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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實錄)소설>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82)

안동일 작

<중간 작가의 말  1.>

“어느 민족 누구게나 결단할 때 있나니… “

‘어느 민족 누구게나 결단 할때 있나니” 로 시작하는 찬송가가 있다. 예전에 가끔 교회(개신교)에 갔을 때 자주 들으면서  큰 울림을 느꼈던 노래다.   필자가 동포언론 기자 시절이던 1983년 겨울, 김대중 전대통령이 망명 아닌 망명으로 미국에 온 일이 있었다.  그때 뉴욕 스토니 포인트 기독교 수양관에서 작은 환영 집회가 있었는데 그날 이희호 여사가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찬송가 라면서 합창을 할것을 제안하면서 몃진 선창으로 좌중을 이끌었던 기억이 생생한 찬송가다.

그 가사에 보면  ‘참과 거짓 싸울 때에  어느 편에 설건가?  빛과 어둠 사이에서 선택하며 살리라  ‘ 라는 대목이 나온다.

지금, 2024년 세밑의 한국 상황이야 말로 우리 민족이 결단하고 선탹 할 때라는 생각이다. 결단이라 하면 상황을 놓고 구체적인 마음가짐이나 실천 사항을 염두에 둔 각오나 결정을 의미한다고 했을 때 조금 어울리지 않을 수 있기에 매우 중요한 순간이라고 할 수도 있다.
현직 대통령의 너무도 엉뚱하고 치졸한 친위 쿠데타 식의 비상계엄 발동과 해제를 놓고 일어난 작금의 혼돈 상황 때문이다. 지금 이를 슬기롭게 잘 넘기면 백년 대계가 마련 된다. 그러나 이를 잘 넘기지 못하고  혼돈 상황이 계속 된다면 민족 전체를 위해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나락으로 떨어질 가능성도 있다.

위기가 기회 라는 말이 있다.
그동안 우리에게는 여러 차례 위기라고 말할 수 있는 순간이 있었고 결과적으로는 이를 극복 했기에 오늘이 있을 수 있었다. 진부한 얘기지만 1950년대 전쟁의 폐허 속에서 세계 최 빈국이었던 나라가 10대 경제 강국에 들어 있는 지금의 상황은 거의 기적을 이룩했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무수한 문젯점, 특히 이념갈등, 여야의 극한 대립이라는 양극화 현상은 모두 혀를 차면서도 저도모르게 함몰돼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실록 소설이 그 문제, 그리고 그 해법에 천착 하고 있다는 얘기는 여러차례 전한 바 있다.
필자는 개인적으로는  이번 기회에 판을 새로 짜 전면적인 개헌을 통한 제 7 공화국 출범의 계기가  됐으면 하는  바람을 지니고 있지만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연목구어 일 듯 싶다.  7공화국 이라고 했는데 공화국의 순번은  헌법 체제의 커다란 변화가 있을때 새로운 번호를 부여 받는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 기억을 상기하기 위해 한국의 공화국 순서를 간략히 설명하면 이승만 자유당 정권이 제 1공화국, 장면 민주당 내각제 정권이 제 2공화국,  5.16 쿠데타이후 성립된 박정희 공화당 정권이 제 3 공화국, 그후 유신체제가 4공화국. 12.12 쿠데타와 5.18 광주 항쟁을 탄압하고 성립된 전두환 민정당 정권이  제 5공화국, 그 후 87년 6월 항쟁으로 직선제를 쟁취해 출범한 공화정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제6공화국이다.

따져 보면 지금의 6공화국이 가장 오렌 시일인  30여년을 지난 40년 가까이 존속 되고 있는 셈이다.   87 체제 라고도 불리우는 이번 공화국 헌법은 당시의 급한 상황에 따라 졸속으로 처리된 측면이 많다고 계속 지적돼 왔다.  제왕적 단임 대통령제의 폐해와 여야의 극한 대립, 특히 여소야대의 국면이 됐을 때의 문제점이 운위 되면서  이런 저런  개헌 논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를 실행하는 일은 녹록치 않았다.

그런 가운데 이번의 친위 쿠데타 사건이 87체제의 문제점과 우리 정치 지형의 모든 문제점이 극명하게 드러난 사건이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국민들의 평화로운 일상을 순식간에 얼어붙게 한 이번  심야의 계엄은,  민주주의를 수호하려는 대한민국 국민들의 용기와 국회의 일사불란한 대응으로  여섯시간 여만에 해제되었다. 여기에  우리 국민들은 평화로운 저항과 성숙한 시민의식으로 지구촌 어떠한 나라에서도 볼 수 없었던 놀라운 민주정신을 전개함으로써 일응 세계인의 찬사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나락으로 떨어질뻔한 국격을 극적으로 반전시켰다는 평을 받고 있다.

하지만 이후 벌어지는 상황은 목도 하듯이 다수 국민들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고 있는 듯 하다.  지금으로서는  탄핵이 제대로 끝맺음 될지도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오락가락 하는  여당의 행태야 그렇다 치더라도  꼴뚜기도 뛰고 망둥이도 뛴다고 눈치빠른  행정가로 여겼던  권한대행의 몽니가 권한대행의 권한대행 체제로 이어지면서 상황을 어둡게 하고 있다.  이들의 몽니는 정치적 유불리에 대한  치밀한 계산 끝에 작심하고 부리는 몽니다.  탄핵을 막아 보겠다, 적어도 시간을 최대한 끌어야 겠다는 이들의 몽니는 우리 국민들의 엄청나게 성장한 민주의식을 간과 하고 있기에 종국에는 해결될 것이지만   정치는 생물이고 변수는 도처에 도사리고 있다. 이를 어찌 할 것인가.  그래서 지금이 결단할 순간이라고 하는 것이다.

소설이 꼭 목적을 가지고 쓰는 것은 아니지만 이 역사 소설의 목적이 있다면 우리 조국 대한민국과 그에 속하는 내외 국민들이 과거의 역사를 반추해  더 낳은 세상을 만드겠다는 생각을  갖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서학,  천주교 신앙, 기독교 신앙과 정신은 그렇게 생각해야 할 근거와 가치가 충분히 지니고 있다.
필자는 이씨 조선이 망한 것은 여러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 했겠지만 그 중 큰 요인중 하나가  천주교를 탄압하는데 국력을 소진 하면서 모든 국가 제도와 미풍 양속이 절멸 됐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천주교를 탄압하고 신자들을 참수형에 처하는 일을 국사의 가장 큰 현안으로 두면서  이 땅에는 제대로 된 정치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사회 기강과 질서가 대번에 무너졌다.  그나마 서로 견제를 하던 사색당파 조차 사라지고 안동 김문, 풍양 조씨, 여흥 민씨의 족벌 세도정치로 이어지면서 과거제도는 유명 무실해져  매관매직이 판을 쳤고 조세 제도도 완전히 붕괴됐다.  목숨을 내걸고 임금께 직언을 하던 괸료, 사관은 자취를 감췄다. 임금이  따라다니지 말라면서 칼까지 겨눴다는 얘기를 실록에 썼던 그런 기개있는 사관들이 사라졌기에 철종 실록은 실록으로 쳐 주지도 않는다. 어릴 때 여름 방학 일기 숙제 처럼 ‘오늘 별일 없었음’ 한 줄로 일관 하기 때문이다.
18세기 말, 그리고  그 이전 이 땅에는 가난했지만 그래도 미풍 양속이 살아 있었고 이웃을 생각하는 정이 있었다.  그런데 천주교를 탄압하면서 서로 못 믿고 감시하는 사회가 된다.

여러분들 잘 아는 오가 작통법(五家作統法)이  본격적으로 실제 시행된 것이 바로 이때다. 오가작통제는   5가구를 한 통 으로 묶어 상호 감시를 통해 조세 은닉을 막고 강 절도를 방지하기 위해 고안돼 경국대전에도  수록돼 있다는데 한번도 제대로 시행된 적이 없었다. 세종 때 부터 시작해 단종조, 그리고 임란 이후 인조때 그리고 숙종때도 논의가 있었지만 고자질이라면 손사래를 치는 우리 민족의 습성상 제대로 시행될 수 없었단다.  그런데 유독 천주교도 색출에는 큰 효과를 발휘 했다. 같은 통에 속한 가구중 한 가구에서라도 천주교 신자가 나오면 모두를 극형으로 처벌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천주교인을 고발 하면 그 사람의 재산의 반을 밀고자에게 주었다.

천주교 박해는 1791년의 신해박해를 비롯하여 1801년의 신유박해, 1839년 기해박해, 1846년 병오박해, 1866년 병인박해 등 으로 이어져 근 100년 동안 지속됐다.  100년의 박해 시기 동안  수만에 이르는 천주교 신자들이 이 오가작통법에 의해  희생됐다. 갖가지 끔찍한 고문이 자행됐음은 불문가지다.

아무런 죄가 없는 사람들을 신앙을 가졌다는 이유로 처형했다.  천주교인이 전혀 정권에 위협이 되지 않았음에도 그토록 잔혹하게 그들을 탄압했고 씨를 말리려 했다. 무슨 역적 모의를 꾀 했다 던지 소요를 일으키려 했다면 애기가 다르겠지만 안동김씨와 풍양조씨 세도정권은 정치적 목적에 의해 천주교 탄압을 십분 이용했다.

오늘날 우리민족이 직면한 공동체,  사회의 문제점으로 지적되는  양극화와 상대방  악마화의 뿌리가 여기서 기원한다고도 할 수 있다.

조선의 천주교 탄압은 결과적으로 도끼로 제발등 찍는 격이 되어 체제와 국가 붕괴 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오게 된다. 마치 이번 한밤 게엄소동과 같다고나 할까.  제민족에게 총부리를 들이대는 정권은, 백성의 목숨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정권은  반드시 망하게 돼 있다.

조선 왕조가 처음부터 천주교를 금지하고 탄압헸던 것은 아니다.  그나마 계몽 군주로 꼽히는 정조는 “ 유학의 진흥에 의해 사학을 막을 수 있다 ” 면서 “사교(邪敎)는 자기자멸(自起自滅)할 것”이라면서  적극적 박해를 회피했다.  분주사건으로 불리우는 유교식 제사 기피로 촉발된 최초의 박해인 신해박해 때  목숨까지 희생된 이는 권일신을 위시해 3명 정도에 그쳤다.   남인 시파(時派)인  당시 실권 재상 채제공(蔡濟恭)의 묵인도 한몫 했었다.  그러나 정조(1800년)와 채제공(1799년)이 세상을 떠나자 정계의 주도세력이 노론 벽파(僻派)로 바뀌면서 박해가 일어나게 된다.

정순왕후 대왕대비 김씨가 어린 순조의 수렴청정을 하면서  집권 세력으로 떠오른 노론 벽파는 정적인 시파와 눈엣가시였던  남인 세력을 꺾기 위하여 대왕대비를 움직여 일대 정치적 공세를 취한다. 떠오르는 남인의 샛별 정약용과 이가환의 제거는 이들의 일차 목표 였다.

이들 벽파는 천주교를 아비와 임금을 모르는 무부무군(無父無君)의 멸륜지교(滅倫之敎)로 몰아붙여 탄압을 가했다.  1801년 신유년 1월 10일(음) 대왕대비는 박해령을 선포, 전국의 천주교도를 색출 하기 시작했다. 오가작통법을 동원한 수색에서 많은 교인들이 체포되었고 300여 명의 순교자(공식 기록 외에 민간 희생자 다수)가 생겼다.

이 신유박해의 대표적 순교자로는 최초의 도래 사제인 중국인 주문모 신부와  우리가 실펴 본 수표동 최초 대세의 주인공들인 초대 교회  지도급 신도들이 꼽힌다.  주신부는 한때 피신하였다가 스스로 의금부에 나타나 취조를 받은 뒤 새남터에서 군문효수(軍門梟首)되었다.   초기교회의 지도자 이승훈(李承薰)  정약종(丁若鍾)  홍낙민(洪樂敏) 최창현(崔昌顯) 을 비롯해· 강완숙(姜完 淑) · 최필공(崔必恭) · 홍교만(洪敎萬) · 김건순(金健淳) ·  등은 서소문 밖에서 참수(斬首)되었고,   지방교회 지도자인  내포의 사도 이존창(李存昌)은 공주에서, 전주교회의 지도자인  유항검(柳恒儉) · 관검(觀儉) 형제는 전주에서 순교했다. 너무도 안타까운 일이다.  이들의 순교, 특히 최초 셰례자 이승훈의 순교와 관련한 뒷 얘기는 후일 자세히 다룬다.

신유박해는 한국천주교회에 가해진 최초의 대대적인 박해로,  천주교단은 큰 타격을 받았다. 그러나 살아남은 교도들은 탄압을 피해 경기도의 야산지대나 강원도 충청도의 산간지방, 태백산맥 · 소백산맥의 심산유곡에 숨어, 신앙을 지키면서 끈질기게  전국적 확산을 꾀했다. 조선 천주교가 지식인 양반 중심에서 일반 백성, 중인 양인 중심으로 넘어가게 되는 계기이기도 했다. 1801년 신유 박해 이후 30여년 동안은 다행히도 박해가 잠잠했다.  대신 안동 김문의 가렴주구가 판을 쳤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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