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일 작
전장의 예수, 교회의 예수, 맥아더의 예수
휴전 노력에 반대하는 맥아더의 불복 사태 처리에 고심하던 트루먼에게 ‘마틴의원 편지 사건’은 ‘ 낙타의 등을 부러뜨린 마지막 지푸라기’ 가 됐다.
4월 5일 야당인 공화당 하원 원내총무 조지프 마틴의원이 연방 하원에서 맥아더가 자신에게 보낸 편지라며 공개 낭독했다. “장제스 군대가 한국전에 사용되지 않은 것은 천하의 바보스러운 결정”이라는 맥아더의 코멘트였다. 민주당 대통령이 임명한 사령관이 공화당 하원 원내대표의 입을 빌려 대통령의 정책 결정에 공개적으로 항명한 것이다. 이 정치적 스캔들로 맥아더의 경력은 결정적으로 끝났다.
1950년 12월 초, 맥아더는 6.25 전쟁에 대만군대를 파병하고 싶어 하는 장제스의 제안을 받아들이자는 제안을 상부에 건의했다. 사실 미 합동참모본부도 대만군의 전쟁 참가를 고려했다. 1951년 1월 12일 작성된 작전 메모에는, ‘효율적인 대공작전에 기여하게 될 군수지원을 대만군에 제공한다’는 내용을 담겨 있었다. 맥아더는 후에 청문회에서 자신은 이 문서에 기초하여 대중국 확전을 주장했다고 주장했지만 조지 마샬 국방장관은 그 문서는 유엔군이 한반도에서 철수하게 될 지 모르는 급박한 상황 아래서 작성된 것으로 잠정조치에 지나지 않으며, 1월 중순에 한국의 군사적 상황이 호전되면서 이 제안이 무효화됐다고 주장했다.
결국 1951년 4월 6일, 트루먼은 국방장관 마셜, 합참의장 브래들리, 국무장관 애치슨, 직책은 상무장관 이었지만 가장 신임했던 해리만과 함께 맥아더 해임 문제에 대해 진지히게 논의하기 시작했다. 해리만은 맥아더의 해임을 찬성했지만 브래들리는 반대했다. 마셜은 이 문제를 고려할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요청했다. 애치슨은 개인적으로 맥아더를 해임하는 것에 긍정적이었지만 이를 정확히 표명하지 않았다. 그는 트루먼에게 “맥아더의 해임은 행정부의 가장 큰 싸움이 될 것이다.”고 말했다.
다음날 두번째 회의에서도 마셜과 브래들리는 해임을 반대했다. 4월 8일, 합참본부 관계자들이 마셜을 찾아와 맥아더의 해임은 “군사적 관점”에서 바람직하며 그를 해임시키지 않는다면 민간 당국은 더이상 군대를 통제할 수 없게 된다.”고 설득했다. 이에 마셜은 마침내 맥아더의 해임에 동의했고 브래들리도 4월 9일 동의의 뜻을 밝혔다. 이렇게 해서 만장일치라는 말이 나왔던 것이다.
부산 사령부에서 소식을 들은 카트라이트는 현역 신분이었기에 드러내 놓고 표명하지는 않았지만 속으로는 트루먼의 조치가 타당했다고 여기고 있었다. 당시 미국의 상황과 국제 정세 등을 고려했을 때 한반도에서 전쟁을 확대하는 것은 옳은 판단이 아니었다는 생각이었다.
맥아더는 대만군을 동원하고 핵폭탄을 터트리자고 주장했다. 엄청난 인명피해가 예견 되는 일이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터트려 일본을 항복시켰듯이 중국에도 치명적인 살상무기(핵폭탄)를 사용하자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트루먼은 맥아더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었다. 일본에 투하한 원자폭탄에 대한 비판 여론도 강했던 상황에서 중국에 핵폭탄을 터트렸다가는 소련과의 3차대전까지 각오해야 할 판이었다. 당시 중국은 핵을 개발하지 못했지만 소련이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3차대전은 핵전쟁을 의미하기도 했다.
북진 통일을 주장하는 한국인 들에게는 통탄할 일 이었겠지만 트루먼은 한국전쟁의 목적을 ‘승리’에서 ‘협상을 통한 평화’로 바꾸고 있었던 것이다.
맥아더의 해임에 전쟁중인 한국과 당사국인 미국은 물론 전세계가 깜짝 놀랐다.
많은 미국인들은 맥아더의 해임 소식에 항의해 전국에서 트루먼의 허수아비를 불태웠다. 국제부두 노조는 항의로 조업을 중단했다. 여론조사에서 국민의 66%가 맥아더의 해임에 반대했다.
시사주간 타임은 “인기가 많은 사람이 그보다 훨씬 인기가 없는 사람에 의해 파면되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다”면서 “트루먼이야 말로 전형적인 소인배”라는 논평을 냈다. 공화당의 실력자 리처드 닉슨은 “즉시 맥아더를 복귀시키라”고 열을 올렸고 미 의회는 해임 경위를 따지는 의회 청문회를 열기로 했다. 그런데 이 의회 청문회가 결과적으로는 맥아더에게 독이 된다.
맥아더가 해임되자 일본은 천황이 분기탱천해 짐을 싸고 있는 맥아더를 직접 방문해 작별 인사를 했다. 일본과 한국 국회는 감사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을 위해 했던 일과 우정을 베풀어준 것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라며 “시간이 지나면 세계 역사상 탁월한 지도자 및 정치가로 더욱 빛날 것”이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맥아더가 일본을 떠난 4월 16일, 수십만 명의 일본 시민들이 극동군 사령부에서 아츠키 비행장까지 길에 늘어섰다. 맥아더를 태운 비행기는 후지산을 한 바퀴 돈 뒤 미국으로 향했다.
맥아더는 미국을 떠난 지 14년만인 1951년 4월 18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맥아더가 샌프란시스코 공항에 도착했을 때 50만 인파가 공항에서 도심까지 늘어서 환영했다.
그는 하루만에 워싱턴 DC로 날아와 4월 19일에 미 의회에서 은퇴 연설을 했다. 그가 연설을 하는 동안 끊이지 않는 박수와 흥분한 청중이 트루먼을 욕하는 고함을 치는 바람에 그의 38분에 걸친 연설은 수십차례 방해를 받아야 했다. 그의 그날 연설 마지막 구절은 유명하다.
“나는 당시 군대에서 유행하던 노래의 후렴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노병은 죽지 않고 다만 사라질 뿐이다.” 이 노래에 나오는 노병처럼 나는 이제 군인생활을 그만두고 신의 계시를 따라 자기 임무를 완수하려고 노력하여 온 한 사람의 노병으로서 사라져 갑니다. (Old soldiers never die, They just fade away.) ”
뉴욕에서는 수백만에 달하는 시민들이 종이 꽃가루를 뿌리며 영웅을 환영하는 퍼레이드를 벌였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지휘한 아이젠하워 장군 귀국 환영 인파보다 2배는 많았다. 뉴욕 퍼레이드의 인파 동원 기록은 뉴욕 트리뷴에 의해 7백만이라고 까지 추산 됐는데 절반만 잡아도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는 기록이다. 이 기록적인 환영 인파에 정치인들은 크게 당황했다.
하지만 맥아더는 그 후 제대로 된 정계 진출을 시도하지 않았다. 유권자는 현명하다. 사실 맥아더는 대권에 뜻을 두기도 했다. 그는 1948년에 공화당 경선에 등록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당초 예상과는 달리 당 전당대회에서 11표라는 처참한 득표를 한 바 있었다. 그때도 태평양 전쟁을 승리로 이끈 원수 로서의 인기는 대단했다. 물론 직접 날라와 유세를 하지 않은 탓도 있지만 장군의 인기와 정치인, 특히 대통령으로서의 적합성을 미국 유권자들은 냉정하게 구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후보가 된 토마스 듀이는 434표를 획득 했지만 대통령에 당선된 것은 민주당의 해리 트루먼이었다.
이를 잘 아는 영리한 그는 귀국 이듬해인 52년 대선 공화당 예선에 참가하지 않았고 군 동료인 아이젠하워가 아닌 로버트 태프트를 지지했으나 아이젠하워가 지명되었고, 아이젠하워는 11월 결선 선거에서 당선됐다.
그래도 당선된 아이젠하워는 취임 후 백악관으로 맥아더를 초청해 옛 상관을 예우했고 6.25 전쟁 종식과 관련한 논의를 했다.
퇴임후 귀국한 그에 대한 예우는 극진했다. 맥아더는 종신 복무가 가능한 원수 계급의 현역 군인 신분을 법적으로 유지하고 있었기에 본봉과 수당을 합쳐 6만 8천 달러 (2024년 기준 70만 달러 상당)의 급여를 계속 받고 있었다. 또 그와 그의 부인은 뉴욕 최고급 호텔인 월돌프 아스토리아 호텔 꼭기 층 특실을 연 1달러라는 숙박료로 제공받아 그곳에서 생활 했다.
1960년, 그의 건강이 눈에 띠게 악화 됐고 80회 생일을 맞은 다음날, 그는 전립선이 심하게 부어올라 뉴욕 세인트 루크 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다.
맥아더는 회복 후 1961년에 인생 마지막 여행이었던 필리핀 방문을 성사시켜 열렬한 환영을 받고 카를로스 가르시아 대통령으로부터 최고 명예훈장을 받았다. (그때 한국 방문도 고려 했으나 4.19 여파로 성사되지 않았다. ) 또한 그해 부터 회고록을 작성하기 시작해 사망 몇개월 전에 완성했다.
그는 젊어서 부터 지위가 올라가면서 군인으로서 최고 통수권자인 대통령과 직접 부딪히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는 역대 대통령과 대체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트루먼과의 앙앙불락은 차치하고, 육군 대위 출신인 트루먼은 1차대전 때 그의 사단 소속이었다.그래서 웨이크 섬에서 만났을 때 그에게 경례를 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를 참모총장으로 발탁했던 후버 대통령과는 보너스 군대 사건으로 크게 척을 져야 했고 루즈벨트와는 군비 축소 문제로 계속 첨예한 대립각을 세워야 했으며 강등 퇴역까지 겪어야 했다. (대장에서 소장으로 강등돼 예편해야 했다. 맥아더는 1935년 10월 참모총장 임기를 마쳤으나 현역에 남아 있기를 원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이 이를 승인해 육군 규정에 따라 종신계급(permanent rank) 소장(major general)으로 되돌아간다.)
유일하게 좋은 사이로 알려져 있는 존 케네디 대통령 재임 시기에 맥아더는 민간인 자격으로 백악관 자문역을 맡은 적이 있는데 바로 피그스만 사건과 베트남 전쟁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피그스만 사건 실패에 발뺌 하기에 급급한 펜타곤을 강도 높게 비판했고 강력한 직접 개입을 주장했다. 또한 베트남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개입을 중지하고 조속히 손을 떼야 한다고 주장했다. 도미노 이론에 대해서도 ‘핵(무기) 시대에 이 이론은 무의미하다’라며 회의적으로 평가했다. 그는 죽기 직전 린든 존슨 대통령에게도 비슷한 충고를 했다. 후일 베트남에 대한 지적은 미군의 패배로 맥아더의 시각이 옳았음이 증명된다. 혹자는 퇴임후에 더 안목이 높아졌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1962년 모교 웨스트포인트는 맥아더에게 실바누스 세이어 상을 수여했다. 맥아더는 이 자리에서 사관 후보생들 앞에서 ‘의무, 명예, 국가’라는 주제로 연설했다. 실바누스 세이어 상은 웨스트포인트의 아버지라고 일컫는 제5대 교장 세이어 ( Sylvanus Thayer)의 업적을 기려 제정한 상이다. 그해 제정됐다.
“내 그림자는 길어집니다. 황혼이 왔습니다. 나는 이제, 희미한 기상 나팔 소리를, 멀리서 들려오는 드럼 소리를 그리운 귀로 듣습니다. 그러나 내 기억의 황혼에서 나는 항상 웨스트 포인트로 돌아옵니다. 그러면 이곳에서는 의무, 명예, 조국 ( Duty. Honor. Country) 이라는 단어들이 또 다시 메아리칩니다. . 이 세 개의 신성한 단어는 용기가 시들 때 용기를 불러일으키고, 신념에 대한 정당한 이유가 없을 때 신념을 되찾아주며, 희망이 절망이 될 때 희망을 솟아오르게 합니다. 오늘이 여러분과 함께 부르는 이노래의 마지막이 될 겁니다. 그러나 내가 강을 건널 때에 내 마지막 생각은 부대와, 부대, 그리고 부대(The corps, and the corps, and the corps)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작별을 고합니다”
이 작별인사를 끝으로 1964년 4월 5일, 맥아더는 메릴렌드 윌터 리드 육군 의료센터에서 세상을 떠났다. 사인은 담즙 경변증. 향년 84세 였다. 그의 장례는 국장으로 치러졌다. 케네디 대통령은 1963년 암살되기 전에 그의 국가 장례식 계획에 흔쾌히 서명 했고 임종 당시 존슨 대통령은 개인적으로는 그와 사이가 좋지 않았고 몹씨 싫어 했음에도 모든 국민이 떠나간 영웅에게 부여할 수 있는 모든 영예와 감사를 베풀며 묻히도록 명령했다.
4월 7일, 그의 시신은 뉴욕시로 이송되어 12시간동안 공개되었고 그날 밤 워싱턴 의사당으로 옮겨졌다. 2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조문에 참가했다. 4월 11일에 그의 장례식이 버지니아 노포크의 세인트폴 성공회 교회에서 개최됐고 그는 어머니의 고향인 그곳 노포크에 묻혔다.
맥아더는 하늘이 낸 사람에 틀림없다. 하지만 하늘은 사자에게 날개까지 달아주지는 않았다.그의 평가에 대한 논란은 아직도 진행중이다. 그를 높이 평가하는 자료들도 산더미 처럼 많고 그를 폄하 하는 자료들도 그에 못지 않다. 특히 그의 평가는 한국의 현대사의 질곡과 그 궤를 같이 한다는것이 스테파노 카트라이트 신부의 생각이다. 멕아더의 예수는 어떤 예수였을까 .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