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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實錄)소설>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62)

안동일 작

“기리에 엘레이손 (자비를 베푸소서)”

마부 신분이었던 윤유일 바오로는 상전들의 채근으로 9일 기도에 전부 참여할 수는 없었지만 애써 시간을 내 거의 매일 같이 기도에 참례 했다. 기도는 따로 시간을 갖고 올리는 것이아니라 북경 내 네 성당에서 같은 시간 오전 에배 때 특별히 시간을 할애해 같은 기도문을 봉송하고 간절한 기도를 올렸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에게 간절한 기도를 올리면서 윤유일은 스승 권일신의 자천 세례명이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라는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을 다시금 해야 했다.

프란치(시)스코라는 세례명이 많기 때문에 이경우 하비에르를 꼭 붙혀야 한다. 하비에르 성인은 전교의 성인 이다. 전교, 특히 아시아 선교를 개척한 예수회 사제다.
그는 1506년 4월 7일 스페인의 하비에르에서  귀족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1552년 11월 46세의 나이로 선종했다. 그는 예수회 창립 멤버의 한 사람이다. 예수회는 14세기 종교개혁 운동이 일어나 가톨릭이 개신교와 갈등을 빗던 무렵, 군대식의 규율과 조직으로 개신교에 대항해 교회를 지킨다는 취지로 결성된 천주교 수사, 사제들의 조직이다.
군 출신으로 이성과 신앙의 조화를 추구했던 이나시오 로욜라가 그 창설 주역. 하비에르는 20대 초반 10여년 연상인 로욜라를 만나 그에게 감화를 받아 일신영달을 버리고 함께 예수회를 함께 창립한 뒤 스스로 선교 일선에 뛰어 들어 인도, 동남아, 일본을 찾아 변변한 지원 없이 선교 사목을 시작했다.
1549년, 폭풍우를 뚫고 일본에 도착한 그는 지금의 가고시마인 사쓰마 지방과 야마구치 현인 나가토 지방 등을 전전하며 선교했는데 나가토에서는 영주에게 선교 허락을 받아내 당시 폐건물 상태로 방치되어 있던 불교사찰을 기증받아 교회로 쓰기도 했다. 하지만 2년여쯤 뒤에 일본 전역이 전국시대를 연 오닌의 난 이후로 전화에 휩싸이면서 사정이 급변, 여유있게 선교하지 못했고, 결국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일본에서 선교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노하우를 후배 선교사들에게 확실히 하고 갔다고 평가된다.
그 가운데는 전도하고 설교할 때 사제들이 유럽식 사제복 대신 일본 승려들이 입는 납의와 가사를 입는 일도 있었는데, 같은 예수회 선교사인 마테오 리치가 중국에서 사제복 대신 유학자의 도포를 입고 유교 교리에 비추어 기독교 교리를 전파하려 한 것과 같은 일종의 ‘현지화’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그후로도 예수회는 전반적으로 이 현지화 전략을 잘 지켰다. 1551년, 하비에르는 중국에서의 선교활동을 위해 일본을 떠나 중국으로 출발했지만 진입하지 못하고, 광둥 항 앞의 한 섬 에서 열병으로 선종했다. 그의 나이는 향년 46세.
1619년 10월 시복되어 1622년 3월 시성됐다. 축일은 12월4일, 교황청에 의해 사후 70년에 정식으로 성인에 올랐다는 얘기다.

세상사는 사람의 일이다. 특히 교회의 일이야 말로 사람이 모여 하는 일이다. 앞서 여러차례 언급한 대로 사도신조를 접하면서 “거룩하고 보편된 교회와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라는 대목에서 큰 각성을 받은 조선의 하비에르 권일신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어 튼실한 교회 조직을 일구겠다고 작정했고 그 일은 윤유일 발탁의 경우처럼 매우 의미있는 결실로 이어 진다.

1779년 천진암 천주학 강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이래 84년 이승훈이 연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와 본격적으로 신앙조직이 꾸려지기 전 까지 권 철신 일신 형제와 그 자제들, 이벽. 이승훈, 그리고 정약전 약종 약용 등 정씨가  3 형제들 등 초기 성원 이외에 새롭게 가세한 이들이 있는데 이들이야 말로 조선교회의 초석을 다진 일당백의 인재들 이었다. 한결같이 하비에르 일신의 권유와 인도에 따라 성원이 되었고 그의 지도에 따라 군건한 동량이 되었던 이들이다.

이존창, 유항검, 최창현, 최인길, 윤유일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 다섯 사람과 뒤에서 버팀목이 되었던 종동섬을 포함해 이른바 권일신 사단이라 부를 수 있는 여섯 사람을 빼고는 조선 천주교단의 성립과 이어지는 박해를 이야기 할 수 없다.
흥미있는 것은 다섯 사람 제각기 신분도 달랐고 학문의 정도, 확인할 수는 없지만 신앙의 강도 이른바 성령의 감화도 모두 달랐지만 당시 초기 천주교단 안에서의 역할과 그후 평가는 가히 눈부시다고 할 만하다.

당시의 서학 천주교 교우들이 극복하고자 했던 유학의 덕목 장유유서를 차용 하는 것은 어울리지는 않지만 그래도 당시는 물론 지금도  큰 영향력을 지닌 덕목이기에 그 순서에 따라 간략히 저들의 신원과 입교 과정 그리고 역할과 업적을 살펴본다.

이존창은 (李存昌) 1752년 생으로 이들 중 가장 맏이다. 세례명은 루도비코 곤자가. 이단원(李端源)으로도 알려져 있다. ‘내포의 사도’라 불릴 정도로 충청도 전교에 공헌이 지대한 인물이다. 단적으로 <한국천주교회사>의 달레 신부는 “오늘 우리 교우 대부분들이, 그가 그때 입교시킨 자들의 후손”이라고 적었다. 그의 활약으로 당시 내포 (에산 덕산 홍성등 충청도 서안 지역을 총칭하는 지명)와 그 인근지방은 다른 어느 고장보다도 천주교가 가장 성했다. 조선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金大建)의 할머니는 그의 조카딸이 되고, 최양업(崔良業)신부는 그의 생질의 손자가 되는 등, 조선 말기의 신자 중 대부분이 그가 입교시킨 신자들의 후손이라고 할 수 있으리만큼 그의 전교상의 공헌은 지대하다.

그는 영조 28년 충청도 천안군 신종면 (현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의 농가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외거 노비였다가 면천 됐기에 그는 천민 출신이라고 불린다.  출신은 한미했지만 어려서부터 영민했던 그는 눈치를 받으면서도 인근 서당에서 유학 경전을 공부 했는데 그 성가가 뛰어 났고 주위의 추천으로 양근 녹암 서당에 들게 된다. 그도 녹암 사당의 학도 유생 출신이라는 얘기다.

어느날 숙사인 직암은 계속 눈여겨 보던 만학도인 그에게 윤유일의 예처럼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물었고 천주실의를 건넸다. 이 존창은 녹암의 예상대로 천주교에서는 신분의 고하가 없이 천주안에서 모두 평등하다는 점에 매료 됐다고 고백해 오면서 천주학을 유일과 마찬가지로 마른 종이가 물을 흡수 하듯 빨아 들였고 종국에는 내포의 사도 바울이 되었던 것이다.

“숙사, 재가 이제야 하늘을 보았습니다. 제가 왜 이땅에 이렇게 태어 나게 되었는지 이제야 알겠습니다.”

“자를 숙사가 이루시려는 일에 마음껏 부려 주십시오.”

그는 실제로 천주교 성인 가운데 사도 바울에 천착해 그의 일대기를 꿰고 있었고 바울처럼 내포의 각 공소에 편지를 보내 교우들을 선도 했다. 물론 천주, 야소, 같은 직접적인 표현이나 단어는 사용하지 않고 은유적 표현을 사용했다. 하지만 후일 박해 때 이를 빌미로 많은 곤경에 처하기도 했다. 당시 서슬 퍼랬던 취조관들도 생각만큼 멍청하지 않은 이도 있었기 때문이다.

1756년 생인 유항검은 전주 일대의 최대 부호였다. 유항검은 문벌만 좋은 양반이 아니라, 줄잡아 15,000마지기가 넘는 광할한 토지를 소유한 호남의 대부호였다. 그의 토지는 금구, 김제, 만경, 여산 등 10개 고을에 산재해 있었고, 초남리에서 남서쪽으로 내려가다 만나는 용지며 들판은 거의가 그의 땅이었다.
이런 대부호가 어떻게 천주교 신자가되어 자신의 재산을 교회일에 아낌없이 희사했고 종국에는 그 많던 전답을 다 몰수 당하고 능지처사 형을 당해야 했을까. 역시 전교의 성인 권일신 프란치스코 사브리오의 감화 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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