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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實錄)소설>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58)

안동일 작

 아퀴나스의 예수, 매카시의 예수

카트라이트는 매카시가 세상을 떠난지 5년이 넘은 시점에서 그에 대해 조사하고 글을 쓰면서 그를 제대로 살펴보고 싶었다. 그의 입장에서도 사안들을 살펴보려하려 애썼다. 밝히기 뭣하지만 꿈에서 까지 매카시를 여러번 만났다. 거의 동년배이면서 천주교인이었고 이민자의 아들이었던 그의 처지가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무엇이 그를  그처럼 광분하게 했을까?”  공산주의는 그의 방식으로는 설복시킬 수 없었다.  카트라이트가 보기에 그는 시대가 낳은 기형아였다.

50년 2월의 휠링 폭로의 반향이 의외로 큰 파장이 일자 매카시와 몇몇 동료 의원은 상원에 조사의원회를 꾸렸고 매카시는 하원에 조직돼 있었던 ‘비미 활동위원회(非美活動委員會, (HUAC, House Committee on Un-American Activities)’fmf wktlsdml)를 자신의 수족처럼 사용해 이를 통해 ‘공산주의자 색출과 고발’에 열을 올렸다.  청문회가 연이어 열리고 언론은 대서 특필 하기에 바빴다.
그해 6월에 일어난 한국 전쟁은 그에게 날개를 달아 준 계기가 됐다. 가히 매카시 광풍이었다. 이 광풍에 공산주의와 무관한 사람들도 이름만 거론되면 조사를 받아야 했다. 대표적인 피해자가 코미디언 찰리 채플린, 극작가 아서 밀러, 베르톨트 브레히트,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 과학자 오펜하이머 등이다. 심지어 소련이 수립되기 무려 30년 전부터 레즈(Reds)라는 애칭을 사용하던 메이저리그 야구팀 신시내티 레즈조차 일시적으로 팀명을 레드레그스(Redlegs)라고 바꿔 버리는 촌극을 이 시기에 연출했다.

“그럴만 하니까 그런거지, 다들 공산당 혐의가 있는 인물들이야, 물론 개중에는 억울한 사람도 있겠지, 하지만 지금 우리의 처지는 그렇게 한가하지 않아, 봐 지금도 저 동양의 작은 나라에서는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젊은이들이 계속 죽어가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지금 손을 놓고 있다가는 나라 전체가 공산당의 손에 넘어가게 돼 있어.”
메카시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유난히도 인간 이성을 중시했고 높이 평가 했기에 무조건 믿어야 만 한다고 강요 됐던 기독교에 이성으로도 신의 존제를 증명하고 알 수 있다면서 신앙에 철학을 접목 시킨 토마스 아퀴나스가 그와 그가 만들어낸 모습들을 보았다면 어떻게 생각 했을까 그무렵 카트라이트의 내면을 지배하던 의문이었고, 나름대로 정리해 글로 적었다.

매카시는 1957년 만 4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절망으로 가득찬 그는 매일 아침 늦게 일어나 하루종일 텔레비전 연속극을 보며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냈고 사람들과도 잘 만나지 않았다. 그때  매카시 부부는 한명의 아이를 입양했는데 묘하게도 한국인이었다. 그 외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다. 그는 술에 빠져 지냈다는데 그해 5월 9일 급성 간염으로 사망했다.

1954년 6월 11일, 버몬트주 출신 공화당의 랠프 플랜더스 상원의원은 매카시에 대한 비난 결의안을 제기했다. 그의 비미활동 위원장 직위 사퇴 까지를 담은 결의안이었다. 민주당 원내대표 린든 존슨이 적극 찬동해 공화당 온건파와 함께 특별 위원회 구성에 나섰다.  특위는 그의 월권과 의원 들이며 고위 공무원, 육군 장성들에 대한 모욕 혐의를 심도있게 조사했고, 결국 비난 결의안은 12월 67대 22 압도적으로 의결됐다. 이로서 매카시즘은 막을 내린다. 따지고 보면 매카시 광풍이 미국을 휘몰아 친 기간은 4년여 남짓이다.

그  4년여의 기간동안 매카시의  비미활동위원회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으며 6.25 전쟁이 발발하자 더 기세가 등등해져서 1951년 봄에 자신들의 활동을 강화하는  새로운 보안법까지 통과시켰다.  ‘비애국적인’행위를 처벌하기 위한다는 이 국가 보안법(Internal Security Act)은 공산주의 단체들은 정부에 의무적으로 등록을 해야 하고, 우편물과 글에는 반드시 공산주의자들임을 밝히도록 했다. 국가 안보을 위해서는 시민의 자유를 거의 무제한적으로 침해할 수 있게 만든 이 법은 엄청난 논란을 불러일으켰고 당시 해리 트루먼 대통령 조차도 “이건 전체주의로 가는 길이다.”라면서 거부권을 행사했지만 상원에서 다시 트루먼의 거부권을 뒤집어 버렸다.  대통령의 거부권을 뒤집기 위해서는 재적 의원의 2/3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것을 감안하면 당시 미국 사회 분위기가 어땠는지 충분히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모두가 제정신이 아니었다. 상식과 정상은 간데없고 비상식과 비정상이 지배하고 있다. 조용한 이론과 정연한 논리는 밀려나고, 우격다짐과 고함소리만이 나라 안에 가득했다. 증오와 공포의 원시시대다.

에술인 노조원, 교육자 등 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잃고 경력을 망쳤으며, 투옥되기도 했다. 그러나 처벌자 대부분의 평결은 나중에 번복되었으며, 위헌적으로 공포된 법과 면직 조치도 나중에 불법으로 결정되거나 소송을 청구할 수 있게 되고 혹은 적법하지 않은 절차로 인정받았다. 또한 그에 의해서 기소된 인사들 중 아무도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이 없었다.
당초부터 조 매카시의 대부분의 고발과 기소는 대부분은 반박될 수 있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증거가 거의 없었다. 의원장 매카시의 심증만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민주당  밀러드 타이딩스 상원의원 같은 이는  초기부터 매카시의 주장에 대한 반박 조사에 앞장서 오류를 찾아냈다. 하지만 매카시는 타이딩스 마저 공산주의자라고 몰아 붙히며 능숙하게 청문회를 개인적 심판장으로 활용했다.

매카시는 당시 개신교단에서 명망이 있었던 필립 C. 제섭 목사와 최고의 중국학자 하버드 대학의 오언 래티모어 교수 까지도 소련과 중국의 스파이를 지낸 좌익 지식인들과 공산주의자에 대해 우호적인 모습을 보인다며 기소했다. 천주교 사제들도 포함 될만 했는데 자신이 믿는 종교라서 그랬는지 천주교 사제들은 그의 과녁에서 비켜 났다.

광풍의  기소는 이어졌고 매카시의 언사와 행동은 점점 무모해졌다. 트루먼 대통령이 극동에서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를 해임했을 때 매카시는 트루먼을 “술고래”라고 비하했다. 나가서 매카시는 국방부 장관 조지 마셜이 다양한 음모에 연루되었다고 주장했고, 마셜은 곧 장관직으로부터 사임했다. 그의 비판은 에치슨 국무장관에 대해서도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1952년, 공화당은 오랜 민주당 정권을 패퇴 시키면서 집권에 성공했다. 맥카시도 재선에 성공했고 의회도 다수당이 되었다. 아이젠하워가 취임하고 여러 강경 공화당원들이 의회를 차지하면서 매카시는 비미 조사 특위 위원의장에 더해 정부 운영을 감시하는 상원 정부 위원회 위원장 까지 차지한다.  이때 매카시는 후일 그의 괴벨스라고 지칭된 젊은 변호사 로이 콘을 발탁해 그의 수하에 두면서 광풍을 지속 한다. (위 사진, 매카시에게 귓속 말을 건네는 이가 콘 , 그는 후일 도널드 트럼프의 오랜 개인 변호사를 맡기도 하는데 , 트람프는 자신의 사업수완이며 처세를 로이 콘으로 부터 배웠다고 자랑레 얘기했다. 트럼프의 스승이자 변호인 이었던 콘은 1986년 비리 사건에 연루돼 변호사 자격을 박탈 당한 채 세상을 떠났다.)

기고 만장한 매카시는 우군인 아이젠하워 행정부도 공격하며 대립하기 시작했다. 공화당 일각에서도 집권에 성공하면서 매카시가 점점 통제 불능의 상황에 빠지는 것을 우려하기는 했다. 공화당 의원들 사이에서 “독재자의 방법으로 자유를 지켜서는 안된다.”는 말도 나왔다. 연방대법원도 미헌법의 제정정신에 따라 국가안보보다는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중시하는 판결을 내리기 시작했다.
1953년 가을에 매카시는 뉴저지 포트먼머스에 있는 육군 통신단 센터가 공산당 스파이와 연관되었다고 주장하는 무리수를 두게 된다. 정보센터가 자신이 요구한 자료 제출을 거부 했기 때문이었다.
아이젠하워의 군부까지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이는 그의 광풍을 끝내는 계기가 된다.
이에 1954년 4월부터 6월까지 상원의 “육군-매카시 청문회”가 열렸고, 아이젠하워의 요청으로 이는 텔레비전 방송으로 공개되었다. 시청률은 당시 미국 텔레비전사상 초유의 60퍼센트에 이르렀다. 매카시는 증인들에게 안하무인격의 공격적인 발언을 하면서 청문회를 진행했고 이를 계기로 매카시에 대한 대중의 여론이 악화되기 시작했다. 특히 육군측의 변호를 맡은 명성있는 원로 변호사 조지프 웰치에게 인신공격을 한 것이 큰 논란이 되기도 했다.

그는 한참 연상인 변호사 선배에게 “아이크 군부의   똥구멍에 코를 들이미는 아부꾼( 브라운 노우징) “이라고 말했다. 이에  웰치는 점잖케 “의원 님에게는 품위라는 전혀 없군요, 이런 품위없는 사람의 한마디 우리 자ㅇ랑 스런 청년들이 몹쓸 공산주의자들이 되었군요” 해서 보는이들의 갈채를 받았다.

실은 그무렵 그의 광기는 한 용감하고 양심적인 기자에 의해 제압되기 시작했다. CBS의 에드워드 머로우 기자가 그다. 당시 CBS에서는 <See It Now>라는 시사 프로그램을 방영하고 있었는데 이 프로그램의 진행자가 에드워드 머로우였다. 1954년 3월 9일, 머로우는 이 프로그램에서 매카시의 주장을 조목조목 따지며 그의 주장이 거짓이라고 논박했다.
이 방송 후 많은 미국인들은 매카시보다는 머로우를 더 신뢰한다며 지지의사를 보냈다. 방송 이후 하루 동안 CBS에 접수된 12,000건의 전보와 전화 중 머로우를 지지하는 비율이 15대 1이었다. 미국인들이 매카시즘의 피로를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육군 청문회 당시 육군 측 변호사들의 집요한 반박과 추궁에 매카시의 흥분하며 이성을 잃어버린 모습을 36일 동안 생중계된  텔레비전으로 지켜 본  시민들은 매카시에게 완전히 등을 돌렸다.
미 육군 정보 시스템의 근간인 통신센터가 소련 스파이에 의해 장악 됐고 군 요직에 스파이들이 우글 대고 있다는 그의 주장은 당초부터 말도 안되는 소리였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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