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일 작
“기리에 엘레이손 (자비를 베푸소서)”
1795년 갑인년 4월5일( 양력 그레고리력) . 이날 한양 북촌 계동의 한 너른 가옥.
이른 아침인 묘시 무렵 집 주인이자 이날 중요한 전례의 부제 역할을 맡은 최인길은 새로 도배한 사랑채의 큰 방에서 주문모 신부의 지시대로 떨리는 손을 다잡고 정성껏 마련한 제대 위 초에 불을 밝혔다. 얼마나 기다려왔던 이 순간 인가.
제대 위에는 큼지막한 십자 고상이 놓여져 있었다. 양쪽의 초를 밝힌 뒤 제대 옆 작은방 한 켠에 서 있던 주 신부에게 다가가 속삭이듯 낮은 소리 로 말했다.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조선말이었다. 신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그 정도 조선말은 주 신부도 알아들었다. 주신부는 몇달전 어렵사리 조선에 입국 한 중국인이었다. 주 신부가 방에 들어서자 숨죽이고 있던 신자들은 상기된 얼굴로 그를 맞았다.
십자가가 놓인 제대 앞에 신부가 서자 신자들은 모두 무릎을 꿇었다. 밖에 도열해 있던 신도들도 깔려 있던 멍석 위로 무릎을 끓었다. 신부는 제대를 향해 서서 십자 성호를 긋고는 나전어(라틴어)로 성호경을 읊었다.
“인 노미네 빠뜨리스 엣 필리이 엣 스삐리뚜스 상띠 아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중인들은 신명 나게 조선어로 이를 따라했다.
“성부 성자 성신의 명호로 아문”
이 땅의 첨례에서 처음으로 나온 순 조선어 경문이었다. 주신부는 대단한 융통성과 현실 감각을 지닌 예수회 사제였다. 성호경 만큼은 뜻도 모르고 발음도 엉터리인 나전어 보다는 한자식일 망정 조선어로 외우라고 지시했던 것이다. 자신의 중국에서의 경험이 그렇게 하게 했다. 오히려 후일 프랑스 사제들이 왔을떄 다시 나전어 일색으로 돌아가야 했다.
이어서 나전어로 신부의 자비송 기도가 짧게 이어졌다. 일동은 마지막의 ‘기리에 엘레이손” (자비를 베푸소서)” 을 세번 할 때는 모두들 연습한 대로 나전어 발음으로 크게 따라했다. 주신부는 중요한 부분에서는 자신이 습득한 바 최대한의 정확한 발음으로 나전어를 따라 하도록 지시했다. 어거스틴 이래 유명한 말 기리에 엘레이손도 그중 하나였다.
“기니에 알내선 알랠루야” 조선 신자들의 발음은 아직 요령부둑이었다.
하지만 조선 땅에서 최초로 봉헌되는 미사의 시작을 알린 정식 사제의 성호경 이었고 자비송 이었다.
사제의 십자성호를 따라 긋는 신자들의 손이 파르르 떨렸고 눈에는 이슬이 맺혔다. 감격에서 오는 떨림과 눈물이었다. 얼마나 기다린 순간이었던가. 이 순간을 위해 얼마나 많은 고초와 희생이 있었던가. 모두의 가슴에는 뜨거운 감동이 일고 있었다.
마침 부활절이기도 했던 그 날, 정식 사제 없이 신앙을 이어가던 조선 천주교회 공동체에서 처음으로 신부가 집전한 첫 미사이자 첫 부활 축일 미사가 봉헌된 것이다.
가슴이 벅찬 것은 중국인 주 신부도 마찬가지였다. 목숨까지 걸어가면서 비밀스레 준비한 조선의 첫 미사가 ‘예수 부활 대축일’ 미사 첨례였기에 신자들이 서투른 발음으로 외친 ‘알렐루야’가 사선을 넘어 부활 하듯 조선에 온 주 신부에게 더 큰 감동으로 다가오는 까닭이었다.
그날 사랑채 쪽마루 위에는 나전어를 언문으로 적은 궤도가 걸려 있었고 최인길의 신호에 따라 한 청년이 그것을 차례로 넘기고 있었다.
이날 가장 감격적인 순간은 성체 성사의 삼종이 울린 일이었다. 미사 전례 중 ‘성찬의 전례’에 특별히 종을 치는 이유는 밀떡과 포도주의 성스러운 변화의 순간을 알리기 위함이었다.
예수가 최후의 만찬을 통해 떡과 포도주가 자신의 몸이요 피라고 했듯이 성체성사를 통해 떡과 포도주에 성령이 임했다는 선언을 사제가 행하고 복사가 종을 치면 이 소리에 모든 신자들은 고개를 들어 사제의 뒷모습을 보면서 거룩한 성체 성사의 기적에 집중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종소리는 종소리는 죄악에서 벗어나게 된 세상을 깨우는 은총의 소리였다.
이날도 제대는 벽에 붙어 있어서 사제는 제대를 보며 미사를 드렸다. 당시의 미사는 사제가 라틴어로 미사를 주례하고 신자들은 제대를 거의 보지 못한 상태에서 그저 고개를 숙이고 성호를 긋는 방식으로 미사 전례에 참여해야 했다.
한참의 경문과 기도가 이지고 사제가 마침내 뒤로 돌아 섰다. 떡 쟁반과 성혈주를 든 보좌진(복사)이 옆에 섰다.
신자들은 한 사람씩 나가 예수님의 몸과 피가 된 흰떡(백설기) 포도주 (그간 여러차례 북경을 다녀온 밀사 윤유일이 몇해 전 북경서 가져온 포도로 재배해서 담갔다)를 받아 모셨다. 신부가 한사람씩 입에 넣어 주었지만 누구도 쉽사리 삼키지 못했다. 목이 메었다. 부제 최인길이 들고 서 있는 포도주 사발 앞에서 연습한 대로 가먼히 입만 대고 떼라는 데도 모두들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신부가 우리말로 “천주님의 몸” 했고 부제가 “천주님의 피” 라고 했기 때문이다.
조심스레 떡을 씹는 저들의 마음에는 ‘되살아나신 천주의 아드님이 내 몸속에 들어와 우리와 함께 계시는구나. 그래. 이 혹독하고 위험천만 한 시기지만 나는 두려울 것이 없다.’는 다짐이 용솟음 쳤다. 뜨거운 눈물이 이들의 볼을 타고 흘렀다. 예수 마리아, 예수 마리아를 다시 속으로 천번이고 만번이고 외쳤다. 그때는 ‘예수 마리아’ 주문이 최고의 주문이었다.
이날 미사전에 주 문모 야고보 탁덕은 사도신조와 몇몇 주요 전례문들을 조선어로 번역해 암송할 것을 권했다. 주신부가 와서 보니 이는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괴상한 언어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당초 나전어 였던 것을 중국에 와서 어떤 것은 음역을 했고 어떤 것은 훈역과 의역을 했는데 조선에서는 이들을 모두 조선식 한자 발음으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실은 중국에서도 그랬다.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자비를…”
주문모(周文謨) 신부는 최초로 조선에 입국한 정식 탁덕 사제였다. 1752년 청나라 장쑤성(江蘇省) 쑤저우(蘇州) 쿤산 현(崑山縣)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7세에 어머니를 잃고 8세에 아버지를 잃었다. 고모 슬하에서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의 고향은 예수회의 중국 선교가 시작된 이래 천주교 신앙이 융성한 지역이었다. 집안이 천주교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도 어려서부터 천주교를 접했다. 세례명은 야고보.
그는 30세 때 과거를 작파하고 예수회가 세운 북경 교구의 신학교에서 신학 공부를 시작해 중국인 최초의 졸업생이 되어 늦은 나이 였지만 마침내 사제 서품을 받았다.
조선에 성직자를 파견해달라는 조선의 열화 같은 요청에 따라 구베아 주교의 명령으로 1789년(정조 13) 조선에 파견됐다. 당시 베이징교구의 구베아 주교는 신앙심이 깊고 조선 사람과 닮은 복자를 조선 선교사로 임명하고, 조선땅의 성무에 관한 모든 권한을 부여했다.
주문모 신부는 그해 음력 12월 3일(양력 12월 24일) 천신 만고, 우여곡절 끝에 윤유일(尹有一) 지황(池璜), 등의 결사작이며 헌신적인도움을 받아 조선 사람으로 변장하고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조선에 은밀히 입국했다.
첫 신부를 맞은 조선 교인들은 ‘그를 마치 하늘에서 내려 온 천신처럼 공경했다.’ 신부의 도착은 신자들에게 글이나 말로는 다 표현하지 못할 큰 위안을 주었다. 주신부는 하늘이 조선 천주교를 위해 안배한 정말 귀한 종 이었다.
후일 교황청에 의해 복자로 시성선된 주 신부는 최인길(마티아)의 집에 머물면서 조선말과 조선 글자를 배우고, 1795년 부활절에 신자들과 함께 조선교회에서는 처음으로 미사를 봉헌했던 것이다.
주신부는 이날 부활 축일 미사중에 특별히 이 미사를 권일신, 김범우, 윤지충, 권상연 형제를 위해 봉헌 한다고 선언했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자고 했다. 그때 까지 조선교단을 위해, 하늘의 명을 지키기 위해 희생된 사람은 그 네 사람이었다. 신부 스스로도 온 정성을 다한 간절한 기도를 올렸다.
이때 앞 줄 가운데 갓을 쓰고 앉아 있던 윤유일은 아비와 같았던 스승, 직암 권일신을 생각하며 통곡에 가까운 눈물을 쏟아야 했다. ‘기리에 일레이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