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일 작
“방낙아, 바오로 처럼 나서 교회에 헌신 하거라”
산사의 새벽 범종 소리를 들으면서 직암과 동섬은 천주를 향한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댕 대에앵 댕’
새벽 여명을 가르며 울리는 범종 소리는 그리 높지 않은산 용문산의 산허리에서 아랫 마을로 널리 울려 퍼지기도 했지만 두 사람의 가슴을 먹먹하게 파고 들어 청량하게 적시고 있었다.
직암 방락과 동섬 유락(有樂,유스티노) 의 용문사 짧은 안거(安居)를 굳이 천주교식 피정(避靜)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 있기는 했다. 두 사람은 절에 있으면서도 아침 저녁으로 천주께 기도를 올렸다.
새벽 인시경, 범종 소리가 들리면 둘은 벌떡 일어나 우물가에서 찬물로 세수를 한 다음 요사채 툇마루에 앉아 기도를 올렸다.
용문사의 범종 소리는 절의 새벽 예불을 알리는 종소리였지만 이 범종 소리는 산 아래 양근과 지평 마을에도 퍼져, 그 종소리를 듣고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직암과 유락도 동리에 있을때는 그랬다. 이 시각은 도성의 파루(罷漏)와 비슷한 시간대로, 새벽 동틀 무렵이었다. 범종은 장닭보다 빨리 울렸다.
두물머리 쪽 수종사의 범종 소리와 함께 양근과 지평 일대를 깨우는 새벽의 종소리였다. 종은 매일 아침 108번 울렸다. 이는 인간의 108번뇌를 씻어낸다는 내는 의미가 있다고 했는데 108번이 끝나려면 꽤 시간이 흘렀다. 그 탈 번뇌를 상징하는 종소리를 들으면서 직암과 동섬은 천주를 향해 각오를 다지곤 했던 것이다.
그때까지 직암 방락이 올리는 기도는 천주의 가르침이 이 땅에 빨리 전해져 위에서 아래까지 모든 사람들이 평화롭고 평등하게 복된 삶을 누리게 해달라는 바람을 간구하고 다짐하는 기도였다. 그렇게 하기 위해 오늘은 무엇을 했고 또 무엇을 할것인가 다짐하는 기도였다.
연경의 탁덕들에게 직접 전수 받았다는 승훈이 가르쳐준 수준 높은(?) 기도의 요령에 따라 직접적으로 바람을 전하는, 뭘 어떻게 해달라는 복을 구하는 기도 보다 하나님과의 솔직한 대화에 집중 하다보니 그 요령과 효과가 날이 갈수록 늘어 갔다.
직암은 이땅이 천주의 땅이 된다면 라마처럼 강성한 나라가 될 수도 있고 불란서나 덕국처럼 문명과 문화가 높은 나라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믿었다. 저들의 문명과 과학 기술은 그리고 기하학과 천문학은 참으로 놀라왔다. 다 천주를 받아들였기 때문 아닌가. 저들의 과학기술을 재빨리 받아들인 일본은 그 극히 일부의 알량한 기술로 이 땅에 쳐들어와 한참 분탕질을 해대지 않았던가. 그 분탕질이 하늘의 뜻이 아니었기에 종내는 물러 갈 수 밖에 없었던 게다.
초기에 보록과 반석 등이 나서 종국에는 최강의 국가 라마를 천주의 나라로 맍들어 낸 신앙과 전교의 역사는 들여다 볼수록 대단 했다. ‘네 시작은 미약 했으나 그 끝은 창대하리라’ 성서의 말씀이 결단코 틀린 말이 아니었다. 조선이라고 못할 것이 없다고 생각 됐다.
“절에 앉아 부처가 아닌 다른 신 한테 기도를 한다는 것이 부처님한테 미안스럽지 않는가?” 아침 예불 대신 기도를 시작한 첫날, 기도를 끝낸 뒤 동섬이 물어온 말이었다.
“한번도 그생각 못했는데 그러고 보니 그렇네요. 불교는 어쩐지 저에게는 배타적인 종교 같지 않아서 그런가 봅니다. 현담 당이 한말도 있고 해서…”
두 사람에게, 아니 천진암 천주학 공동체 도반 전부에게 불교는 너무도 고마운 종교 였다. 천진암과 주어사의 스님들 덕분에 강학이 시작될 수 있었고 지금도 규모가 큰 절 용문사의 스님들과 공양주들은 두사람이 서학, 천주학을 공부 하기위해 왔다는 것을 알면서도 흔쾌히 방사를 내줬고 두끼 공양을 제공해 주고 있었다.
첫 날과 둣째날은 범종 타종이 끝난 후 시작되는 아침 예불에 참석 했지만 주지 스님 현담당이 굳이 그럴필요 없다면서 ‘당신들 공부에 매진 하라’해서 마음을 열고 자유롭게 산사의 안거를 할 수 있었고 타종 시간에 맞춰 기도도 올릴수 있었던 것이다. 두사람이 천주께 기도를 올리는 동안에도 대웅전 부처님은 계속 빙그레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
“그러고 보면 불교의 포용력과 생명력이 대단한 거야”
“그렇죠. 사실 이땅의 민초들이 이나마라도 마음을 붙이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 어쩌면 불교, 부처님 덕인듯 싶습니다.”
“자네도 그렇겠지만 나는 종교 하면 불교가 먼저 떠오른다네, 유학을 유교라고도 한다지만 나에게 유교는 종교로 다가서지 않아.”
그랬다. 성리학적 가치관이 지배하는 가운데 불교는 민초 들에게는 물론 사대부 유자 들에게도 다른 사상적 대안을 제공 했고 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유교가 인간관계를 중시하고 질서와 예절을 특히 강조 했다면, 불교는 개개인의 해탈과 내면 성찰을 강조하면서 경직된 조선 의 사상적 다양성을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 한마디로 종교가 인간 생활에 꼭 필요한 것이라면 이땅에서는 불교가 그 역할을 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 유교가 국가 이념으로 자리 잡으면서 백성들은 신분제의 굴레 속에서 큰 고통을 겪어야 했지. 이때 불교는 민초들에게 인내와 위안을 제공하며, 내세의 희망을 통해 현실적 고통을 극복하도록 돕는 역할을 했지 않은가”
동섬에게는 계속 신분제가 최고의 관심사였다.
“거기에다 사찰은 전란과 기근 등 재난 시기에 백성들이 의지할 수 있는 피난처 역할을 하기도 했죠. 사찰에서 한약과 민간 치료법을 활용해 백성들을 구완한 예는 매우 많습니다. 유교의 사당과 서원은 뭘 했는지…”
“저 해남의 대흥사와 강원도의 백담사는 지금도 사찰 약방으로 유명하지 않은가? 또 큰 사찰에서는 곡식을 저장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구휼 활동을 지금도 벌이고 있다 하지 않는가.”
어쩌다 보니 불교 예찬론이 되었지만 얘기는 계속 됐다. 종교의 필요성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했다.
고려조의 팔만대정경도 있지만 조선에 들어서도 사찰을 중심으로 언문 불경이 유포되었으며, 한문이 익숙하지 않은 여성과 일반 백성들이 불경을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했다. 민초들에 대한 교육에도 한몫 했던 것이다.
불교의 명절 연등회, 백중기도 등은 조선에서도 백성들에게 중요한 행사로 자리 잡았고 거기에서 온갖 굴레에 덧 씌워져 있는 여성들은 신앙적 위안을 얻고 그나마 바깓 출입을 할 수 있었다.
“자네 천지팔양 신주경이라고 들어보았는가?”
“들어는 보았죠”
불설천지팔양신주경(佛說天地八陽神呪經)』은 당나라의 고승인 의정(義淨)이 한역하였다고 알려진 불서(佛書)이나 그 내용이 허황되고 도교적 색채가 강하여 중국에서도 위경(僞經)으로 간주되는 경이다.
“선남자 선여인이 천지팔양경을 받아서 지니거나 읽고 외우고 남을 위해 쓰고 베낀다면 물이나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고 떠내려가지 않으며 이 경을 세 번만 읽어주면 병이 낫고 몸이 건강해져 힘이 날 것이니 이경을 세 번만 읽으면 어리석고 미욱함이 없어지고 자비를 베풀게 되므로 불법의 복을 얻게 되고 전쟁에 나간 아들이 살아 돌아 온다고 하지 않는가? “
“그렇게 쓰여 있어 절에 다니는 부녀자들이 매우 애송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 경을 우리말로 해석하고 얼리 보급한 이가 바로 이절의 창건주인 정지국사일세”
“그랬나요?”
정지국사는 이절에 부도비가 있는 창건주로 일신의 14대 할아버지인 개국공신 권근이 그 부도비문을 작성해 권문과도 인연이 있는 학승 덕승 이다.
“정지국사가 이 경이 허황되고 주술적이라는 것을 몰랐겠는가? 다 민초들을 위한 심모원려 였던 게지”
불교는 이처럼 이땅에서 불안하고 고달픈 민초들에게 종교로서의 역할을 했다. 그런점에서 유교는 종교로서의 기능이 없었고 오히려 종교 활동을 미신시하는 역기능이 더 컸다.
두사람을 가슴으로 적시는 아침 저녁으로 울리는 범종 만해도 그랬다. 그 시대에는 인정(人定)과 파루(罷漏) 가 있어 시간을 알렸다. 인정(人定)은 밤 10시경(亥時, 해시) 을 의미한다. 이때 북과 종이 울리면 궁궐과 도성의 문이 닫히고 통행이 금지되었다. 일반 백성들은 밖을 돌아다닐 수 없었고, 이를 어기면 처벌받았다. 파루(罷漏)는 새벽 4시경(寅時, 인시) 울리는 종이다. 파루가 되면 도성의 문이 다시 열리고, 공식적인 하루가 시작되었다. 한양의 경우, 보신각에서 파루를 알리는 종이 울렸지만 지방은 그럴 수 없었다. 관찰사가 나가있는 각도의 도성에나 종루와 북루가 있었지 다른 곳은 어림 없었다. 그래서 각지의 큰 사찰은 일상 생활의 밀접히 다가서 있었다.
하지만 이땅에서 종교로서 불교의 역할은 거기 까지 였다. 하긴 불교는 그 역할을 고려조 5백년 동안 시험해 보았지만 적지 않은 한계를 노출 했던 것은 사실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