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nykorea
연재소설 타운뉴스

<실록(實錄)소설>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48)

 안동일 작

흥남 그리고 크리스마스의 기적

예민참모는 대민 관련 업무를 총괄하는 직책으로 후일 민사참모 혹은 사단에 따라 민심참모로 개칭된 직책이다. 박시창 대령은 한국군 1군단의 예민참모로서 그 직무에 의해 민간인 피난민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야 했다.
현봉학은 박시창이 함흥에서 트럭 주인들을 설득해서 이를 동원해 피난민들을 흥남부두로 나르는 광경을 목격했고 트럭에 동승하기도 했다는데 박시창이야 말로 인품이 남다른 군인이었다고 말했다.
“전시이기 때문에 민사참모로서 징발권을 행사 해도 될텐데 간곡한 설득을 하더군요. 그리고 국군 대령이 조수석에 앉아 있으니 미군 헌병들도 전혀 뭐라 하지 않고 통과 시켜 줬습니다. “
하지만 그 인원은 소수 일 수 밖에 없었다. 대부분 현이 천거한 함흥지역 기독교 인 이었다.

박시창이야 말로 참 군인이이라고 현봉학은 말했다. 나이로 보면 군단장 김백일 보다 17살이나 많았다고 했다. 깜짝 놀랄 얘기였다. 그래도 깍듯했단다. 이어 군단장 김백일 준장이 현봉학과 거의 같은 또래라는 말을 듣고 카트라이트는 또 놀라야 했다. 급히 군을 창설 하다나니 20대 초반에 장군이 된 사례조차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미군 장성들이 한국군을 우습게 보는 것은 당연했다.
박시창은 1900년생, 김백일은 1917년 생이란다. 김백일은 만주군관 학교를 나왔고 박은 중국 황포군관학교를 나온 임시정부 군사조직인 광복군 출신이라고 했다. 게다가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독립지사이자 문필가인 박은식 선생의 아들이라는 것이었다.

당시 한국군 장교 장성들은 일본군 만주군 출신들이 득세 했고 상대적으로 중국군 광복군 출신은 찬밥 이었다.  실은 이때 뿐이 아니다. 나중의 일이지만 김백일과 같은 1917년생으로 만주군관학교 출신인 정일권은 이듬해 참모총장에 올랐고 역시 동갑인 박정희는 한참 뒤의 일이기는 하지만 대통령에까지 오른다.  박정희는 만군학교 2기 졸업생으로 나와 있고 김백일과 정일권은 은 5기, 같은 만군학교 출신으로 또 한명 유명한 군인인 다부동 전투의 사단장 백선엽은 이들 보다 3년 늦은 20년 생으로 졸업도 마지막 기수인 9기로 돼 있다.

이들 만주군관 학교 출신들은 해방 직후 육사의 전신이라는 군사영어 학교와 조선 경비대 사관학교를 속성으로 마치고 고속 승진을 했지만 임정과 행동을 같이 하느라 늦게 귀국한 박은 47년이 돼서야 군에 들어왔기에 그들 밑에 있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했단다. 군사영어학교 교육이수자 ‘ 110명 중 108명이  학병을 포함한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 이라고 나온다.  수료한 이들 중 중국군(광복군 포함)은 두명 뿐이다.

그럼에도 박시창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묵묵히 맡은 일을 했단다. 실제 박시창은 최후의 순간까지 흥남 부두에 남아 있다가 민간인 승선을 끝낸  12월 24일 오후가 돼서야 마지막 출항선인 전함 마운트 메킨리호에 승선해 부산으로 돌아 온다.

박시창 대령은 흥남 부두에서도 피난민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 등을 제공하기위해 애를 썼고 한 사람이라도 더 태우기 위해 미군들과 실랑이를 벌였던 모양이다. 사람의 진심은 통하는 법, 많은 피난민들이 그의 정성을 기억했고 그래서 후일 그의 초상이 기념비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박 대령과 함께 군단 민사부장으로 유원식 소령의 역할이 컸던 것으로 증언하는 사람이 많으며,  또한 헌병참모 김득모 소령도 끝까지 남아 피난민 보호에 큰 역할을 수행했다고 기록돼 있다. (아래사진 왼쪽 세 사람은  맥아더, 알몬드, 포니 오른쪽은 김백일, 현봉학, 박시창)

피난민의 승선은 대부분의 군병력이 승선을 마친 12월 19일 부터 시작 됐는데 역시 수송할 배가 문제였다. 탑재 책임자 포니대령의 활약이 돋보이는 순간이다.
포니는 이미 군병력을 각 항구에 내려놓은 LST들을 선수를 다시돌려 흥남으로 오게 했다. 상륙함인 LST는 해병 직속이었다. 해군 수송선이며 순양함 구축함도 사람을 실을 수는 있었지만 모두들 펄쩍 뛰며 난색을 표했고 조금의 여지도 없었다.
포니 대령은 민간 상선, 수송선들에 급히 연락을 취했다. 당시 한반도 수역에서 취역하고 있는 민간 화물선은 그리 많지 않았다. 미국 국내 전쟁이 아니었기에 무조건 징발 할 수도 없는 터였고 계약에 의한 군의 수송 의뢰를 맡은 형식 이었다. 포니는 거의 단파 방송을 하는 수준으로 해상의 민간 선박들에게 흥남항으로 들어올 수 있는지 타전 했고 대부분 사정이 있었고 더러는 핑게를 대면서 올 수 없다고 했지만 몇 몇 배들이 이에 응해 흥남으로 달려 왔다. 매러디스 빅토리호도 그중 하나였다. 메러디스 말고도 미국 해양 운송회사인 무어-맥코맥사 소속의 빅토리호 3척이 흔쾌히 달려온 것이 너무도 고마왔다. 메러디스의 쌍동이 선박인 레인호와 같은 급인 버지니아 호가 이들인데 동료 선장인 레너즈 라루의 영향력이 컸던 것으로 확인됐다.

배가 마련되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알몬드는 4만명 까지의 민간인 승선을 동경으로 부터 내락 받았다고 포니를 격려 했다. 한껏 고무된 포니는 결국 4만의 배가 넘는 9만 8천 명을 억척스레 승선 시켰다. 알몬드는 이를 알면서도 역정을 내지 않고 묵인했다.
생전의 포니는 자신을 잘 표현하지 않았는지 그에 대한 기록이 많지 않은 편이다. 영웅의 행적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 법일까?  그는 외국 군인으로는 유일하게 한국군 기지 내에 ‘포니로(路)’라는 자신의 이름을 기린 도로를 가지고 있다. 지금부터 10여년 전인  2010년 11월,  포항에 있는 한국 해병대 제1 사단에서는 “포니 路” 명명식과 그의 기념비 제막식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그를 몰랐고 또 잊었어도 양의 동서를 넘어 ‘한 번 해병이면 영원한 해병’인  후배들은 그의 공로를 잊지않고 있었던 것이다.

포니 대령이 계속 배를 수배 하느라 동분서주 하면서 철수가 진행되는 동안 알몬드 장군은 3인승 개량 L-19기를 타고 흥남부두 위를 시찰 비행했다. 헤이그 대위와 함께 였다. 헤이그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썼다.
<보잘것없는 살림살이를 든 많은 피란민들이 우리 군인들과 뒤섞여 있었다. 육군과 해병대는 이들이 다시 돌아오고 있는 공산 정권을 피하기 위해 필사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마지막 순간에는 얼마나 필사적이었는지 잊을 수 없을 정도로 분명해졌다.
항구에 정박 중인 우리 미국 배를 향해 수만 명의 피란민들이 차가운 바닷물을 헤치면서 걸어가고 있었다, 비행기가 부두에 가까이 다가가자 엄마 등에 엎혀 있던 어린 아이 하나가 손을 흔들었고 이내 모든 사람들이 하늘을 쳐다 보며 손을 흔들었다. 바다물 속에 다리가 잠겨 있던 청년은 펄쩍 펄쩍 뛰면서 두손을 흔들었다.
사람들은 마치 이 비행기에 철수작전의 총지휘관이 타고 있다는 것을 아는 듯 했다. 10 만이 넘는 군중들이 함성을 지르며 손을 흔들고 있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프로펠러 소리 때문에 들리지 않았지만 저들은 최대로 열심히 손을 흔들고 함성을 질러야만 승선을 허락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 했다. 알몬드 사령관은 그 모습을 내려다 보면서 내게 이렇게 얘기 했다. “이봐 대위, 우리는 이 사람들을 놔두고 갈 수 없겠지? 그래, 모두 구출해야 해” >

12월 19일부터 피난민 철수에 할당된 선박은 총 12척, 출발 이후를 걱정 할 틈도 없이 콩나물시루같이 피난민이 적재(?)되었다. 피란민을 태운 미군 함정과 민간 선박들, 그리고 그들이 실은 피난민의 숫자는 다음과 같다.
메러디스 빅토리호: 14,500명, 버지니아 빅토리호: 14,000명, 레인 빅토리호: 7,000명, 마다케츠호: 6,400명, 토바츠 마루호: 6,000명, 요나야마 마루호: 3,000명, BM 501: 4,300명, LST 074: 3,500명, LST 081: 4,000명, LST 661: 9,400명, LST 666: 7,500명, LST 668: 10,500명. (유엔사 발표)

10군단이 미처 배에 다 싣지 못하고 항구에 남겨둔 여러 물자는 중공군에게 넘겨주지 않기 위해서 마지막 배가 흥남을 벗어나는 순간 흥남 부두의 항구 시설과 함께 모두 폭파됐고, 군인들과 피난민들은 그 폭파의 현장을 보면서 흥남을 떠났다.
흥남 부두에는 천지를 흔드는 폭발음과 섬광이 불꽃처럼 터졌다.  피란민 때문에  싣지 못한 다이너마이트 400여톤, 폭탁 227톤, 휘발유 200여 드럼을 폭파시켜야 했던 것이다.
마지막 드럼통이 터지는 것을 지켜본 사람은 10군단장 알몬드 소장과 미해군 90상륙지원단장 제임스 도일 제독이었다. 이들이 인천상륙작전의 기함이었던 마운트 맥킨리호를 타고  흥남항을 떠난 시간은 24일 크리스마스 이브 오후16시 32분이었다.  최고책임자는 언제나 마지막에 떠나는 법이다.  포니도 박시창도 이 전함에  승선하고 있었다. (계속)

Related posts

‘재외동포기본법’ 제정을 서둘러야

안지영 기자

파라마운트, 스카이댄스와 합병 합의…

안지영 기자

한국계 미국인 작가 문학 부문 퓰리처상 수상

안지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