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일 작
“천주의 가르침은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믿어야 할 신비”
“공사상과 연기사상이라는 철학을 가르치고 있는 불교에서 근기 낮은 아녀자들이 관세음 불을 염호 하면 환난을 면하고 아미타불을 염호 하면 망자가 극락에 간다고 믿으며 간절히 기도 하는 것을 놓고 미신 행위라고 하지는 않지 않는가? 천주학도 마찬 가지라고 생각 했다네, 죄악에 뻐져있는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기위해 야소가 동정잉태 되었고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치다 탄압을 받아 죽음에 이르었고 그리고 다시 살아나 부활했다는 것 그것은 결코 미신이 아니라고 생각 하네, 신자들의 믿음이지. 그것이 사실이냐 아니냐를 따진다는 것은 부질없는 일일 수 밖에 없지. ”
공(空)이란 인간을 포함한 일체 만물에 고정 불변하는 실체가 없다는 사상을 가리키는 불교 교리이다.연기(緣起)는 부처님께서 깨달으셨던 진리,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다는 인과론과 인연론을 말한다. 대승불교의 지혜, 반야는 공(空)이 바로 연기라는 진리를 올바르게 밝혀낸 논리라고 대승불교는 설파하면서도 관음사상과 아미타 사상을 차용, 통섭했다. 조선의 한다 하는 유자들은 불가의 이 가르침을 백안시 하지 않았다.
광암의 표정이 밝아졌다. 광암을 고무 하는 동섬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예수의 행적을 아주 높이 평가하고 있네, 그의 철환은 공자와 맹자와의 그것과는 또다른 민초들을 위한 행보 아니었던가. 공맹이 권력자 임금들을 만나기 위해 주유 했다면 야소는 헐벗고 굶주린 민초들을 찾아 병을 고쳐주고 안심을 던져주는 철환을 지속 하지 않았던가, 그의 모든 행적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경전이 아직 우리에게 모두 전해지지 않은 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철환(撤還)이라는 어려운 단어를 썼지만 그 내용, 야소의 행적에 대한 동섬의 평가는 참으로 직암의 가슴에 와 닿았다. “민초들을 찾아 병을 고쳐주고 안심을 더져 주었다”고 하지 않는가. 광암이 나섰다.
” 그렇습니다. 천주학은 만인구원이라는 능동성을 가지고 온 백성을 차별없이 배려하는 박애. 이타의 삶과 행동을 강조하는 가르침입니다. 개인주의보다 공동체적 책임감에 많은 초점을 두고 있지요. 거기에 천주학의 공동 구원의 길이 있는 것입니다. ”
야소의 철환을 구원의 일환으로 보는 광암의 구원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 천주학의 구원 교리를 보면 우리는 “진노”, 즉 천주님의 죄에 대한 심판으로부터 구원을 받습니다 . 우리의 죄가 우리를 천주님으로부터 분리시켰고, 그 결과로 인하여 죽음에 이르렀습니다 구원은 죄의 결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는 것을 말하며, 더 나아가 죄의 제거를 포함합니다. 천주님은 야소 기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특별히, 야소 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수덕서 들은 구원이 천주의 은혜이며 거저 주시는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오직 여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만을 통해 구원 받을 수 있음을 분명하게 말합니다. 우리는 주 예수님을 온전히 믿어야 합니다. 숙사의 말씀대로 그것이 이해 되느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은 부질없는 일일 수 밖에 없습니다. ”
구원은 천주학의 중요한 근본 교리다. 구원이라 하면 일반적으로 어떤 위험한 상황에서 구출되거나 속박에서 해방된다는 뜻이다. 속박이나 위험이 전제 돼야 하는 것이다. 천주학에서는 원죄를 가장 큰 속박으로 상정하고 있었다.
직암은 기독교는 만인구원이라는 확장성과 능동성을 가지고 타인을 배려하는 공동체적 삶을 강조하는 가르침이라는 점에 이끌려 천주학에 빠져 들었다는 것은 설명한 바 있다.
그런데 사실 원죄에 대해서는 의문이 많았다. 사람은 태어나면서 부터 죄인인 까닭은 태초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 때문이라고 했는데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물론 따져보면 살면서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나 생각하고 인정 하자 하면서도 그랬다. 그때 까지는 동섬처럼 상징적인 서사라고 이해하기로 했지만 천주학을 처음 접하게 되는 후학들에게 이를 설명 할때 무언가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이날 동섬의 해석에 그런 아쉬움이 해소 되면서 큰 깨달음을 얻게 됐다.
“천주학의 서사 가운데 가장 뛰어난 부분이 나는 원죄론을 얘기한 인류 조상의 설화 라고 생각한다네 세상이 선하고 전능한 천주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하는데 인간을 창조하면서 천주는 인간이 세상을 살면서 겪게 될 온갖 고통과 불행을 내다보시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이해 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선악과를 만들었다는 것도 그렇고… 그렇다면 하나님은 원죄에도 책임이 있는 것 아닌가 ?”
” 그래서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시고 자신 독생자라는 극적인 표현을 빌어 스스로 하생해 그 실수를 만회한것 아닌가, 원죄야 말로 천주와 인간이 함께 풀어야 할 숙제였다는 말 일세, 이 서사가 정말 기막히게 절묘하지 않은가. 누가 만든 이야기라면, 이 서사를 사람이 만들었다면 그야 말로 천재가 아닐 수 없다네. 이런 천재가 만든 가르침이라면 따를만 하겠다 싶었던 것이야.”
광암의 표정이 떠다시 찌푸러 졌지만 직암은 동섬의 이야기를 재촉했다.
“그 후에 나오는 서사들도 천상적인 신비한 이야기와 기적, 그리고 지극히 인간적이고 사소한 일까지 번갈아 묘사하면서 교훈을 던지고 있지 않은가? 내가 또 무릎을 크게 한번 쳤던 이야기가 있는데 바로 여리살림(에루살렘) 교외의 무화과 나무 이야기일세 , 자네들 알고 있겠지?”
광암은 심드렁 고개를 끄덕 였지만 직암은 그 내용을 몰랐다.
광암이 들려준 그 내막은 다음과 같다. 성교요지에 들어 있다고 했다. “시장기를 느낀 야소 께서 멀리 서 있는 이파리 무성한 무화과를 보시고 먹을 것이 있을까 하고 그리로 가셨다. 무화과수에 가보니 아직 열매 맺을 때가 되지 않아 잎사귀 외엔 아무것도 없음을 아시게 되었다. 그때 야소께서 나무에 이르기를 ‘지금부터 영원히 아무도 네 열매를 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백다록(베드로)이 야소께 말씀드리기를 ‘주여, 주께서 꾸짖은 저 무화과수를 보소서, 시들어버렸나이다.’ 라고 하였다.”
듣고 보니 그랬다. 야소에게도 이런 측면이 있는가 싶은 얘기였다. 무화과가 열릴 철도 아니데 나무를 탓하다니 말이다.
” 내가 볼 때 흥미있는 사실이 또 있는데 그것은 천국과 구원을 게속 설파해야 할 야소가 지옥을 믿고 있었고 그렇게 강조 했다는 점일세, 나는 누구든지 진정으로 깊은 자비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영원한 형벌 따위를 믿을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교독서에 그려진 대로라면 야소는 자신의 설교에 귀 기울이려 하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 분노를 터뜨리며 지옥에 빠질것이라고 하는 대목이 수차례 있는데 이 또한 천주 교덕서를 쓴 사람들의 절묘한 안배라고 생각하고 있네.”
광암의 표정에는 상관치 않고 동섬의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 갔다.
” 이러한 태도는 범인 들에게서는 보기 드문 것도 아니지만 훌륭한 성인이 그런다는 것은 어쩐지 품위에 어울리지 않지 않은가. 평소의 야소는 자기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매우 부드럽고 점잖았음을 보였는데 이대목에서는 격분하고 있네, 이것 말고도 여리살림 성전에서 환전상들에게 채찍을 휘두르고 그들의 매대를 뒤 엎었다는 장면도 마찬가지 일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