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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實錄)소설>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92)

안동일 작

“방낙아, 바오로 처럼 나서 교회에 헌신 하거라”

암브라시오 권철신과 유스티노 조동섬은 방락 권일신의 가슴속에 있는 천주 신앙의 씨앗을 일깨우고 북둗은 시문 (施門,시메온)과 안내 (案內, 한나) 였다. 야소 기리스도의 갓난아기 시절 유대 할례식 때 그를 하늘의 아들 구세주로 처음 본 남녀 예지자들 말이다.

“그래, 이번 안거에서 무엇을 특별히 하고 싶는가?”동섬이 물었다. 안거 (安居) 라는 불교용어를 썼지만 어색하게 들리지 않았다.
“아무래도 교회를 꾸리는 일에 궁량을 쏟아야 할듯 싶습니다.”
“교회? 가르침이 모여 있는 곳이라는 말인가. 좋은 뜻이구먼, 중국 사람들이 번역을 잘했어, 불가의 교회는 법당이라해서 딱딱한 느낌이 든다 싶었는데 …”
사실 교회라는 사도신조에 나오기는 했지만 그때까지 잘 쓰이지 않는 생경한 말이기는 했다.
“앞으로 천주학 공동체를 교회라는 말로 쓰기로 했습니다. ”

광암이 그 일을 당하기 얼마전에 함께 결정한 일이었다. 명례방 모임을 조선의 초대교회 삼아 세를 확장 시키자는 결의 했었다.

말한대로 직암 권일신은 그해 용문사 안거 혹은 피정에서 교회와 보록에 대해 집중 공부를 했다. 결의를 다졌다는 애기다.
피정이라 했지만 이는 후일, 달레 신부가 자의적으로 명칭을 부치고 의미를 부여한것으로 여겨 진다. 피정(避靜)은 말 그대로 고요한 곳으로 피해 들어가는  뜻이다.  이 피정을 천주교에서는 본격 수양기도를 뜻하는 말로 쓰는데  예수가 40일간 광야에서 단식한 일을 기원으로 해서, 16세기 예수회 창시자 이냐시오 로욜라가 자신의 저서를 통해 실제적인 피정 방법을 제시하면서 오늘날까지 천주교회에서 보편적인 신심 수련의 방법으로 자리 잡았다.   예수회원을 자처한 권일신 등이 이에 큰 감흥을 받았을 수는 있어도  그때까지  천주교 신행과 관련해 그 만큼의 소양이  없었던 방락 권일신과 조동섬은 그기간   묵언 기도만 하지는 않았다.

달레 신부 등은 당시 직암과 동섬이 「성경광익(聖經廣益)」과 「성년광익(聖年廣益)」 지참 했고 그 책을 근거로 했다고 적었다.  8일 이란 피정 기간도 「성경광익」에 규정된 것이고,   매일매일의 시간표와 묵상 제목까지 따랐다고 적었는데… 글쎄 .

「성년광익」의 머리말은 이렇게 시작된다. “이제까지 성인이 되는 바탕은 묵상에서 말미암은 것이 대부분이다. 고금의 여러 성인이 서로 전해온 것을 두루 소급해보더라도 이 한 가지 길을 버리고서 능히 큰 덕과 기이한 공을 이룬 경우는 거의 없다.(從來作聖之基, 多由於默想. 歷溯古今聖聖相傳, 鮮有舍此一途, 能使大德奇功.)” 이어지는 글에서는 “마땅히 한 번에 8일을 기준으로 삼아 거행해야 한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묵상의 구체적 내용이  「성년광익」에 실려 있다.

그 책 앞쪽에 실린 「8일 내 묵상간서제목(默想看書題目)」을 보면 첫날의 묵상 주제는 ‘잠시 살다 가는 인생을 잘 쓰자(善用暫生)’와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말자(小心時候)’, 그리고 ‘영혼을 잘 보살피자(小心靈魂)’로 돼있다.  그러면서  성 바오로 전기와 성 안토니오의 전기 등을 읽고 묵상한다고 명시 돼 있다. 성 바오로, 보록이 대표적 묵상 성인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달레 등은  ‘ 8일간 두 사람은 두 책을 옆에 두고 서로 한마디 말도 나누지 않은 채 피정의 일정을 소화했다’고 했는데 실은 그렇지 않다.  .직암과 동섬이   이 부분에 천착 했지만 무수한 토론을 했고 심지어는 교회 확장과 관련해 용문사 주지 스님과도 담소를 나눴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정약종의 부인이자 정하상의 어머니인 유 시칠리아의 성무일기에 잠깐 나온다.

보록은 천주학 역사에 있어 야소와 베드로 만큼이나 중요한 인물이기 때문에  교덕서들은 그의 생애와 특히 전도 여행을 설명하고 있다.   성경광익, 성년광익 뿐이나 대부분의 초기 천주교 교리서에는  보록의  전도 여행에 대한 설명이 포함돼 있는데   그의 여정을  지도 까지 담아  설명하고 있는 교덕서도 있다. 하긴 바오로 (바울)의 행적이 바로 사도행전일 터이니….

주지 하다시피 사도 보록은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으로, 그의 위상과 업적은 어마어마하다.   초대 교종 베드로와 함께 기독교의 두 기둥으로 평가되며,  신약성경의 가장 많은 부분을  서신(바울 서신)형태로 저술한 인물이다.  에베소며 고린토 등 주요 거점 도시에  교회를 설립했고   교리적으로는 “이신칭의(믿음으로 의롭게 됨)”를 강조하며, 기독교 신학의 기초를 다졌다.

사도 바오로는 예루살렘 중심의 유대인 기독교를 넘어 전 세계로 복음을 확장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 했기에  ‘이방인의 사도’ 로도 불린다.  세 차례에 걸친 대규모 선교 여행을 통해 소아시아(터키), 그리스, 로마 등지에 교회를 세워   유대교 중심이었던 초기 기독교를 이방인들에게 확장하며 보편적 종교로 자리 잡게 했던 것이다.
언급한 대로 신약성경 27권 중 13권을 집필,  기독교 교리의 기초를 믿음을 통한 구원, 성령의 역할, 교회의 본질 등에 대한 깊은 신학적 가르침을 남겼다.

초기 교덕서들이 얼마나 심도있게 보록의 교회론과 구원론을 다루고 있는지는 확인 되지 않지만  마침 하늘의 음성까지 들었던  직암에게  그의 구원론과 교회론은  커다란 깨달음을 주었던 것이 틀림없다.

보록은  기독교 최초의 선교사이며 부흥사 였다. 그가 가는 곳 마다 교회가 세워 졌다. 그를 좋아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그를 업신여기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반대로 그의 동반자 바나바는 싫어하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았지만 깔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멋진 조합이다.

직암과 동섬이 파악 했음직한 초기 교회 성립과 발전과 관련한 보록의 성화 과정을 보면 파란 만장이지만 기적의 연속, 준비된 천주의 뜻이 발현 된 것 이라고 밖에 말 할 수 없다.

다마섹으로 천주교인을 탄압하러 가던 보록(이하 바오로)은  예수를 만나고 쓰러진 뒤 계시를 받은 아난나에게 안수를 받고 다시 태어난 그 직후  다마섹에 들어가 예수에 호감있는 유대인들에게 자신의 경험담을 들려 주며 예수가 현현 하고 있음을 확인 시키려 했지만 저들의 반응은 시쿤둥했다.
그후 바오로는 광야에서 3년을 지내며 묵상과 계시로 이어지는 수도 생활을 한 끝에 큰 깨달음을 얻은것으로 여겨 진다. 직암에게도 이 부분이 가슴으로 다가왔을 게다.

광야에서 나온  보록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꾸려져 있던 에루살렘으로 들어가 베드로와 야고보를 비롯해 12 사도들을 만난다. 보록은 자신의 예수 부활과  ‘이신칭의’의 깨달음을 전해 주지만 12사도들의 반응은 탐탁치 않았다. 하지만 이 만남에서 바울은 베드로와  야교보로 부터 예수의 생전 모습과 행적을 상세히 들었고, 베드로 등은 유식한 바울로 부터 구약 유대경전에 언급돼 있는 선지자, 구세주의 이야기를 통해 예수가 진정한 구원자 임을 입증하는 논리를 전수 받게 된다.

그럼에도 12사도들은 바오로를 탐탁치 않게 여겨 교회내에서 중용하지 않고 방치하다 시피 하자 바오로는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 10년 가까운 세월을 천막을 만들면서 주변 친지들에게 조용하게 자신의 깨달음을 전수한다. 이런 인고의 세월이 지나고 에루살렘에 이어  큰 도시인 안디옥에 교회가 꾸려지고 그 교회의 성원들이 예루살렘 교회에 사제, 목회자를 보내달라고 요청을 했다. 신망있는  바나바가 그 사목자로 지명되었는데 그때 바나바가 다소의 바오로를 적극 추천 한다.  바나바는 부유한 상인 출신으로 믿음은 출중했지만 자신의 지식과 헤안은 바오로의 발치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잘알고 있었다. 바오로가 이 제안에 흔쾌히 응해 안디옥 교회로 떠난 일은 불교에서 깨달은 석가모니가 다섯비구의 요청에 의해 전도에 나서는 일에 비견할 만 하다.

안디옥에 사도로 부임하면서 바울은 교회에 신앙이 무엇인지를 구체화 했고 바나바와 함께 사제이자 목회자인 사도와  원로격인  장로, 그리고 행정 요원인 부제(집사)를 세우는 등 교회의 직분 체제와 조직을 정비 했고 공동체 생활과 예배 방식, 신앙 윤리를 구체화했다.

바울이 나서기 전까지 마가의 다락방 초대 교회는 예수의 행적을 추억하며 그의 부활만을 기쁘게 여기고 막연히 회개해야만 한다고 소리를 높였지만 그 구체적인 이유와 방법은 따로 언급하지 못했다.

사실 ‘마르코의 다락방’은 천주교 역사에 있어 엄청난 의미를 갖는 곳이다. 이 다락방은  신약성경에서 특히  매우 중요한 두 가지 사건과 관련이 있다.

마르코의 다락방은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만찬을 가졌던 장소로 여겨지는데 이 자리에서 예수는 성체성사를 제정했고,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며 제자들에게 섬김과 사랑의 교훈을 남겼다.
부활 이후에는 예루살렘의 제자들이  함께 모여 기도하던 장소로, 부활  50일째 되는 오순절날, 성령 강림 사건이 일어난 것으로 묘사된다. 이 오순절에 성령이 제자들에게 임한 일은 초대 교회의 탄생을 알리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처럼  마르코의 다락방은 단순한 물리적 공간을 넘어, 성체성사, 공동체, 성령의 임재, 초대 교회의 시작을 상징하는 중요한 신앙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상징적 공간을 새로운 세계 질서의 요람으로 만든 이가 바오로다.

바오로은 고심 참담끝에 인간과 하느님의 화해의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임을 강조했다. 이 다락방에서 베드로를 처음 만났을 때도 그 이야기를 역설 했고, 다락방의 지부 격인 안디옥의 천연 동굴에서도 이를 힘주어 설파했다. 예수의 죽음으로 자신도 구원 받았다는 사실을 베드로는 바울을 통해 처음 전해 들었던 것이다.

“하느님은 당신의 완전한 본질을 그리스도에게 기꺼이 주시고 그리스도를 내세워 하늘과 땅의 만물을 당신과 화해시켜주셨습니다. 곧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의 피로써 평화를 이룩했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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