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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實錄)소설>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95)

 안동일 작

“방낙아, 바오로 처럼 나서 교회에 헌신 하거라”

보록(바오로)의 교회에 대한 생각은 그의 서신서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데 그는 교회를 단순한 조직이 아니라 그리스도, 야소의 몸으로 보았다. 그러면서,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라고 강조했다.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이니라.”
그때 직암과 동섬이 특히 감동받는 교덕서는 성교전서(聖敎全書) 였다. 1629년 예수회 신부들이 편찬한 이책은 천주교의 역사와 신학을 정리한 백과사전 같은 책이다. 황제의 칙령으로 편찬된 문헌 중 하나로, 당시 중국 천주교 신자들에게 중요한 교리와 역사를 소개하고 있었다. .

교회(敎會, Ecclesia)는 ‘불러 모으다’라는 뜻의 헬라어 에크레시아(Ekklesia)에서 유래하며, 원래는 공동체의 모임을 뜻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단순한 모임을 넘어, 신자들의 신앙적 결속체로서 ‘그리스도의 몸’(Corpus Christi)이라 불리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 책에는 보록의 말을 동원해 교회의 중심은 사람이 아니라 구세주 그리스도 자신이며, 성도들은 각자의 역할을 하는 ‘지체’가 되는 것이라는 설명이 이어진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이 대목이 직임과 동섬의 가슴을 뛰게 했고 교회는 인종, 신분, 계급을 초월한 영적인 연합체이며, 모든 성도는 ‘한 몸’으로 연결된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받아드리고 있었다.

새벽 용문산 바람이 요사채 툇마루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은  조용히 흐르는 바람 속에서,  산 너머에서 새벽이 밝아오는 빛을 보며, 이런 자연적인 순간들이 두사람에게는 성령이 함께하고 있음을 느끼게 했다.

바울은 교회를 성령의 성전으로 설명하면서 교회의 거룩함을 강조했다. .
“너희가 교회가 하느님의 성전인 것과 하느님의 성신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느님의 권속이라.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돌이 되셨느니라.”

교회는 전교의 전진기지 이기도 했다. 전교야 말로 또하나 교회의 큰 사명이다. 자기들만의 가슴속에 품고있는 불꽃은 불이 아니다. 전해야 타로르른 불이 되는 법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교회는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전교의 공동체로 주변사람 그리고 먼곳의 사람 모두에게 적용되는 사랑과 섬김의 모범이 돼야 한다고 보록은 늘상 강조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많은 이들이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 있도록 더욱 격려하고 모여야 하는 것이다..”
동섬과 직암은 특별히  안제하(安提阿, 안티오크, 안디옥)교회에 대한 기록을 열심히 찾았다. 안디옥의 교회야 말로 직암과 동섬이 생각하고 찾고 있는 그런 교회 였기 때문이다.

안디옥 교회는 앞서 언급 했듯이 초기 기독교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교회로, 이방인 선교의 중심지였다. 스데반의 순교 이후 박해를 피해 흩어진 헬라파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로마제국 세번째 큰 도시 였던 안디옥에 복음을 전파했고 이로 인해 많은 이방인들이 천주를 믿는 일이 일어났다.
중앙 격이었던 예루살렘 교회는 이 소식을 듣고 덕높고 신망 있는 바르나바를 파송했는데 바르나바가 고향 다소에 은거해 있던 사울(바오로)을 초빙해 함께 교회의 틀을 다졌다. 두 사람은  신도들을 가르쳤고 교회의 직분 제도를 확립해 이곳에서 처음으로 신자들이 ‘그리스도인’이라 불리게 된다.

틀을 갖추게된 안디옥 교회는 이후 바르나바와 바오로를 선교사로 파송해 국제선교에 나섰다. 바오로와  바르바나는 코린도, 데살로니카, 에페소 등 앗시라아 주변 도시를 순회 하면서 교회를 건립 했고 마침내는 로마에 까지 입성하게 된다.

“보록이 라마에 들어가 복음을 전파한 일이야 말로 천주교 천년사의 최대 사변이라고 생각 되는데 그렇지 않는가?”
“그렇죠,  죄수의 신분으로 왔다지만 옥중에서도 많은 전교를 해냈고 많은 서신을 보냈다고 하지요, 대단한 일입니다. 그러고 보면 라마도 여간 여유가 있던 나라가 아닌듯 싶습니다. ”

그랬.  당시 세계의 패권국 로마에 틀을 갖춘 공동체, 교회가 세워진 것은 엄청난  의미를 지닌다. 천주학이 로마로 전해지지 않았다면 지금의 천주교는 없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로마의 교회는 선교사의 파송에 의해 세워진 것이 아니었다. 성령 강림의 오순절 때  예루살렘을 방문한 순례자들 중에는 로마에서 온 유대인과 개종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 후, 로마로 돌아가 나름대로 그 복음을 전파해 삼삼오오 모이기 시작했고 이런 과정을 통해 1세기 중반까지 로마에 기독교 공동체가 형성돼 있었다.

사도 바오로는 로마에 있는 기독교 공동체와 서신을 통해 교류했다. 불후의 걸작  로마서를 통해 그들과의 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 바오로는 로마를 방문 하고자 하는 열망을 여러 차례 표명했다. 이런 서신과 방문 계획은 로마 내 기독교 공동체의 성장을 촉진하는 데 기여했다

바오로가 로마에 도착한 것은 서기 60~61년경으로 그는 죄수의 신분으로 왔다 (사도행전 28:16). 하지만 감금 상태 에서도 복음을 전파하며 그곳 교회와 교류했다.  비슷한 시기 베드로도 로마에 와 전교 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베드로의 로마 방문이 바오로의 영향을 받은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때 베드로의 손에는 바오로의  로마  서 가 들려 있었다고 전해지는 것을 보면  결쿠 무관치 않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바오로는 로마에서 연금 상태로 지내면서도 자신을 찾아오는 로마 교회 사람들을  맞이해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가 하는 가르침을 담대하게 전했다.
이 기간 동안 바오로는 여러 서신을 작성했는데, 특히 에페소서, 필리피서, 골로새서, 필레몬서 등은 ‘옥중서간’으로 알려져 있다. 이 서신들을 통해 그는 각 지역 교회와 신자들에게 부활과 재림의  교리를 전달하며, 그들을 격려해  신앙을 굳건히 다지는 데 기여했다.

64년경의 네로의 기독교 박해가 로마 교회를 크게 흔들었는데  바오로와 베드로도 이 시기 순교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바오로가  돌 위에 마리를 내밀어  참수돼 먼저 순교했고 베드로는 얼마 뒤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 했다.

교회사에 있어 바오로의 또하나 큰 공헌은  교회의 질서와 역할을 위해 구체적인 직분을 세운 일이다.
“하느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사도, 사제, 는  교회를 지도하고 가르치는 역할을 맡았고 부제는 교회를 섬기고 실질적인 봉사를 담당 했다.   선지자, 교사는 복음을 전파하고 교리를 가르치는 역할을 맡았다.
바울은 교회가 질서를 유지하며, 직분을 맡은 맡은 이와 신도가 서로 협력해야 건강한 공동체가 된다고 강조했다.

그후 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가 공인되면서 교회는 본격적으로 공식적인 조직을 갖추게 되었다.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삼위일체 교리가 확립되었으며, 이후 여러 공의회를 거쳐 정통 신학이 체계화되었다.
이와 함께 가톨릭교회의 사제(신부) 제도는 지난한 역사를 거치면서 그 의미와  역할이 발전해왔다. 사도라는 말 대신 사제 그리고 감독이라는 말이 널리 쓰이게 됐다.
사제직의 기원은 예수가 열두 사도를 선택하고, 이들에게 복음 전파와 성사 집전을 맡기면서 시작되었다.  베드로를 중심으로 한 지도 체계가 형성되었으며, 사도들은 자신들의 사명을 이어받을 후계자를 임명하는 전통을 남겼다.
초기 교회에서 사제직은 바오로의 구분에 따라 ‘주교(Bishop, ἐπίσκοπος)’, ‘장로(Presbyter, πρεσβύτερος)’, ‘부제(Deacon, διάκονος)’의 세 직분으로 이루어졌다.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가 공인되면서 사제직이 명확하게 분화되었고, 주교(Bishop)와 사제(Priest)의 역할이 구별되었다. 로마 교황청이 설립되고 강력한 권위를 가지게 되면서 교황(Pope) – 대주교(Archbishop) – 주교(Bishop) – 사제(Priest) – 부제(Deacon)의 위계 질서가 확립되었다. 사제는 성사 집전만을 담당하는 역할이 아니라, 신자 공동체를 지도하고 보호하는 역할을 맡았다.

4세기까지 일부 사제들은 결혼을 했으나, 교회의 거룩함을 강조하고 성사 집전에 온전히 헌신하도록 하기 위해 ‘사제 독신제’가 법제화되었다.  신부라는 말도 이즈믈 쓰이기 시작 했다.  초기 에는 그리스어 ‘프레스뷔테로스(presbyteros)’에서 유래한 ‘프리스트(priest)’라는 용어가 사제를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장로’를 의미하며, 신약성경에서 교회의 지도자를 지칭하는 데 사용되었다.  중세 시대에는 라틴어 ‘파테르(pater)’에서 유래한 ‘파더(Father)’라는 호칭이 사제에 대한 존칭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전통은 현재까지 이어져, 가톨릭과 성공회 등에서 사제를  ‘Father’라고 부른다.

베네딕토 수도회(529년 창설)를 비롯한 수도원 운동이 확산되면서 수도사들은 사제직을 겸하는 경우가 많아졌다.수도원 출신 사제들이 학문과 행정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며, 성경 해석과 신학 연구를 발전시켰다.
13세기 토마스 아퀴나스 등의 교부 신학자들이 성사의 신학적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사제의 역할이 더욱 신성화되었다.

사제는 단순한 공동체 지도자가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을 중재하는 성사의 집전자로 자리 잡았다.
한편 1517년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개신교가 등장하면서 사제직의 개념이 도전받았다. 루터는 ‘만인사제설’을 주장하며 사제의 중재 없이도 신자가 직접 하느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가톨릭교회는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년) 를 통해 사제직의 정당성을 강화하고, 신학교 제도를 정비하였다. 16세기 이후 가톨릭교회는 신학교(Seminary)를 공식적으로 설립하여 사제 양성을 체계화하였다. 신학생들은 철학, 신학, 윤리학, 라틴어 등을 배우며, 보다 전문적인 사제 교육을 받게 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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