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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實錄)소설>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52)

안동일 작

 전장의 예수, 교회의 예수, 맥아더의 예수

지구상 많은 독재자들이 생전에 그것을 스스로 건립해 실각 혹은 사후에 수난을 받는 바람에 그 가치와 의미가 많이 훼손돼 있다고는 하지만 역사상 위인들은 그것을 하나 둘 쯤은 갖게 마련이다. 바로 동상 말이다. 맥아더는 미국과 한국에 큼지막한 동상을 가지고 있는 유일한 인물이다. 실은 한국과 미국 뿐만이 아니다. 맥아더 동상은 일본에도 있고 필리핀에도 건립돼 있다. 4개국에 동상이 서 있는 육군 원수. 그는 그만큼 동서양을 아우르는 현대사에 큰 족적을 남긴 군인이다.

6.25를 겪은 한국인들에게 있어 맥아더는 고마운 미국 그 자체이기도 하고 미국의 군대, 미군이 치른 6.25의 상징이기도 한다. 그안에 모든것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맥아더는 어느 순간부터 한국인들에게 애증의 대상이 되었다. 호불호가 극명하게 나뉘는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초기에는 고마움을 표해야 하는 은인의 상징으로 여겨 졌지만 한국 사회가 민주화 되고 다양한 의견이 표출 될 수 있게 되면서 전 국민의 모금 운동으로 1957년에 건립된 인천 자유공원내의 그 동상 까지도 논란의 대상이 됐던 것이다.

이일은 2000년대 초 중반의 일이다. 카트라이트 신부가 세상을 떠난 이후의 일이기에 그의 소회는 들을 수 없지만 카트라이트는  57년 맥아더의 동상이 국민의 성금으로 건립되는 과정은 소상히 지켜볼 수 있었다.
아직 생존해 있는 인물을 동상까지 세운다는 것이 크게 바람직한 일은 아니지만 한국인들의 미국에 대한 고마움을 느낄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돼 카트라이트도 흐뭇하게 지켜 본 일이었다.

‘1950년 9월 15일 장군의 진두지휘 하에 자유의 승리와 민국의 구원을 가져왔으니 이것은 영원히 기념할 일이며 이것은 영원히 기념할 사람인 것이다.’ (기단부 제문)

수십년 동안 `조용하게 건재해온’ 맥아더 동상을 둘러싸고 철거 논란이 일기 시작한 것은 2002년 미군장갑차 사망 사건 등으로 증폭된 반미감정 여파로 죄편향 시민단체들이 맥아더 동상 주변에서 잇따라 집회를 열고 `철거’ 를 주장하면서부터다. 이들 단체는 “맥아더는 해방 당시 태평양 방면 미육군총사령관으로 민족분단과 군정기간 발생한 미군 범죄에 대해 직접적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
특히 모 사립대 교수가 “통일 내전(6.25)에 미국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전쟁은 한달 이내에 끝났을 것”이라고 주장, 보수층의 거센 항의를 받았다.   맥아더 동상 화형식을 벌이는가 하면 막무가내 식의 철거 소동까지 일어나는 바람에 한국 보수 진보 갈등의 최 일선이 되어 유혈사태가 일어나고 경찰이 동원돼 상주하는 등의 소동이 있어야 했다.

맥아더에 대한 평가를 놓고 한 쪽은 `대한민국을 구한 영웅’으로, 다른 쪽은 `조국분단의 원흉’으로 상반되게 규정한 치열한 공방전이었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맥아더 동상 철거 주장에 대한 반대 입장을 표명해 주목받았다.
지금은 어떻게 잘 무마가 되었는지 수면하에 잠복한 일이 돼 있는지 2024년 현재 동상은 인천 자유공원에 굳건하게 서 있다. 요즘에는 그 동상 기단부에 새겨져 있는 부조의 광경이 인천 상륙작전 때가 아닌 필리핀 상륙때의 광경으로 밝혀져 새로이 제작한다는 뉴스가 전해지고 있다.
맥아더는 한국의 보혁 갈등, 이념 갈등의 뇌관이자 리트머스가 되어 있는 것이다.

(위 사진, 일본 동경에 서 있는 맥아더 동상. 일본의 민주주의 일으킨 친애하는 멕카사라는 문구가 이채롭다.)

미국 한 근대 사학자는 맥아더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주로 미국인에 해당하는 말인듯 싶다.
‘당신은 맥아더에 대해 잘 모른다고 어깨를 으쓱할 필요가 없다. 누구나 더글러스 맥아더에 대해 확신한다. 그에게 흥미 없는 데라곤 전혀 없다. 소극적인 면도 전혀 없고, 어리석은 데도 전혀 없다. 그의 애국심과 용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으며, 20세기 주역의 한 사람이라는 그의 중요성에 의문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 때문에 맥아더 사후에 동상이 건립되고 기념관이 생긴 것은 이상할게 없다. 미국내 맥아더 동상은 노포크의 그의 기념관 앞과 모교인 웨스트 포인트 교정에 큼지막하게 세워져 있다.

맥아더에 대해서는 조금 지루한 감이 있지만 오늘날  미국과 한국에서 공히 지적되고 있는 심각한 정치적 양분 현상,  보혁갈등, 이른바 과도한 폴리티컬 콜랙트니스 경도와 관련해 그 연원이 되고 있다는 점에서 조금 더 살펴 보기로 한다.

글러스 맥아더는 미국의 수많은 군인 중에서도 최고 엘리트였고 각종 최연소 기록의 주인공이었다. 필리핀 점령군 사령관을 지낸 아버지 아서 맥아더의 후광까지 더해져 사단장, 웨스트포인트 교장, 육군 참모총장이 될 때마다 최연소 기록을 갈아치웠다.
미 최고 훈장인 은성무공훈장을 7차례나 받았으며 미 육군 역사상 4명밖에 없는 5성 장군의 영예까지 안은 당대 최고의 군인이었다.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말이 미국에는 전혀 적용되지 않지만 미국도 역사상 중요한 전쟁을 승리로 이끈 유능한 장군들은 모두 대통령에 까지 오른 전통이 있다.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끈 워싱턴 장군이 초대 대통령에 올랐고 남북 전쟁을 승리로 이끈 북군의 그랜트 장군도 대통령에 당선 됐다. 결과적으로 2차대전을 승리로 이끈 장군도 대통령에 당선돼 군의 대선배 들과 마찬가지로 8년간 재임했다. 하지만 그는 맥아더가 아니었다. 그의 부관 출신으로 유럽지역 사령관이었던 아이젠하워가 그 였다. 많은 이들이 아이젠하워는 유럽의 백인들과 싸웠고 멕아더는 동양의 황인종과 싸워 승리한 장군이라서 그랬다고 하는데 이는 틀린 말이다.
미국인들에게 맥아더는 최고 인기의 전쟁 영웅이었다. 앞서 말한대로 그가 해임됐을 때 트루먼의 백악관 우편실에 항의 편지가 쇄도하고 갤럽 여론조사는 69%가 맥아더를 지지했다. 해임된 맥아더는 그를 사랑한 일본 국민들과 공식적인 작별 인사도 없이 연도에 선 25만 명의 환영을 받으며 4월 16일 일본을 떠났다.
맥아더와 트루먼의 전쟁 2라운드는 미국에서 펼쳐졌다. 51년 4월 19일 미 상하양원합동회의에서 행한 고별 연설로 맥아더는 다시 한번 전 미국인을 사로잡았다. 그가 연설을 마치고 의사당 복도를 지날 때 한 하원의원은 “우리가 오늘 여기에서 들은 것은 직접 현신하신 하나님의 육성”이라고 외쳤다.
뉴욕의 환영 퍼레이드에는 유례없는 인파가 몰려들어 영웅에게 아낌없는 갈채를 보냈고 맥아더는 1951년 내내 전국을 순회하며 대중을 상대로 연설을 했다. 사실상 트루먼에 대한 정치적 공격이자 1년 앞으로 다가온 대통령 예비선거를 의식한 연설이었다.

매카시즘의 광풍이 몰아치고 있던 분위기 덕에 맥아더는 공산주의와 결연히 맞서 싸우다 희생된 영웅으로 부각되었다. 정치인들은 유행처럼 너도 나도 나서서 트루먼을 비난 했다. 하지만 그 열화와 같은 인기는 급전직하 급락하게 된다. 그의 해임을 따지겠다며 열린 상원 청문회가 그의 발목을 잡은 결정적 계기였다. 공화당은 트루먼과 애치슨 탄핵까지 거론하며 청문회를 요구해 관철 시켰다. 상원 군사위원회와 외교위원회 합동청문회가 5월 3일부터 6월 말까지 무려 42일간이나 진행됐다.
맥아더 본인을 불러 공방을 벌인 청문회도 3일간 꼬박 진행됐다. 맥아더는 대만 국민당군 이용이나 만주 폭격 등이 3차 세계대전을 일으킬 수 있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자신의 구상은 한국 전쟁에서의 승리가 목적일 뿐 중국과의 전면전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브래들리 합참 의장, 마샬 국방장관은 청문회에서 맥아더의 대중국 태도는 세계대전으로 확산될 위험을 수반하고 있었다며 그의 전략은 ‘미국을 잘못된 전쟁에서 잘못된 시간과 장소에서 잘못된 적에게 몰아넣게 됐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청문회를 통해 웨이크 섬 회동 내용을 비롯해 평소의 오만한 대 대통령관 이며 정부관이 실체적으로 들어나고 그의 화려한 언론플레이의 뒷 이야기가 속속 밝혀 지면서, 그리고 필리핀 전투, 한국전쟁 특히 원산 상륙작전, 장진호 전투 등에서의 전략적 오류들이 드러났는데도 그는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고집불통으로 인식되었고 언론들도 이를 대서특필 하면서 그에 대한 선출직 공직자로서의 인기는 한계에 부딪혔던 것이다. 유권자들은 현명한 법이다. 그리고 정치인들의 조삼모사는 어디나 여전한 법이다.

트루먼 정부는 이 청문회를 자신들의 크나큰 승리의 순간으로 기록했다. 오랜 숙적의 발톱을 뽑아버린 것으로 여겼다. 그를 차기선거에 있어 부동의 대통령 후보로 여기는 듯 했던 공화당은 이듬해 1952년 대선에서 그를 거의 언급하지 않으면서 또 다른 참전용사 였지만 겸손하고 온화했던 그의 참모 출신 4성장군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를 후보로 지명했다. (맥아더는 등록을 하지도 않았는데 이번에는 1차 투표에서 10표가 나왔다. )
그해 11월 대선에서 공화당 후보로 출마한 아이젠하워가 당선됐다. 아이젠 하워는 민주당의 일리노이 주지사 출신 애들레이 스티븐슨을 맞아 선거인단 수 442 대 89, 승리한 주 39 대 9 (알라스카와 하와이는 1959년에 되서야 주로 인정 됐고 이후 대선에 참여하게 된다) 로 압승을 거둬 1932년 민주당 루즈벨트 집권 이래 꼭 20년 만에 정권이 교체를 이룬다. 매카시 광풍이 불고 있었어도 미국의 유권자들은 온건 자유주의를 택했던 것이다. 50년 2월 위스컨신 출신 연방 상원의원 조지 매카시가 ‘국무부내에 56명의 간첩이 있다”고 외치면서 불었던 이 광풍은 아이크의 집권이 기반을 잡은 54년에야 수그러 든다.

후일의 이야기지만 카트라이트는 60년대 중반 미국을 방문 했을때 애써 노포크의 맥아더 기념관을 찾아 그의 동상을 직접 본 일이 있었다. 동상을 본 일 보다는 한국 사회에 있어 이념 갈등 역사, 6.25의 의미를 확인한 경험이었던 것이 기억에 남는 일이었다.
그때 서울의 대학에 적을 두고 있었던 카트라이트 신부 교수는 리치몬드에서 열린 미국 가톨릭 재단의 한 세미나에 기독교와 6.25를 연구하던 젊은 여교수와 함게 참석 했었는데 뉴욕에 있던 현봉학이 달려와 함께 노포크의 기념관을 찾았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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