화권에 들어갈 때는 늘 갈등이 따르곤 하는데, 중국 불교 역시 마찬가지 였습니다. ”
현담은 볼수록 심지가 굳고 학식이 높은 학승이었다.
“유교와 도교를 숭상하는 학자들 사이에서는 불교가 당연히 ‘외래의 이단(異端)’으로 간주 되었겠지요. 유교 사상가들은 “불교는 효(孝)를 해친다”고 공격했고 불교의 윤회설과 수행법은 중국의 토착 신앙인 도교와 충돌했습니다. ”
“그런데 이같은 초기의 사상적 갈등과 충돌은 불교의 원융무애한 통섭의 사상 덕분에 의외로 큰 피해 없이 넘어 갈 수 있었는데 정작 피해는 한참 후에 왕권으로 부터 정치적 이유로 당해야 했던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
중국 역사에는 ‘삼무일종(三武一宗)의 법난(法難)’이라 불리는 큰 탄압 사건들이 있었단다. 이 세번의 대표적인 불교 탄압은 공교롭게도 무(武)자가 들어가는 황제들의 시기에 한 종파를 향해 일어 났기에 삼무일종이라 부른단다.
북위(北魏)의 태무제(太武帝) 법난 (446년) , 북주(北周)의 무제(武帝) 법난 (574년) , 당나라의 무종(武宗) 법난 (845년)이 그것이다.
북방 유목민족이 세운 북위와 북주에서는 초기에 원권의 비호아래 불교가 크게 번성했는데, 사원들이 너무 비대해져 국가 재정을 위협하게 되었고 귀족과 승려들의 결탁으로 국가 권력을 위협하게 되자 북위의 태무제, 북주의 무제는 불교 탄압을 시작했다. . 사원을 대규모로 폐쇄하고 재산을 몰수했으며, 승려를 처형하고 강제로 환속시키는 등 매우 가혹하게 탄압했다.
이후 당나라 무종(武宗) 법난은 역사상 가장 큰 탄압으로 꼽히는데 당시 중국 전역의 불교 사원 4만 6천여 곳이 폐쇄됐고, 승려·비구니 26만 명이 환속당했으며, 막대한 토지와 재산이 몰수당했다고 기록돼 있단다. 불교는 엄청난 타격을 입었고, 그 이후 불교는 다시는 이전만큼 강력한 영향력을 회복하지 못했다. 이후 송나라 시대부터 유교(성리학)가 강력한 지배적 사상이 되었다.
“이처럼 불교는 중국 역사상 여러 번의 극심한 탄압과 배척을 받았지만, 그럼에도 조사 선사들의 원융무애와 헌신으로 성공적으로 융화됐기 때문에, 사라지지 않고 계속 명맥을 유지하고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
동섬과 직암은 고개를 끄덕 였다.
“이에 비하면 우리 조선 땅은 상대적으로 쉽게 불법이 전해져 한때 크게 융성할 수 있었습니다. ”
“이차돈 스님 이던가요 신라 때 불교가 전해지기 까지는 그런 분의 순교가 있었다고 들었는데요.”
“그 말씀 나올 줄 알았습니다. 이차돈 성조는 스님은 아니시고.. ”
이렇게 해서 이땅에 천주학을 펼치기 위해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하는 불교사의 무대는 조선땅으로 옮겨 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