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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實錄)소설>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50)

안동일 작

전장의 예수,  교회의 예수

카트라이트는 진작부터 종교가 인생의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종교는 수단도 아니고 목적도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이 천주교인으로 태어나 사제가 된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감사하고는 있었지만 모든 사람이 그럴 수는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다. 또 종교만이 인생과 세상사의 전부라고는 생각지 않고 있었다. 그는 열린생각의 사제였다. 세상 모든이가 카트라이트가 믿고 있는 가톨릭을 따른다면 좋겠지만 그것을 강요하고 다른 사람의 종교가 잘못됐다고 배척 하고 무시할 권한이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카트라이트는 사람의 인생이 인간의 뜻대로 의지나 이성에 의해 더욱이 이른바 상식적으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인생의 시작과 진행 그리고 종말이  상식 차원에서 이해되고 설명 된다면 종교가 무슨 소용이 있냐는 생각이었다.  인간과 세상을 창조한 하늘의 깊은 뜻을 인간의 이성과 상식으로 재단 할 수 없다는 것은 사제로서 당연한 생각이었다. 그렇다고 사람의 인생이 하늘에 의해 속속들이  미리 정해져 있고 구원 마저 정해져 있다는 논리에는 승복할 수 없었다.

하늘의 뜻은 잘 알수 없지만 계속 찾으면서 의지하고 순종하는 태도를 보여야 한다는 것이  카트라이트의 생각이었다. 그것이 인생의 진정한 평화를 찾는 길이기도 했다.

포니를 보낸 하늘의 뜻은 무엇 이었을까?  냉담자였다면서도 그는 전장에서 예수를  보았고  만났다고 했다.

에드워드 포니(Foney) 는 1909년 8월 16일, 콜로라도주 덴버에서 태어났다. 1931년 해군사관학교를 졸업, 해병대 소위로 임관 후 태평양 전쟁에 투입돼  일본군을 상대로 솔로몬 군도와 파푸아 뉴기니의 전투에서 치열한 정글 전투를 치렀다.
맥아더 극동 사령관의 휘하에서 여러차례 상륙작전을 경험하고 팬타곤의 참모대학 과정을 이수하면서 그는 상이륙(上離陸) 작전 전문가로 이름을 쌓아나갔다. 1950년 7월 한국전쟁 참여와 함께 그가 기획한 포항 상륙작전은 낙동강 방어선이 설치될 무렵 최후의 보루인 부산수호를 위해 1만 명 이상의 병력과 2천 대의 차량을 투입하는 상륙작전이었다. 적이 미처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에서 작전은 성공적이었고 당시 제1기병사단의 병력증강이 적시에 이루어진 이 포항 상륙작전이 없었다면 낙동강 전선, 부산 방어는 불가능했다고 회자 된다.
그는 곧바로 맥아더의 지시로 인천상륙작전 주 설계자 그룹에 투입되었고 결과는 우리가 아는 대로 대성공이었다. 여기에 더해 그가 기획한 흥남 철수 작전과 민간인 수송은 군사 전략적, 인류 인간애적 측면에서 전사에 길이 남을 역사적 사실이 되었고 한국 정부는  무공훈장을 미군은 공로훈장 수여와 장성승진으로 보답한다. 그는 한국 보훈처가 선정한 12월의 6.25 전쟁영웅이기도 하다.
그는 평생을 전장에서 보냈다. 한국에 꽤 오래 머물며 한국 해병대 기틀 마련에 크게 기여했고  베트남 전쟁에도 초기부터 참전했다.  폐암이 발병해 본국으로 급거 귀국해야 했고 1965년 1월 21일, 56세의 한창 나이로 고인이 되었다.

포니의 부고가 알려졌을 그 무렵 카트라이트는 로마에서 유학생활을 끝내고 예수회 소속 사제로 한국의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을 때 였다.

그 선량했던 미남 해병 장교의 얼굴을 떠 올리며 카트라이트는 충심의 명복 기도를 올렸다.  포니의 인생에 있어 하늘은 나름대로의 소명과 역할을 부여했고 그는 의지를 갖고 짧다면 짧았던 인생에서 이를 수행했다. 하늘은 포니에게 자신이 선택한 약속의 땅  한국과 인연을 계속 가질 것을 명령했던 것이다.

에드워드  포니의 아들 에드 주니어 포니는 그때 아버지의 대를 이어 해병 장교로 베트남전에 참전해 있었다.  주니어는 미국으로 날아와 아버지 포니 소장(추서)을 알링턴에 안장하면서 ‘셈퍼파이를 ‘ 복창했다.  그리고 그의 손자 네드도 해병 장교 출신이다.  네드는 노르웨이 주재 나토 일원으로 근무하면서 3대 해병대 명문가를 이뤘다.  그의 아들과 손자는 한국과 인연을 맺어 군문에 들기 전에  두사람 다 평화 봉사단 활동을  했고  군문을 나와서는 한국에 관한 글을 썼다.  위 사진은 포항 해병기지 안  할아버지 기념비 앞에 선 네드 포니와 그의 부인의 모습.

후일의 일이지만 그의 증손자 벤은 아예 한국으로 들어와  참전용사 후손 장학금을 받아 서울 대학,  학부를 거쳐  대학원을 나와  ‘한미 외교정책 결정 과정에 관한 연구’ 로 박사학위 까지 받았고  유창한 한국어를 구사하는 파란눈 한국인으로 민간 외교안보 연구소인 아산정책연구원에서 일하고 있다. 그의 집안은 후손을 빨리 본다.

포니가 세상을 떤난  65년 그무렵 그 무렵 포니 말고도 한국인들에게 흥남 철수작전 영웅으로 꼽힌 6명의 근황은 영욕과 부침이 함께 하면서 세 사람이 세상을 떠나 있었다. 김백일과 맥아더, 포니가 세상을 떠났고 알몬드는 중장으로 예편한 뒤 본국에서 보험회사 중역으로 일하고 있었고 박시창은 육군 소장으로 예편한 뒤 은둔생활을 하고 있었으며 현봉학은 미국에서 의사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레너드 라루는 규율 엄한 뉴지저의 베네딕토 수도원에서 힘든  수사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주기도문을 늘 외우면서 하늘의 뜻이 자신에게 있고 하늘은 늘 자신의 편이라고 확신 했던   맥아더의 인생에 하늘은 어떤 역할을 했을까.

51년 4월 초순, 부산 8군 사령부 군종실에 있었던 카트라이트는 맥아더의 해임소식을 듣고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때 트루먼과 맥아더의 갈등은 카트라이트 생각에도 도를 넘어 서고 있었던 것이다.
해임소식은 언론을 통해 먼저 발표 됐다. 4월 11일 오전 1시. 백악관 공보비서가  특별기자 회견을 갖고 맥아더 유엔군총사령관의 해임을 발표했다. 시차가 있어 11일 오후가 된 도쿄와 서울의 라디오 방송은 정규방송을 중단하고 맥아더 해임 소식을 긴급 뉴스로 전했다.

트루먼은 당초  국무장관이  주한대사에게 명령서를 전문으로 보낸 뒤 마침 방한 중인  육군장관이 도쿄로 가서 직접 전달해 예우를 갖출 계획이었다. 그런데 시카코의 한 언론이 11일 조간으로 보도할 것으로 알려져 부득이 긴급 발표하게 됐던 것이다.

맥아더는 아내로부터 자신의 해임 보도를 전해 들었다.  이튿날인 12일이 되서야 해임 명령서가  도착했다. 트루먼은 합참의장 브래들리의 서명 하에 맥아더에게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려 해임시켰다.

“나는 당신을 연합군 최고사령관 직에서 교체하는 것이 미국 군대의 사령관으로서 내 임무가 된다는 것에 깊이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매튜 리지웨이 대장에게 즉시 지휘권을 넘기라. 귀하는 귀하가 선택한 장소로 여행하는데 필요한 명령을 발급할 권한이 있다. 귀하의 교체 사유는 상기 주문에 대한 귀하의 확인과 동시에 공개되며, 다음의 메시지에 포함될 것이다.”

다음 메시지가 이랬다.  “심히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맥아더 육군 원수가 공적인 직무와 관련된 문제에서 미국 및 UN의 정책을 성심껏 지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군 사령관이 법과 헌법에 의한 정책 및 명령에 의해 통할되는 것은 기본 원칙이다. 당신이 나라에 바친 탁월하고도 유례없는 공헌에 깊은 감사의 뜻을 가지고 있어 해임 조치를 다시 한번 유감으로 생각한다.”
이처럼 트루먼은 그가 명령에 따르지 않아 해임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명확히 했다.

당시는 유엔군이 서울을 재 탈환한  이후 약 2개월간의 ‘휴지기’였다. 하지만 곧 중공군이 70만 명을 동원한 ‘1차 춘계 대공세’를 벌이기 직전으로  6·25 전쟁은 급류속이었다. 그런데 16개국 UN군 수장이기도 한 장수를 전격 경질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해임 발표가 나오기 나흘 전인 4월 7일, 국무부, 국방부, 합동참모본부의  연석 회의에서 맥아더 해임에 만장일치로 의견을 모아졌다. 심지어 이미 2년 전 극동군사령관 등에서 해임되어야 했다는 결론이 나왔다고 트루먼에게 보고했다.
‘맥아더 해임’은  이른바 ‘확전론’과 ‘제한론’의 갈등에서 임계치를 넘어 폭발했던  전쟁 수행 방식 이견 때문만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수면 아래에서 잠재되어 있었던 것이다.

휴화산이었 맥아더 해임은  해임 결단 이전 보름 남짓 기간에 벌어진 두 사건이 트루먼의 표현대로 ‘선을 넘은’ 것으로  해임의 화산 폭발을 불러온 마지막 두 개의 폭탄이 었다.

첫째는 맥아더가 트루먼의 휴전협상 의지를 정면으로 거스른 3월 24일의 성명이다.
동경에서 발표된 맥아더의 성명은 이랬다.  “적의 인해전술은 우리 군대가 익숙해져 쓸모없게 되었다. 그들의 열악한  생산기반과 원료로는 중등 정도의 공군과 해군을 편성 유지하는 것도 부족하다. 대량파괴수단의 발전으로 단순한 병력 수만으로는 약점이 만회되지 않는다. 군사작전을 중공 연안과 내륙기지까지 확대하면 중공은 군사적인 붕괴 위험을 면치 못할 것이다. 지금 단계에서의 ‘제한전’ 이야기는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것이다.”
밀리는 적을 확실히 밀어붙이고 중국 대륙까지 확전하자는 것이었다. 더욱이 대량 파괴수단 핵폭탄까지 언급하고 있었다.
트루먼은 며칠전 공산군이 38선 이북으로 후퇴한 뒤 평화적인 해결방법을 모색하는 선언 초안을 준비해 참전국과 맥아더에게도 보냈었다. 맥아더의 이 성명은 휴전을 거부하는 확전 위협으로 간주됐다. 국무부는 우방국에 맥아더의 회견은 워싱턴의 승인을 받지 않은 독단적인 것이었다고 황급히 해명해야 했다.

트루먼은 이렇게 얘기 했다.

“외교정책에 관한 어떤 발언도 삼가하라는  지시를 전적으로 무시한 행동이었다. 대통령이며 최고사령관인 나의 명령에 공개적으로 불복하는 것이었다. 이는 헌법에 따른 대통령의 권한에 대한 도전이자 UN의 정책을 우롱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의 불복에 더 이상 관용을 베풀수가 없었다.”

그는 맥아더를 용인하면 문민우위의 헌법을 수호하겠다고 한 서약을 위배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트루먼에게 맥아더 해임은 헌법을 수호하는 일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하늘은 그 쯤에서 참혹한 전쟁을 그치고 휴전하라는 쪽으로 자신의 뜻을 정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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