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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實錄)소설>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81)

  안동일 작

 “어느 민족 누구게나 결단할 때 있나니… “

  방지거 사물락 권일신의 환시는 계속 됐다. 한창 기도 중에 깜빡 잠이 들어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런데 그런 꿈 속 같은 환시를 보고 있는 그에게  민족이란 단어가 또렷하게 왠지 뭉클한 느낌 가운데 가슴에 남아 있어 모든 장면이 그것과 연관되어 다가서는 것이었다.   백성이란 말보다 어쩐지  힘이 있고 친근한 감이 들었다. 족(族) 이라는 단어 때문이라라.  

 저 사슴들이 우리 민족, 조선 백성인 것만 같았다.  몸서리를 치면서 한참을 조선 산하를 날다보니 너무 멀리 날 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어 몸을 움추려 속력을 줄였다. 날은 어둑해 져가고 있었다. 어느 산골 마을이 보였다. 호로병 처럼 입구는 좁은데 안은 꽤 넓어 왠지 아늑하고 안전해 보였다.

 일신은 디딤발로 땅에 내려서 동리로 들어 섰다.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잠시 둘러보니 사람들은 마을 가운데 옹기 가마가 있는 커다란 집에 모여 있었다. 저들은 무슨 예식을 올리고 있었다. 방락은 대뜸 천주교 예배라고 생각 됐다.  확인할 수 는 없었지만 어쩐지 분위기가 그랬다. 반가운 마음에 그들에게 다가 갔지만 아무도 그에게 아는 체를 하지 않았다. 저들에게는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저들의 모습만 보일 뿐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십자고상을 찾았지만 고상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두손을 모은테 하며 느낌이 천주인들이었다.  아무튼 반가운 광경이기는 했지만 전혀 자신을 의식하지 않는 터에 더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한참을 주시하다 다시 하늘을 날았다. 

 산골 주막집에서 장정들이 엉켜 자고 있는 모습,  서당에서 학동들이 글을 읽고 있는 모습, 여인네들이 길쌈을 메고 있는 모습 등 이땅의 일상사 들이 밤낮 구분없이 스치고 지나 갔다.  

 돌연 아까와 같이 하얀 눈밭에  사슴들이 떼지어 도끼와 칼에 목이 잘려 죽어 가고 있는 모습이 다시 눈에 들어 왔다. 

이게 무슨 변고란 말인가, 이 민족을 어떻게 하나 걱정이 엄습 했지만 그 와중에도 곧 끝날 것 같다, 일시적인 한때의 변고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을 날다 보니 한양 도성에 도착했는데 한양 도성 앞에서 그리고 도성 출입이 가능했던 사대부 들이 궁궐 문 앞에서  땅을 치고 통곡하는 광경이 보였다. 국상이 났거나 사직이 절단 난 모양이었다. 

 그거 샘통이다. 싶어 더 알아보고 싶지 않았다. 조금 더 날다보니  저쪽에서 환호 작약 하고 있는 군중들의 모습이 보였다. 저들의 표정이 너무도 생생했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십자고상을 흔들고 있었다. 그리고 저들의 입성이 그렇게 깨끗하고 고울 수가 없었다.  그것 참 다행이다 싶어 하는데 몸은 점점 힘이 빠져 가고 있었다. 이대로 조금만 더 가면 추락 한다 싶은데 허공에서 음성이 들렸다.   

“세찌야 세찌야 너 어디에 있느냐”

세찌는 일신의 어릴적 아명이었다. 참으로 오랫만에 듣는 소리엿다.  부모님과 큰 형님 정도만 그렇게 불렀다. 

‘네 세찌 여기 있습니다. 천주 아버님’ 하고 대답하려는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도 근엄한 목소리는 그대로 계속 됐다. 

 “보았느냐?  내 저울에 너와  너의 민족, 백성들이 진작에 올라 와 있느니라 “

꿈결에도 저울에 들었다는 말이 무억을 뜻하는지 묻고 싶었지만 왠지 그래서는 안될 것 같아 ‘감사합나다 천주 아버님.’ 이라고만 하려 했는데 그말 역시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주춤하는 사이 그의 몸은 땅으로 떨어졌고, 죽었구나 싶은데 땅에 다다르자 속도가 확 죽어 사뿐히 땅에 설 수가 있었다.  잰 걸음으로 탄력을 죽이면서 돌아보니  자신은 다시 양근 뚝방 길에 있었고 돌연 환시가 사라졌다. 

 일신은 무릎위에 깍지 끼고 있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 보면서 휴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이날  이후의 조선땅의 모습을 예견한 예지몽을 꾸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환난은 있었지만 환호 작약하는 기쁨의 끝맺음 이었다는 생각이 들어 “천주 아버님 감사합니다” 를 연발했다.  옆사람들은 저마다의 기도에 계속 열심이었다. 

 이날 방지거 뿐만 아니라 세례를 받은 모든 이 들이 민족을 위해 기도했다. 자신의 안위는 뒷전이었다. 이존창 같은 천민 출신과 김범우 최창현 같은 중인 출신들이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서러워 했지만 자신 개인만의 탈출이 아니라  계급 제도 전반을 고쳐야 한다는 각오와 천주의 가피를 기도 했다.  자신만 천국에 들게 해달라는 이기적인 부탁의 기도는 언감생심 나오지 않았다.  

 사실 오늘날 천주교에서는 민족을 강조 하지 않는다. 모든 민족이 천주 안에서 평등하다는 논리를 견지 한다. 아브라함을 선조로 하는 유대민족이 구약에서 선택 받은 민족이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예수가 나와서 땅끝 까지 가서 모든 민족에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한 이후에는 그런 경계가 없어 졌다는 것이다.  구약을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두 ‘인종’ 집단으로 나누었는데 바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다. 성서학자들은 유대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이방 나라들을 섬기는 제사장 나라가 되는 것이었단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그런 나라가 되는 대신에  자신들만이 선탹 받았다 교만해져서 이방 민족들을 멸시했다고 나온다. 

 오늘날 다수의 주류 기독교 학자들과 성직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적대감을 낳는 막힌 담을 헐어 내고 잘못된  분리를 종식시켰기에   모든 형태의 인종 차별과 편견과 멸시는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업적에 모욕이 된다” 고 강조하고 있다.   하느(나)님이 공평하시고 우리를 공정하게 사랑하신다면, 우리도 똑 같은 높은 기준으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해야 한다는 얘기다.   

 하지만 개별 민족의 상황안에  들어오면 저마다 자신들이 하늘에 의해 특별한 은총과 사랑을 받고 있다는 얘기를 자주 한다. 이는 나쁠것은 없다. 그것은 일종의 우월감일 수도 있겠지만 책임감으로 받아들여  더 신실하고 모범적으로 하늘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봉사 한다면 천주교 나아가 기독교 전체를  위해서도 나쁜 일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하늘에 의해 선택 됐고 특별한 이쁨을 받는다고 생각 하는 것은 마치 형제가 많은 집에서 자신이 부모님의 사랑을 특별히 많이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장남이나 막내가 갖는 생각과 같은  것이라고 해도 틀린말이 아니다.  그것을 이용해 주관적으로 기정사실화 하고 전횡한다거나 다른 형제들의 당연한 권리를 빼았는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세상의 그런정도의  불평등은 형제로서 감수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이다.

우리 한국 기독교에 그런 성향 경향이 강하다. 하늘이 특히 우리 한민족을 생각하고 계신다는 얘기를 자주 듣는다.  세계 최고로 가난했고 문제 투성이의 나라에서 이만큼 발전한 것은 하나님의 섭리 말고는 해석하기가 너무도 힘들다는 얘기다.  힘들다기 보다는 그렇게 치부하면 편한 까닭도 있다. 운이 따랐다는 얘기 보다 하늘의 뜻이라고 하면 뭔가 더 있어 보이지 않는가.

실제 1784년 수표동 이벽의 집에서 조선 최초의 세례식을 거행했던 좌중은 모두 천주교 탄압에 희생양이 된다. 자신의 천당행 보다는 민족의 활로를 헤쳐 보려 했던 선각자들, 그들의 희생은 역시 하늘의 뜻이었고 그들의 정신은 그후 면면히 이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당시  간신히 목숨을 부지했던 이는 정약전 정약용 두 사람 뿐이다. 이 또한 이 민족을 생각하는 하늘의 뜻이 아니었나 라고 필자는 생각 한다.

이 대목에서, 천주교와 우리 민족, 나아가 기독교와 한민족이  얘기 되는 이 시점에서 이처럼 저자가 나서는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다.  필자가 지금 나서려는 것은 작금 우리 민족이 처한  상황이 너무도 중차대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얘기를 잠깐 하려 한다. 중간 저자의 말이라고나 할까. 사실 이번 연재를 두고 많은 독자들이 뭐 이리 복잡하고 장황하냐는 얘기가 많았다. 이점에 대한 설명도 할겸…(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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