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일 작
<중간 작가의 말 4. >
파리 외방전교회의 순교 정신 “떠나라 그리고 돌아오지 말라”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는 다른 박해와 달리 병인년 한 해에 끝난것이 아니라 1873 년 대원군이 실각하기 직전까지 6년 이상 계속된 박해였다. 이땅의 천주교 박해 가운데 가장 늦게 시작된 박해였고 피해가 가장 컸던 박해였다. 그리고 그 영향 또한 컸다.
박해의 주역은 누가 뭐래도 단연 그 시절의 독재 통치자 였던 흥선 대원군이다. 흥선 대원군은 본래 천주교에 대한 반감이 크게 없었기 때문에 탄압을 하려는 계획은 없었다. 오히려 프랑스 선교사들의 수장인 베르뇌 주교를 통해 프랑스의 도움을 이끌어 내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막으려고까지 했었다고 알려져 있다.
대원군이 집권할 무렵 천주교단은 일종의 중흥기를 맞았다 할 정도로 활발히 교세를 뻗히고 있었다. 당시 조선에는 베르뇌 주교 를 비롯해 프랑스인 사제 선교사들이 12명이나 입국해 있었다. 모두 진작 부터 예수회에 이어 조선을 선교지로 삼은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이었다.
많은 수의 사제들이 조선에 들어와 활동 할 수 있었던 것은 기해 박해의 주역이었던 풍양조씨의 권세가 정순왕후 사후 안동 김씨로 넘어가게 되고 다시 조정을 장악한 안동 김씨 (장동 김문, 저들이 모여 살았던 곳이 서울 장동 이었다)의 본격 세도 정치로 접어들면서 특정 정치 의리를 내세우지 않아 천주교에 그다지 관심이 없어져 30년 가까이 내버려 둔 측면도 있다지만 교황청 직속으로 꾸려진 파리 외방 전교회의 선교 정책이 조선에서 만큼은 큰 효과를 냈던 것이 가장 큰 이유라고 할 수 있다.
기해 박해 때 순교한 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 도 모두 ‘그 이름도 뭉클한’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이었다. 외방 전교회야 말로 에수회와 함께 한국 천주교의 들보이기도 하다. 역사를 아는 많은 천주교인들은 프랑스가 아무리 우리들에게 못되게 굴어도 조선에서 순교한 전교회 신부님들 때문에 저들을 미워 할 수 없다고 말한다.
대원군만 해도 당시 아내 민씨를 비롯한 유모며 집안 여인들이 천주교 신자였고, 측근으로 꼽히는 관료 남종삼이 독실한 천주교 신자 였다. 남종삼은 어린 왕의 도승지로 임명 돼 있었다.
당시 조선 천주교 내부에서도 대원군의 집권을 매우 긍정적으로 보았다. 심지어 이제 조선에서 더 이상 천주교 박해는 없을 것이라는 얘기가 퍼져 외국 선교사가 사제 복장을 그대로 입고 조선에 입국을 하려 하기도 했단다. 그 전까지 외국 선교사들은 상을 치르는 사람들과 같은 조선 상복을 입고 다녔는데, 삿갓을 눌러써 외국인임이 보이지 않고 조선 예절상 상을 치르는 사람에게는 말도 걸지 않고 수색도 생략했기 때문에 신분을 숨기기 좋았기 때문이다. 이는 조선에 이미 들어와서 활동하고 있던 선교사들이 말려서 실제 행동으로 옮겨 지지는 않았다.
흥선 대원군, 그에 대한 평가는 지금도 극명하게 엇갈리고 있다. 필자 만 해도 어린시절에는 대원군이 그나마 개혁 정치를 실시한 강단있는 인물로 생각해 왔다. 하지만 최근들어 그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황현의 매천야록에 보면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대원군은 세도가 안동 김문의 부귀를 탐내고 있다가 하루아침에 뜻을 얻은 후로, 음행과 사치와 교만과 폭행을 자행하여 장동 김씨들보다도 더 지나친 일을 감행하였다. 그는 나라의 원기(元氣)를 손상시키고 백성들에게 원한을 샀으며, 공연히 토목공사를 일으키고 사색당파를 두둔하였다 .”
또 야록에는 “1882년 부터 1885년 간에 청나라에서 감금을 당했을 때, 대원군은 청의 조정의 유력 대신들에게 엄청난 양의 뇌물을 바치기는 물론 아예 민비의 축출을 위하여 청나라의 대신과 무관을 조선에 파견하여 조선의 조정을 감독케 해달라고 청의 권신 이홍장(李鴻章)에게 엎드려 빌기 까지도 했다” 고 적고 있다. 임금의 아버지로서의 체면이란 간데 없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1865년 12월, 도승지 남종삼은 “한불조약(韓佛條約)을 체결하여 프랑스 황제인 나폴레옹 3세의 위력을 이용하면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막을 수 있고, 그러기 위해서 한국에 체류하고 있는 프랑스인 선교사들의 힘을 빌리는 것이 상책(上策)”이라는 요지의 의견서를 대원군에게 올렸다. 이것을 보고 대원군도 만족해 하고 베르뇌 주교와의 만남을 추진하라 이른다.
무슨 이유인지는 알 길이 없으나 베르뇌 주교는 대원군 만나기를 거부했다. 함정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고 상부의 지시를 받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이로 인해 대원군은 천주교를 불쾌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러시아에 대한 대비로 프랑스의 힘을 빌리려 했던 방책은 러시아가 조선 진출을 일시 늦추는 바람에 그 필요성이 줄어들었다. 러시아는 전 세계에서 벌어 지고 있는 이른바 그레이트 게임 때문에 타 지역 신경 쓸 거리가 많았기에 조선 방면 남하정책을 일시 중단했던 것이다.
같은 시기 청나라에서 천주교를 유해 세력으로 간주하고 대대적인 박해에 들어 갔다는 소식이 들리자 유림 세력에서 우리도 천주교를 발본색원 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양반들은 가뜩이나 서원 철폐 때문에 앙앙불락 하고 있었던 차에 “운현궁에 천주교인이 드나든다”는 소문이 퍼져 나오자 대원군을 성토하는 구실로 천주교를 들었던 것이다.
진작 부터 천주교에 대해 큰 반감을 지니고 있던 조 대비(신정왕후 풍양 조씨 )가 대원군을 대비전으로 불렀다.
“경복궁을 중건 하고 싶다 하셨소? 대감”
“그렇습니다. 정궁이 바로 서야 나라의 기강이 서는 법입니다.”
“내 대감을 도울 터이니 대감도 내 뜻을 따라 주시겠소?”
“자하의 뜻이라면?”
“무부무군의 천주학을 멀리 하시고 저들의 씨를 말려 주시오. 내 부친과 숙부의 염원이기도 한 일이오”
조대비는 경복궁 중건을 미끼로 흥선대원군에게 천주교와 멀리하고 그들을 탄압하라고 종용 했고 흥선 대원군은 목전의 여론에 솔선 순응함이 상책이라고 결심하게 됐던 것이다.
결국 1866년, 고종 3년 정월에 천주교 탄압의 교령(敎令)이 포고됐고 2월 23일(음 1월 9일) 남종삼과 베르뇌 주교를 필두로 홍봉주, 이선이(李先伊) 등이 포청에 잡혀감으로써 박해의 서막이 올랐다.
대원군은 자신의 측근이자 천주교와의 협력을 말했던 남종삼을 제일 먼저 체포하여 처형 함으로써 보란듯이 자신의 무고를 표명했다. 참으로 피도 눈물도 없는 그 다운 처사였다. 남종삼은 1866년 3월 1일에 체포되어 투옥되었는데 그는엄혹한 고문을 겪은 후, 속전속결로 3월 7일에 서소문 밖의 사형장에서 참수되었다. 그는 예수와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면서 죽음을 맞이했다. 그가 순교하던 때의 나이는 50세였다.
베르뇌 주교는 1866년 2월 23일에 한양에서 체포되었고, 3월 7일에 새남터에서 브르트니에르 신부와 도리 신부 그리고 볼리외 신부 등과 함께 군문효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이들 사제 성인들의 순교일이 남종삼과 같은 날인 것을 보면 당시 곳곳에서 동시 다발로 사형을 집행 했다는 얘기다.
이후 대원군의 포졸들은 선교사들과 교인들을 거칠것 없이 무차별로 체포 했다. 프랑스 선교사 12명 중에서 9명이 체포 후 즉각 처형된 것을 필두로 불과 수개월 동안에만 국내 천주교 신도 8,000여 명이 처형됐다.
그런데 대원군의 이때 까지만 해도 국청 에서는 일반신자와 사제에 각각 다른 교령을 내려 처분을 선택할 수 있도록 했다. 일반 신자의 경우에는 배교와 순교인 처형을 선택하게 했다.
” 천주교 신앙을 버린다고 한다면 죽이지 않고 석방해 주겠다”고 권고했고 “어린아이들과 노인은 죽이지 말라”는 명령을 하달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신자들은 배교를 거부하고 순교했다.
사제의 경우에는 본국송환과 순교를 선택하게 했다. 프랑스인 사제들에게는 “원할 경우 처벌 없이 본국으로 돌려 보내주겠다”고 말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제들은 대부분 이를 거부하고 조선인 신자들과 함께 순교의 길을 택했다.
병인 박해때 유난히 순교자가 많이 발생한 것은 현지 적응적이고 현실적인 예수회 사제들과는 달리 파리 외방 전교회의 사제들은 순교를 지상의 최고 목표로 여겼기 때문인 것과 무관치 않다.
샤를 쿠베르탱이라는 프랑스 화가가 1868년, 조선에서 순교한 파리외방전교회 사제들을 기리며 그린 <선교사들의 출발(Le depart des Missionnaires)>. 이라는 그림을 보면 파리 외방 전교회의 숭고한 순교의 정신이 여실히 보여 진다.
이 그림에는 위앵 신부, 도리 신부, 볼리외 신부, 브르트니에르 신부가 가족 및 친지들과 마지막 작별인사를 나누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 표정들이 너무도 생생하다.
파리 외방 전교회의 모토는 ‘떠나라 그리고 돌아오지 말아라” 였다.
순교를 최고의 덕목으로 여겼던 전쇼회 사제들에게 조선은 최 우선 희망지였다.
예수회는 이교도들을 전도 하기 위해 저들의 신임을 먼저 얻어야 하는데 함께 예수를 욕해도 좋다고 은밀한 서약을 한단다.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대원군의 박해를 피해 조선을 탈출한 리델 신부(1830~1884)는 텐진에 있던 극동함대 사령관 로즈에게 프랑스 선교사 9명의 순교 소식을 전했다. 로즈 제독은 청나라의 중재 제의를 거부한채 군함을 이끌고 무력보복에 나서 병인양요가 발생했다.
이들은 9월 26일 경에 양화진을 거쳐 서강까지 순찰한후 강화도를 공격했고 일시 점령했다가 11월에 철수했다. 조선왕조 실록이 약탈 당한 것이 이때 였다. 이 사건에 분기 탱천한 대원군은 “서양 오랑캐가 더럽혔던 땅을 서학인의 피로 씻음이 마땅하다” 고 하면서 양화나루 옆의 잠두봉에 형장을 설치해 천주교인들을 처형하게 했다. 이때 수천명의 천주교인들이 이곳에서 죽었다. 그 뒤로 절두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잘린 목은 한강에 던져졌고, 머리가 산을 이루며 한강물이 핏빛으로 변했다. 노인과 어린이의 구분은 없어져 있었다.
1866년 10월에 병인양요가 벌어지고 1868년 5월에는 독일인 오페르트에 의해 흥선대원군의 부친 남연군의 분묘 도굴 사건이 일어나자 탄압은 더욱 거세졌다. 더 안타까운 일은 이런 천주교도들의 탄압을 일반 백성들이 사양 귀신에 빌붙은 악종들은 죽어 싸다 면서 찬동 했다는 것이다. 악마화가 일어 났다는 얘기다. 서양 오랑캐들의 침범을 안내 했고 심지어는 임금의 할아버지 묘를 파헤쳤다는 관에서 내려온 소식은 백성들에게 그대로 공분으로 막혀 들었던 것이다.
이같은 천주교 탄압은 6년간 지속되었는데 탄압이 심했던 곳은 서울 합정, 황해도 옹진, 풍천, 장연, 충청남도 내포와 서산 해미면 주변이었다.
충남 서산시 해미면 조산리에 있는 ‘여숫골’이라 불리는 골짜기에서는 천주교인 1000여 명이 처형 또는 생매장 당했다. 당시 해미진영(海美鎭營)은 천주교도 색출과 처벌의 임무를 맡고 있었기 때문에 충청도와 경기도 평택에 이르는 해미현 관아 관할지역에서 불문곡직 할당량 때문에 붙잡힌 천주교도들은 해미읍성으로 끌려왔다. 이들을 옥사에 가두었다가 서문 밖에서 처형했는데, 숫자가 너무 많아지자 시체처리의 편의를 위해 읍성 바깥의 해미천변에 큰 구덩이를 파고 생매장을했다. 이런 사실은 1935년 서산성당 범바로(P, Barraux) 신부의 조사와 발굴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박해는 네 차례에 걸쳐 파동으로 전개됐다. 첫번째는 1866년 봄에, 두번째는 1866년 여름에서 가을까지, 세번째는 1868년, 네번째는 1871년으로 이어져 셀 수 없는 숫자의 순교자를 배출했다. 1868년의 세번째를 무진사옥, 1871년의 네번째를 신미사옥이라고 부르기도 하나 대원군에 의해 계속 추진된 것이므로 병인박해에 포함시키는 것이 통례다. 따라서 병인박해는 병인년(丙寅年)인 1866년 한 해의 박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 뒤 6년간에 걸친 박해를 모두 지칭한다. 그 6년 동안 우리의 미풍양속은 절멸 되다 시피했다. 그 통한의 6년, 그 의미는 과연 무엇 이었을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