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일 작
토마스 아퀴나스의 예수, 매카시의 예수
프랑스 국왕 루이 9세가 토마스 아퀴나스를 만찬에 초대했단다. 왕 곁에 앉은 토마스(별명 벙어리 황소)는 계속 말없이 딴 생각을 하고 있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식탁을 꽝 치며 외쳤다.
“그래 , 이것으로 마니교는 끝장이 난 거야 !”
옆에 있던 수도원장이 쿡쿡 찌르면서 여기가 어디인지를 일러 주었을 때야 토마스는 제정신을 차렸다. 자신의 무례를 사과하자, 왕은 오히려 사람을 시켜 떠오른 생각을 잊기 전에 받아적게 했다. 그의 집중력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그리고 왕을 비롯한 사람들에게 그가 얼마나 존경받는 학자였는지를 잘 보여 주는 장면이다.
대신학교 시절부터 카트라이트는 이때 떠오른 토마스 성인의 마니교 대처방안이 어떤 것이었는지 궁굼했기에 여기저기 찾아 보았지만 끝내 정확한 텍스트는 찾지 못했다. 토마스의 명저 ‘이교도 대전’과 ‘신학 대전’ 등 저서에서 그 단초를 찾아야 했다.
토마스는 당시 선풍처럼 휘몰아 치고 있는 마니교를 커다란 위협으로 느꼈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대처법은 비난과 색출, 여론몰이가 아니었다. 신앙과 이성, 은헤와 지성의 조화를 꾀했던 자연주의 신학자 답게 토마스 (또다른 별명 천사 박사)는 자신의 저서에서 ‘가장 큰 위기가 가장 큰 기회’ 라고 설파 하면서 욱일승천하고 있는 마니교며 유대교, 이슬람의 선악 이분법적 세계관을 차분한 논리와 설득력 있는 예증으로 격파 한다.
이 분분은 나중에 다시 다루기로 하고 매카시로 대변되는 미국의 반공주의 광픙와 그 폐해에 대해 잠깐 더 살펴 보기로 한다.
매카시는 시대가 낳은 기형아 라고 했는데 그 광풍은 당시 같이 광분 했던 사람들 모두 공범일 수 밖에 없었다.
동료들에 의해 1954년 하반기 탄핵된 매카시는 상원의원 직위는 유지했으나, 거의 활동은 할 수 없었다. 절망으로 가득찬 그는 술에 빠져 지냈고 그의 사인 급성간염 원인은 알콜 중독이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런데 그는 죽기 전 신문사와 텔레비젼 방송국들에 편지를 보냈다.
“나의 정치와 정책은 당신들이 내게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주었을 때와 달라진 게 없는데 왜 나에겐 지면과 시간을 할애하지 않느냐?” 는 것이었다.
매카시가 의아해 한 건 어쩌먄 당연했다. 바로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언론은 매카시의 말이라면 무조건 1면을 할애했었으니 말이다.
이처럼 매카시즘 광풍의 최고 협력자이자 하수인은 언론이었다. 특히 미국 현대사에서 언제나 전쟁을 옹호하면서 청년들의 애국주의 고취에 앞장섰던 타임(TIME)과 라이프(LIFE) 계열의 시사 잡지. 반공 세력의 수호자를 자처했던 허스트계 신문들을 포힘히는 출판’ 언론왕국, 그리고 그때 막 열풍을 맞이한 테레비젼 방송사들이 매카시 의원과 빌리 그레이엄 목사로 상징되는 그의 적극적 동반자, 반공주의 개신교 목사들을 연일 대서특필(표지인물) 했고 스포트 라이트를 비췄던 것이다.
그렇다. 매카시의 절망과 음주, 나아가 사망 원인은 알콜 중독만이 아니다. 대중매체 중독이 더 큰 이유가 아닐까 싶다. 대중매체라는 마약에 중독된 사람은 그 마약이 공급되지 않을 때 삶의 의미와 보람을 잃게 마련이다. 특히 텔레비젼 매체가 그렇다. 혹자는 후일 맥카시의 출연 시간까지 계산해가며 텔레비젼이 없었다면 메카시 광풍도 분명 덜했울 것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미국의 텔레비전 방송은 뉴욕 세계 박람회가 열렸던 1939년, 1주일에 2시간씩 방송을 시작한 것에서 출발해 2차 대전 후 급속히 성장 수상기 보급대수가 1949년에 100만 대, 50년에 5백만대, 51년에 1,000만 대에 이르렀다. 때문에 미국인들은 장진호의 전투 조차 거의 실시간으로 생생하게 지켜 볼 수 있었다. 방송국도 전국에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는데 이들은 메카시의 일거수 일투족을 거의 실시간으로 방영했다. 후일 ABC의 시사프로에 의해 매카시의 광풍이 멈춰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지만 초창기에는 매카시가 의회 내에서 가장 미국적으로 잘생긴 최연소 의원이라고 까지 칭송 했었다.
언론 춤추기의 가장 극명한 사례가 광풍이 한창이던 52년의 펠러 박사의 죽음이다.
1952년 11월13일. 뉴욕 컬럼비아대학의 국제법 교수이자 유엔설립의 한 주역이었으며 초대 유엔 사무총장 T.H. 리의 수석법률고문 에이브러햄 펠러 박사가 뉴욕 맨해튼의 그의 아파트에서 투신, 정원에서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됐다. 이 사건은 미국사회에 큰 충격파를 던졌지만 언론들은 고인을 애도 하기 보다는 그의 돌연한 죽음으로 유엔 내 간첩 색출이 어려 워졌다는 식의 보도를 먼저 했다. 무언가 캥기는게 있었기에 그랬던것 아니냐는 투였다.
당시 매카시 위원회는 유엔본부의 미국 출신 직원들에게 직무과정에서 얻는 소련관련 정보를 정기적으로 보고할 것을 요구했는데, 해당 직원들이 국제공무원의 신분에 관한 국제법적 근거를 들어 이러한 요구를 거절했다.
이 같은 국제법적 주장의 근거가 펠러 박사로부터 비롯됐다는 사실을 안 매카시 위원회는 그를 소련에 협력하는 공산주의자로 지목, 지속적인 심리적 압박을 가한 끝에 결국 자살로까지 내몬 것이었다. 후일 육군 청문회 때 가족 동료들의 구체적 증언으로 펠러 박사에 대한 의혹은 해소됐지만 세계 평화를 설계했던 뛰어난 국제법 학자의 죽음과 당시 언론의 행태는 그 때 미국사회에 매카시즘의 독소가 얼마만큼 광범위하고 뿌리 깊게 침투했던가를 보여주고 있다.
매카시 광풍이 낳은 폐해는 너무도 컸다. 당시 매카시즘에 당한 피해자의 수를 정확하게 집계하기 힘들지만 수백 명이 수감되었고, 1만 명에서 1만 2천 명이 직업을 잃었다. 혐의가 제기되었었다는 이유만으로 해고되었기 때문이다. 동성애 혐의도 매카시즘의 주요 공격 대상이 되었다. 성적 지향을 이유로 수천 명의 사람들이 괴롭힘을 당하고 취업이 거부되었다.
그런데 매카시 시대에 그에게 소환 당한 공산주의 혐의자 가운데 아무도 당당하게 자신이 공산주의, 사회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영화 감독이었던 엘리아 카잔을 비롯 몇몇 인사가 공산당에 가입 한 적은 있지만 이내 그 사상을 버렸다고 밝히는 정도였다. 후일 카잔은 당시 같이 활동했던 인사들의 명단을 밝혔다 해서 천하의 밀고자로 곤욕을 치루기도 했다. 이처럼 매카시 광풍은 사람을 서로 믿지 못하게 하는 풍조를 조장하는 폐해까지 가져 왔다.
메카시가 무대에서 사라진 뒤 미국내에서 공산당 때려 잡기의 망령은 즉각 사라 졌을까, 그렇지 않다.
매카시를 축출하는 대신 반공의 교두보가 필요 하다는 생각을 했던지 그의 축출 청문회가 열리고 있던 그 무렵 민주당 의원들이 중심이 돼 매우 종합적인 반공법 (Communist control act)이 제정되기에 이른다.
이 54년 반공법은 1917년의 ‘간첩법’, 1940년의 ‘이주민 등록법’ , 45년 2차대전 직후 ’반미활동조사위원회 법 ’ 47년의 공무원 충성서약법, 50년의 ’보안법(Internal security act)를 한데 모은 법이다.
1954년 8월. 민주당의 험프리 의원은 . 케네디, 맨스필드 의원 등 소위 ‘리버럴’ 성향의 의원 20명과 함께 이 법안을 공동발의 했다. 공산당을 불법조직으로 명문화하고 당원의 일부 시민권을 박탈하는(예: 공직 출마 제한) 내용이 핵심이었다.
법안은 통상적 입법절차와 달리 청문회를 생략하고 이른 새벽 본회의에 상정, 짧은 토론 끝에 바로 통과됐다. 의회에서는 문구 수정 부분 이외에 법안 자체에 대한 반대 발언은 사실상 없었다. 가장 큰 이유는 반대표를 던지거나 반대토론을 할 경우, 공산주의자 또는 동조자로 낙인찍힐 것을 두려워한 때문이었다.
최종 표결 결과, 상원 전원 찬성 (79 반대 0) 하원에서는 시민권 제한의 우려가 있다며 2명의 의원만 반대했고 265명의 찬성으로 통과 됐다. 몇몇 민권단체에서 민권을 박탈하는 이 법이 헌법을 웃음거리로 만들 것이라고 비판했지만, 리버럴의 대표매체인 뉴욕 타임스 조차 ‘민권침해 요소가 있지만 공산당을 막는 법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오히려 아이젠하워 정부의 법무부 장관과 후버 FBI 국장이 공산당이 지하로 내려갈 것이라며 반대했다.
하지만 이후 여러 ‘반공법’들은 연방대법원에 의해 위헌으로 선언된다. 그 결정적 계기는 1957년 연방대법원의 ‘예이츠 대 합중국 사건’ 판결이었다. 이 사건에서 피고인 에이츠는 미국 정부를 폭력적으로 전복해야 하는 의무와 그 필요성을 선동하고 교육했고, 이를 위해 공산당을 결성했다 해서 반공법 위반으로 유죄판결을 선고받은 상태였다. 그런데 연방대법원은 공산주의 사상에 대한 이론적·추상적 옹호와 선동은 직접적인 행동으로 직결되는 선동과 다르므로 피고인은 유죄가 될 수 없다고 판시해 하급심을 파기했다. 실제적 위험 행동이 수반되지 않은 생각의 자유는 허용해야 한다는 판결이었다.
그리고 10년이 흐른 1967년, ‘로벨 대 합중국 사건’에서는 ‘국내안전법’을 결사의 자유에 관한 수정헌법 제1조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으로서 위헌이라고 판시하기에 이른다.
미국을 휘몰아치던 붉은 저주는 그 진원지인 매카시 위원회가 해체되고 매카시의원이 생을 마감하면서 일단 끝을 맺었고 당시 또는 그 이전에 만들어졌던 악법들이 사문화 되었지만 문제는 종주국 미국에서는 그나마 사그러든 매카시즘의 망령이며 그 반대의 악령이 한반도에서는 계속 살아 숨쉬며 엄청난 않은 힘을 발휘하고 있다는 점이 한반도에 뼈를 묻겠다고 작정한 파란눈의 미국인 사제 카트라이트 신부에게는 그 즈음 큰 화두로 다가섰던 것이다.
그래서 카트라이트는 로마로 달려가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에게 간곡히 물을 수 밖에 없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