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일 작
“방낙아, 바울 처럼 나서 교회에 헌신 하거라”
직암은 일이 이렇게 까지 최악의 상황으로 급전직하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기에 망연자실 할 수 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광암 이벽이 그렇게 허무하게 세상을 떠날 줄은 몰랐다. 청천벽력이 따로 없었다. 역병에 걸려 그렇게 됐다면서 전염이 두려워 초상도 치르지 않고 조문도 받지 않는다고 해서 찾아가 볼 수도 없었다.
을사년 1875년 여름의 일 이었다.
명례방의 그 사달이 일어난지 3개월 남짓한 시간 밖에 지나지 않은 때 였다. 그 짧은 시간에 어렵사리 꾸렸던 천주 교단은 풍비 박산이 나 있었다.
조선인 첫 공식 세례자 이승훈은 배교를 공언하고 「벽이문(闢異文)」까지 공표하며 이탈을 선언한 상태였다. 정약전 형제들 또한 아버지의 밀착 감시 아래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자신과 장형 녹암도 하루가 멀다하고 답지하는 순암 선생의 닥달 회유 편지에 혼비 백산할 지경이었다.
광암의 돌연한 죽음의 충격을 애써 추스리면서 아무리 헤아려 봐도 자신이 처신을 잘못해 일을 이지경으로 키웠다는 자책이 들었다.
그때 형조를 다시 찾아가 판서에게 대들지만 않았더라면… 총억과 상문을 데리고 가지 않았더라면…
사실 크게 대든것도 아니었다. 또 범우와 인길 만을 옥에 놔두고 나온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려 안 찾아 갈 수는 없었다. 김 판서가 처음부터 은근짜 온화하게 나온 것도 화근이기는 했다. 그때 막 형조판서로 부임했던 김화진은 노론이기는 했어도 온건파에 속한 이로, 새 임금이 유난히 아끼는 권씨 형제들이며 정씨 형제들을 좋게 보고 있는 축에 속하는 이였다. 그는 우의정에 오른 남인의 영수 번암 체제공 어른과도 절친하게 지내는 이였다.
김화진은 잡혀온 일신을 보자마자 아는 체를 했고 즉각 포승을 풀라 일렀다.
“자네는 녹암 철신의 아우가 아닌가?”
장형과는 십여년 전 세손의 경연이었던 시강원에서 함께 근무한 바 있는 이였다. 번암 체제공이 그때 시강원 좌장이었다.
“알만한 사람이 젊은이들을 타이르지 않고 함께 휩쓸린단 말인가? 돌아가서 근신하도록 하게나”
대강의 사정을 듣고는 이렇게 말하면서 풀어줘서 광암이며 정씨 형제들, 그리고 승훈과 함게 형조를 나섰었다.
그런데 추조 문앞에서 아무리 기다려도 범우와 인길은 나오지 않았다. 저들은 중인이어서 그런 모양이었다.
이런 강상의 일이나 학문 정통 시비의 일에서 양반을 치죄 하려면 주상과 조정의 승인이 필요 했다. 중인 이하의 신분에 대해서는 판서나 지방관의 전결로도 가능했다. 양반을 취조할 권한이 없었던 형조 관리들은 양반들은 모두 풀어주고 집주인인 김범우와 같은 역관인 최인길 두사람만 옥에 가두었던 것이다.
할수 없이 집에 돌아가 하룻밤을 지낸 뒤 직암은 추조를 다시 찾아 갔는데 그 자리서 천주학에 대한 토론이 벌어졌던 것이다. 직암은 매제 이윤하의 집에 기거 하고 있었는데 집이 멀었던 이총억은 동갑인 상문과 함께 사랑에서 잤는데 그날 직암을 따라 나섰던 것이었다. 두 젊은이 말고는 매제 이윤하와 이웃에 살던 정섭이 동행했었다.
마침 형조판서는 추조에 나와 있었다. 나중에 안일이지만 그때 김화진은 황해도에서 적발된 역모 사건 때문에 정신이 없는 때 이기도 했다.
직암은 공손히 인사를 한 뒤 김범우와 최인길은 함께 공부를 하던 동료 들이기에 자신들 처럼 석방해 달라는 말을 먼저 했다. 그랬더니 판서는 이번 체포는 자신이 명령한 것이 아니라 참판이 나서서 한것이니 조금 시간이 걸릴듯 싶다면서 기다려 보라고 했다.
그러면서 직암에게 어찌하여 학문높은 명문가의 자네가 무부 무군의 천주학을 신봉하냐고 한마디 했기에 직암은 천주학이 무부무군의 가르침이 아니라는 얘기를 강력히 피력 했었다.
성물 성구들을 돌려 달라고 하자 김 판서는 마침 옆에 있던 십자 고상이며 두건, 영대, 로사리오 등을 ‘넘사스럽게 무녀들이나 씀직한 이런것 들이 다 뭐냐’며 핀잔 하면서도 순순히 던지 듯 돌려 주었다.
추조의 관원들이 들이닥친 3월 초순의 명레방의 첨례는 부활 대림 주일이었기에 남들이 볼때 조금 요란하기는 했다. 참석자들이 승훈의 제안에 따라 푸른 두건과 영대를 쓰기로 했기 때문이다. 강론을 맡은 광암 세안은 알굴에 살짝 분칠도 했었다. 십자 고상이며 성수 사발 , 장궤. 마리아 성화 들도 다른 때 보다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갑진년 가을 공동 대세 이후 수표동 이벽의 집에서 정기 집회를 갖던 초기 교회 공동체는 인원도 많아지고 이목도 집중되곤 했기에 을사년에 접어들면서 넓은 집인 명례방(明禮坊) 김범우의 집으로 그 집회 장소를 옮겨 7의 베수 되는 날에 첨례를 가졌다. 말한대로 모임의 중심은 광암이었고 그는 강론을 맡아 자신의 공부한 바를 동학들에게 열성적으로 전했다.
판서가 무당들이나 쓰는 요사스런 물건들이라고 폄훼 하는 것에 총억이 발끈 했던 모양이다. “ 그 성물들은 요사스런 물건이 아닙니다 대감.” 하면서 성물들은 사람의 정신을 정성되이 하느님께로 향하게 하는 것이라 피력하며서 그러 면서 천당 지옥 애기 까지 나왔다. 김화진은 천주교를 몰랐던 우리네 조상님들은 모두 지옥에 간다는 얘기인데 그런 엉터리가 어딨냐는 일반인 들의 반응을 되풀이 했고 어린 총억이 그게 아니라며 설명을 하려하자 역정을 내면서 빨리들 나가서 근신하라고 했다. “쯧 쯧 어짜자고…” 김판서가 혀를 차는 소리가 직암 등의 뒷 통수에서 크게 들렸다.
성물들을 품에 안고 추조를 나서 면서 일이 순조롭게 마무리 되는 줄 생각했다.
하지만 김화진은 저로서는 합리적인 특단의 조치를 취했고 이 조치가 일대 폭풍을 몰아 왔던 것이다.
김판서는 자신이 일종의 경고 서한이자 회유의 내용을 담은 호유문을 써 돌렸고 자신의 처조카인 성균관 태학생(太學生) 이용서(李龍舒)와 동료 정숙(鄭淑) 등을 동원해 각 문중의 서원과 사당을 중심으로 척사위정의 통문(通文)을 돌렸던 것이다. 이 통문을 받은 유생들이 천주학 교리가 국가의 지도 이념인 성리학적 윤리 체계를 파괴한다면서 이들의 처벌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최인길은 곤장 몇대를 맞고 풀려 났지만 김범우는 곤장을 맞고 귀양 처분에 처해져 지금도 경상도 밀양 땅에서 장독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승훈의 평창 이씨 집안 , 이벽의 경주 이씨 집안. 정씨 형제들의 나주 정씨 집안에 이 통문과 호유문이 당도 하면서 각 집안이 벌컥 들끓게 됐다.
권씨 집안에도 통문이 도착 했지만 부친이 이미 작고한 터였고 철신의 학행과 권위 덕에 문중의 압박은 거의 없었다. 다만 형제들의 스승이자 직암의 장인인 순암 안정복 선생의 닥달과 성화가 이어졌다.
순암은 하루가 말다하고 편지를 써 보냈으며 천주교를 배척하는 천학고(天學考), 천학문답(天學問答)을 이때 저술했다. 이총억의 아버지 이기양과는 단단히 척을 지게 돼 서로 막말이 오가기 까지 했다.
이승훈의 부친 이동욱은 3월 하순 집안 친척들을 다 모아놓고 아들 이승훈이 앉은 자리에서 한 해 전 연행에서 구해온 서학 서적을 마당에 쌓은 뒤 불을 질렀다. 이어 서사(西士)에게서 선물로 받아온 각종 의기(儀器)들도 모두 박살 내버렸다. 한때는 자랑과 긍지의 표징이었던 물건들이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아들에게 친척들 앞에서 「벽이문」을 지어 낭독하게 하고 신앙을 버릴 것을 맹세하게 했다. 서학책이 불타 재가 되자 이승훈은 다시 ‘벽이시’ 즉 이단을 배척하는 시 한 수를 지었다. 시는 이렇다.
하늘과 땅 경계 져서 서쪽 동쪽 구분하니 (天經地紀限西東)/무덤 골짝 무지개 다리 안개 속에 어둑하다. (墓壑虹橋靄中)/한 심지 심향(心香)을 책과 함께 불태우고 (一炷心香書共火)/멀리 조묘(潮廟) 바라보며 문공께 제사하리. (遙瞻潮廟祭文公)
승훈의 벽이문은 필사본이 양근의 녹암과 직암에게도 전해 졌는데 마지막 연 문공께 제사 지내리를 빼고는 배교의 언사라고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승훈은 부친의 감시하에 옴짝달싹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는 약과 였다. 광암의 경우에는 정말 공노할 일이 벌어져 그 건장한 청년이 그 영민한 청년이 스러져 가야 했던 것이다. 그의 나이 이제 겨우 서른 하나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