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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實錄)소설>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77)

 안동일 작

“저는 죄인 입니다, 자신의 명예와 안위만을 추구해 왔습니다.”

첫날 직암의 셰레에 이어 이틑날 오전에는 이존창과 김범우에 대한 세례식이 있었고 오후에는 홍낙민 정약전 정약용 최창현에 대한 세례식이 거행됐다. 그때 세례식이 이처럼 이틀에 걸쳐 세번으로 나뉘어 거행된 것은 대부를 맡을 사람이 될 수 있으면 세례를 받은 신자가 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에 따른 것이었고 또 .세례자에 대한 최소한의 교리 문답을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하기 위함이었다.

전날 세례를 받아 천주인으로 다시 태어난  사백력 권일신은 이틑날 오전 세레식 에서는 내포 이존창의 대부를 맡았고 그와 나란히 서서 같이 세례를 받은 김범우의 대부는  요안 세자 이벽이 다시 맡았다.

세번째 세례식은 4명이 함께 받았는데 권일신은 다시 홍낙민의 대부가 되었고, 정약전은 이벽이, 정약용은 김범우가, 최창현은 이존창이 대부를 맡았다.

이날 세례식에서 가장 강조된 것이 역시 사도신조와 4대 교리였다.
이날 집전자 승훈은 문답식으로 사도신조와 사대교리에 대한 세례자의 이해를 확인 했다. 직암에게는 마귀의 유혹을 끊겠나고 포괄적으로 물었지만 이튿날 아침 부터는 교의를 구체적으로 확인 했던 것이다.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까?”
승훈이 우리말로 물었고 나란히 선 셰례자들은 힘차게 대답했다.
“예, 믿습니다.”
“ 그 외아들 우리 주, 야소 기리스도님 께서 동정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고난을 받으시고 묻히셨으며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성부 오른편에 앉아 계심을 믿습니까?”
“예, 믿습니다.”
“성신을 믿으며 거룩하고 보편된 교회와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 죄의 용서와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영원한 삶을 믿습니까?”
“예, 믿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천주 상제의 심판을 받아야 하는데. 천주는 선을 행한 사람에게는 상으로 갚아주시지만, 악을 행한 사람에게는 벌을 내리신다는 상선벌악(賞善罰惡) 의 가르침을 믿습니까?”
“예, 믿습니다.”

문답이 끝나을 때  승훈은 이를 정리한 내용을 강론식으로 짧게 설파 했다. 전날 일신과 광암과 함께 고민해서 정리한 내용이었다.
“이것이 우리의 천주 신앙이며 공통체 교회의 신앙입니다. 우리 주 야소 기리스도 안에서 이 신앙을 고백하는 것은 우리의 영광입니다. 복음의 표현에 따라, 천주 상제의 아들이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시고자 인간 본성을 취하신 일을 ‘강생’(降生)이라고 부릅니다. 바오로 사도를 위시한 초대 교회 성원들은 이 강생의 신비를 전파하기 위해 땅끝까지 전교의 길을 떠났습니다.”

“기리스도 야소께서 지녔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 그분 께서는 천주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천주와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교회는 이처럼 낮은곳에서 순종하는 자들의 요람입니다.”

세례자들은 손모은 고개 숙임과 십자 성호로  답례 했고 이어 본 셰례인 물 부음 의식이 차례로 거행됐다. 대부들에게는 직암 때와 같이 세례자를 끝까지 후원하며 함께 가겠냐고  같은 질문을 던졌다.

물 부음 의식이 끝난 뒤,  집전자는 대부들에 의해 깨끗한 수건으로 닦여진 세례자들의 이마에 축성된 기름을 십자가 형상으로 발라 주었다. 이는 세례 받은 이가 이제 교회 활동에 참여해 기리스도와 함께 할 자격을 얻었음을 의미했다.

이날의 행사를 위해 참가자들은 전날 이벽의 집에서 합숙을 하면서 공부와 토론을 행했다.
이벽의 부인 안동 권씨가 지극정성의 수고를 해야 했다. 안방과 사랑방을 모두 내주어야 했고 소찬이지만 삼시 세끼를 정성껏 마련했다. 그녀는 권일신 형제들과 같은 항렬의 먼 친척이었다. 일신은 광암의 부인을 종매 라고 불렀다. 앞서 잠깐 언급했지만 그녀의 천주 신앙도 대단해 남편 광암이 세상을 떠난 후에 ‘류한당 언행실록’ 이라는 언문 천주학 규범서를 쓰기도 했다. 류한당은 그녀의 당호다
이책은 1795년 발간 됐는데 녹암 권철신이 서문을 썼고 정약종 아오스딩이 필사해 배포했다. 1795년 이기에 직암 권철신이 희생된 이후다.   이 저술에는 유교적 이상 윤리를 추구하는 전통적 유교의식과 천주의 가르침의 구현을  목적으로 하는 종교적 서학의식이 교직돼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남녀평등이라는 수평관계를 주창한 천주학의 여성의식과 평등교육관이 담겨 있어 당시로서는 매우 진보적인 초기 여류 천주교도들의 의식이 담겨져있다는 높은 평가를 받는 저술이다.

다시 언급 하지만 당시 초기 천주학 공동체는 학연 혈연으로 뭉쳐 있었다. 대부분 성호 이익을 종주로 하는 남인 실학파 문중이었고 구체적으로는 철신의 제자들이었다. 혈연적으로는 이승훈과 정씨 형제들은 처남 매부, 정씨 형제들과 이벽은 어머니와 같았던 형수의 동생인 가까운 사돈, 후일 진산 사건을 야기하게 되는 윤지충과 정씨 형제는 이종 사촌; 윤지충과과 권일신 형제들은 고종 사촌이 었고  유항검 역시 권씨 형제의 외가 친척이다.

아무튼 마지막 강학이라 할 수 있는 이날 수표동 이벽 사랑방  공부에서   역시 문제가 된 것은 세례시 확인될  4대 교리에서의  삼위일체 론과  천주강생의 논리였다. 직암, 광암, 동섬과의 토론에서도 게속 문제시 됐던 사안이다.
천주 상제는 무(無)로부터 영원까지 언제나 항상 계시며, 이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완전하고 무한한 유일신이라는 천주존재론과 착한 이는 상 받고 악한 일은 벌 받는다는 상선 벌악론은 상대적으로 문제가 거의  없었다.

토론과 공부가 계속되다 잠깐 휴식을 취하기로 해서 직암이 뒷마당에 나와 바람을 쐬는데 정약종이 심각한 표정으로 다가 왔다.
“종이, 무슨일인가?”  종이는 약종의 일종의 자 였다. 다른 형제들은 천전(약전)  미수 또는 귀농(약용) 이라는 그럴듯한 자를 쓰고 있었지만 약종은 그저 종이로 불렸다.
“숙사, 저는 천주 강생과 동정잉태에 대해 아직 가슴속 깊은 확신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럴테지 실은 나도 그렇다네”
그러면서 직암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신앙으로 승화 하려면 그런 신비적인 요소가 있어야 한다하지 않던가?, 그리고 바로 그것 때문에 천주학이 끈질긴 생명력을 지니고 천 팔백년 가까이 발전해 왔다고 하지 않던가?”
“그렇기는 해도 저로서는…”

“야소의 탄생과 죽음에 우리가 이해 하지 못할 큰 일이 있었던 것은 틀림없다고 자네 동생 귀농도 좀 전에 그러지 않던가, 그러지 않았으면 회피하던 열두 제자들이 그렇게 목숨을 걸고 나설수 있었겠느냐고…”
정약용은 역시 영민했다. 성균관에 일이 있어 직암의 세례에는 참석 하지 못했던 약용은 밤늦게 공학 시간에는 참석했고 그의 이 한마디는 사람들의 의구를 크게 해소하게 했다.  약종은 둣째 날 형들과 함께 세례를 받기로 했었다.  3형제 에서 뿐 아니라 세례 받는 이들의 막내이기도 했다.

약용이 직접 문하에 들지 못해 약종은 성호 이익의 막내 제자이기도 했다. 성호 슬하에서 성리학을 공부할 때는 실사구시의 양명학에 큰 관심을 두었었고 그 후 한때는 주역과 도교에 심취해  매우 열심히 연구하기도 했다는 것을 직암도 알고 있었다.  천성이 곧고 모든 일에 정성을 다하는 성품을 지닌 그를 직암은 진작부터 눈여겨 보면서 아꼈다.  같은 셋째 라는 공통점도 있었다. 직암은 덜했다고는 하지만 약종은 워낙에 뛰어난 두 귀재를 위 아래 형제로 두고 있어 위에서 눌리고 밑에서 치받히는 중간의 서러움을 내내 겪는 듯 했기에 더욱 그랬다.
“ 그래도 확신이 서지 않는 마당에 세례를 받는 다는 것은 무리일듯 싶습니다.”
말은 상의조로 하고 있지만 꽤 깊은 고민을 했고 결론을 낸 모양이라고 짐작 됐다.
직암은 그의 뜻을 존중해 주기로 했다.
“그렇다면 내일 세례 행사에 자네는 빠지도록 하세나. 대신 크게 떠벌일 일은 아니니 조용히 있으면서 참례만 하게나, 다른이들 이라고 해서 확신이 서고 자신이 있어 의기양양 세례를 받는 것이 아닐테니…”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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