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일 작
“어느 민족 누구게나 결단할 때 있나니… “
홍낙민 루가는 이땅의 유자들이 하늘처럼 떠받들고 있던 이 나라 유학이 얼마나 잘못된 길을 흘러 왔는지에 대해 열을 올려 가며 설명했다.
“천주님, 유학은 건방진 학문이었고 거만한 학문이었습니다.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이 모든것을 다 할 수 있다며 자신 스스로 하늘에 이르겠다고 엄청난 제의를 만들어 냈습니다. 그결과는 무엇 입니까? 사람 위에 사람이 군림하는 그리고 전횡하는 기이한 세상을 만들어 냈습니다. 천주 성부 께서는 이제 천주님의 가르침을 모르고 죽어가는 사상에 매달려 왔던 저희 잘못을 꾸짖어 주시고 새길을 열여 주셨습니다. 이 밝고 명징한 가르침은 미혹에 빠져 있던 저희에게 등불로 다가서 있습니다. 이 등불을 횃불로 삼아 세상을 밝히겠습니다.”
” 위로는 이 나라 주상 에서부터 조정신료, 재야의 유자 선비들 그리고 만 백성에게 이 가르침을 전하겠습니다. 그길이 험난한 역경일지라도 굳세게 달려 나가겠습니다. 천주 성부님, 이런 서원을 세운 우리에게 가피를 내려 주십시오, 드릴 밀씀 많지만 지금은 일단 여기서 그치겠습니다. 천주의 성부님 부디 우리를 굽어 살펴 주시옵소서, 이 모든 말씀 야소 기리스도를 통하여 올렸습니다. 아문”
낙민 루가는 실제로 세례 이후 자신의 기도대로 관문에 들어 조정 신료들 사이에 천주학을 알리는데 힘을 쏟았다. 거유 홍유한의 조카였던 낙민은 세례 받을 당시 초시에 합격한 진사였다. 그는 몇년 뒤인 1788년 대과에 응시했고 급제해 관직에 들었던 것이다.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과 이조 전랑(銓郞),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 등을 역임하면서 천주 신앙인이 어떻게 관직을 수행하는지 모범을 보였다. 기록에 따르면 그때 그는 가성직 제도하 신부의 한 사람 이기도 했다. 말하자면 조정에 잠입한 암행신부였던 셈이다.
그는 1791년 신해박해(辛亥迫害) 가 발발한 뒤, 임금(정조)의 명령에 따라 잠시 신앙을 멀리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으나, 집안에서는 기도생활과 천주교의 교리에 따른 생활을 지속했다. 99년 모친상을 당했을 때는 신주를 들이지 않았다.
신앙생활을 하는 노비들은 대가 없이 양인으로 풀어 주었고, 가난한 이웃을 돌보는 일에도 힘을 쏟아 이존창과 함께 내포 지역의 집단적 입교를 이루는 데 크게 기여했다. 후일 심문관 들은 그를 “사학도의 와주(窩主)요 종장(宗匠)”이라고 묘사하기도 했다.
그나마 버팀목이었던 정조가 세상을 떠난 뒤 1801년(순조 1) 신유박해가 시작되고, 그해 2월에 체포된 홍낙민은 의금부로 끌려가 심한 문초를 받아야 했다. 이 과정에서 옛 동료 관원들의 탄원으로 일단 유배형을 선고받았지만 이후에도 천주학 동료들을 밀고 하라는 문초를 계속하는 심문과들의 닥달에 굴하지 않으면서 믿음을 강하게 표시했다. 결국 사형선고가 내려져 얼마 후인 2월 26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에 처해져 순교 했다. 당시 그의 나이 51세였다.
“제가 지난 날에 한 모든 것은 목숨을 비겁하게 보전하려는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제 또 매질을 당하고 망신을 당하니 저는 마음속에 있는 말을 전부 솔직하게 말씀드리고 용감하게 죽고자 합니다. 제가 섬기는 천주는 하늘과 땅과 천신과 사람과 만물의 주재자이십니다. 이마두와 다른 선교사들은 우러러 볼만한 도리와 성덕을 가진 사람들이며, 그들의 말은 모두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지금 천주를 위하여 죽고 그렇게 함으로써 천주교 신앙의 진리를 증거하고자 합니다”
홍낙민의 진술에 관원들은 경악했다, 이 소식을 들은 정순왕후(貞純王后)는 그에게 더욱 혹독한 고문을 가하라 명했다. 극심한 매질을 당하고 옥으로 끌려간 홍낙민은 상처에서 흐르는 피를 씻으며 “이제 나는 행복하고 마음이 편안하다”고 말했다. <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
마지막 이었던 홍낙민 까지 기도를 마치자 잠시 정적이 흘렀다.
광암이 앉아 있던 채로 입을 열었다.
“우리 성도님들의 기도가 정말 대단합니다. 기도는 이렇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 됩니다. 오늘 우리의 기도는 분명히 하늘에 닿았을 겁니다. 아니 천주님이 이곳에 강림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루카 형님의 말처럼 아쉬움이 많이 남지 않으십니까? 이 말씀은 꼭 올려야 했을 텐데 정신 없이 엉뚱한 말씀만 올렸구나 싶으시죠? 저도 그렀습니다. 아무래도 짧게들 하셨을 테니 잠시 시간을 갖고 각자 못 다 올린 말씀 올리도록 합시다. 소리가 나오면 소리를 내어도 좋을 듯 싶습니다.”
이렇게 해서 조선 기독교의 특장이 되는 통성기도가 시작 됐던 것이다.
일동은 처음에는 조용히 기도를 시작했지만 곧 중얼 거리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고 거의 모두가 소리내서 기도를 했다. 사실 작게 라도 소리 내지 않으면 기도가 잘 이어지지 않기는 하다.
갑자기 벼락 떨어지는 소리처럼 “천주여” 하는 고함이 터져 나왔다. 이존창으로 부터였다.
“천주여, 천주여 당신 께서는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고 하셨는데 정말이십니까? 이 천한 단원이도 자유로울 수 있습니까?”존창은 고함치듯 이말을 내뱉았다. 천민의 설움은 그에게 그토록 컸던 모양이다. 이존창은 이자리에서 유일한 천민 출신이었다. 그의 부친은 선한 주인을 만나 속량된 노비였다. 종의 아들이라는 얘기다. 일천즉천 부모 중 한사람이라도 노비면 그들의 자식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노비가 돼야 했던 시절 너무도 다행한 일이었다.
아비의 속량이 그가 태어나기 전에 이루었졌는지 태어난 후였는지는 확인되지 않지만 어쨌든 영민한 이존창은 어려서부터 귀동냥으로 글과 시를 깨우쳤고 또 천성이 부지런해 젊어서 부터 아비를 도와 꽤 알찬 부도 일궜다. 하지만 천민의 딱지는 늘 그를 따라다니는 낙인이었다. 그가 녹암 사숙에 들게 된 것은 같은 내포 출신인 홍낙민에 천거에 의해서 였다. 존창은 처음에 와서도 마당쓰는 일을 하겠으니 귀동냥만 하게 해달라고 했었다. 그의 영민함을 본 직암이 글방에 오르게 했지만 그는 나이를 속여 가면서 굳은 일을 도맡아 했다. 몸에 벤 평소의 눈치대로 그는 자신이 다른 학도들보다 나이가 많으면 아무래도 불편 하다면서 그랬던 것이다.
통성기도가 진행 되던 84년 그 당시 까지도 홍낙민을 제외한 모든 좌중이 존창을 정약전과 동갑인 59년생으로 알고 있었는데 실은 그는 이보다 일곱살 이나 많은 52년 생이었다. 천주교 공식 기록에는 아직도 59년 생으로 돼 있고 후일 만든 집안 족보에는 52년 생으로 돼 있다.
루도 곤자가 이존창이 이날 “야소의 진리를 믿으면 자신같은 천민에게도 자유가 있냐”고 울부 짖으며 물었던 질문에 천주는 확실하게 응답을 한다.
이존창이야 말로 오대 성조 버금가는 조선 천주교의 비조라 할 수 있다. 이날 이후 이존창에 의해 내포 지역인 덕산, 홍주, 예산, 청양이 천주교로 물들어 갔다는 이야기는 이미 여러차례 전 한 바 있다. 많은 양반 자제들이 이존창에게 천주학을 배웠는데, 더 놀라운 것은 참판 조경진이 이존창의 딸을 며느리로 받아들인 일이다. 면천된 노비의 딸이 명문 대갓집의 며느리가 된 것이다. 홍낙민의 주선으로 이루어진 일이라고 했다.
이토록 놀라운 일이 천주 안에서 실제로 일어나자, 조선의 수많은 양민 천민 들이 요원의 불길처럼 천주교로 몰려들었던 것이다.
그무렵 충청도 관찰사가 정조에게 보고한 문서에서 이런 내용이 있다.
“사학을 본받아 배우는 노비에게는 그 노비 문서를 불태우고 대가 없이 양민으로 놓아주었고, 사학을 따르는 이웃에게는 그 곤궁함을 불쌍히 여겨 옷과 양식을 마련해주었답니다. 이로 말미암아 가까운 데서부터 먼 데까지 이 말을 들은 자들이 문득 기뻐하였답니다.”
지금까지 본 적도 없고, 상상해 본 일도 없는 일 이었다. 이런 일이 입소문을 타고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노비 신분에서 자유, 차별을 떠난 평등이 실제로 일어났던 것이다. 야소의 진리는 는 자유를 의미한다는 것이 조선 땅에 천주교를 통해, 천민 출신 이존창을 통해 나타난 것이다. 조선 최초의 신학생이었고 신부가 된 김대건과 최양업이 모두 그의 딸 쪽 집안 슬하라는 얘기도 이미 전한 바 있다.
존창 루도비의 고함에 좌중은 잠시 멈칫 했지만 이내 자신들의 기도에 다시 몰두 했다. 이후로는 저마다 옆사람에게 뒤질 세라 소리를 냈다.
더러는 ‘야소 마리아’ ‘야소 마리아’를 주문처럼 계속 되뇌이기도 했지만 대개는 좀 전에 했던 기도의 내용을 더 심화시켜 올리고 있었다.
방락 일신은 조금전에 확실히 체득한 민족이라는 단어에 꽂혀 “이 민족을 굼어 살펴 달라는 기도를 간절히 올렸다.
“천주여 이 민족을 굽어 살피소서”
두손의 까지를 아플정도로 꼭 끼고 머리를 위아래로 흔들면서 간절한 기도를 올렸다.
그때 눈앞이 환해 지면서 어떤 장면이 펼쳐졌다. 자신이 동섬과 가환과 함께 남한강 어망을 어깨에 잚어지고 뚝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지난해 천렵때의 추억이 이어진는 것이다,.
돌연 그 뚝방길이 기화 요초가 만발한 아름다운 곳으로 변했다. 감탄하며 둘러 보는데 목이 심하게 말랐다.
꽃 밭 사이로 졸졸 흐르는 옆 실개천 시냇물은 그냥 손으로 떠 먹어도 좋았기에 두손으로 퍼서 먹엇다. 하지만 갈증을 없애기에는 부족했다.
그래도 선경에 들었다는 기쁨을 맛볼 수는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갑자기 바람이 불더니 점점 심해졌고 눈바이 날리더니 들판은 이내 눈밭으로 변했다.
그러더니 눈밭에 사슴들이 나타나 노닐기 시작했다. 춥기는 했지만 광경은 아름다왔다. 그런데 또 갑자기 화살이 날이오고 시퍼런 칼과 도끼가 날아 오면서 사슴들이 처참하게 죽어 가는 장면이 펼쳐졌다.
너무도 끔찍 했다.
일신은 이 광경이 너무 보기 싫어서 몸을 돌렸다. 뒷쪽으로 달아 나려 했던 것이다. 그런 데 이게 왠일인가 자신이 하늘을 날고 있는 것이 아닌가. 처음에는 달리기만 하려고 했는데 발을 땅에 딛자 몸이 떠졌다. 몸을 움추리고 펴는 데서 속도가 붙었고 머리 움직임, 손짓으로 방향이 바뀌어 졌다. 한참을 날았다.
수풀이며 마을 등 아래 경치가 휙휙 지나기는 했지만 자꾸 계속 해서 하얀 눈밭에 사슴들이 떼지어 죽어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 왔다. 사슴 학살이 여기저기서 계속 되고 있었던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