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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ptember 19,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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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實錄)소설>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46)

 안동일 작

흥남 그리고 크리스마스의 기적

포니 대령이 토비 주교에게 맥아더 장군을 역사에 남는 인물이 될 것이라는 말로 설득 하라는 조언은 참으로 적절한 조언이었다.
맥아더 장군은 원수라는 계급이 상징하듯 미 육군사에 있어 가장 뛰어난 장군의 한 사람 이었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웨스트 포인트를 전무후무한 성적으로 수석 졸업한 그는 미군 최연소 소장 진급의 기록을 갖고 있으며 1930년 후버 대통령 때는 최연소 대장 진급을 이룬 뒤 미국 13대 육군 참모총장이 돼 5년간 재임했다. 이때 1차대전 때 약속한 특별 수당을 왜 지급하지 않느냐고 제대 군인들이 시위를 벌였을 때 이를 무력으로 진압해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한 이른바 보너스 군대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가 6.25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바로 인근인 동경에 있지 않았더라면 한국의 운명이 어찌 되었을 지 모를 일이다. 또 그 절실 했던, 적절한 순간에 5천분의 1의 성공 확률이라는 인천 상륙작전을 성공 시키 못했더라면 이 나라의 운명은 어찌 되었을까?  또 어떤 설득의 과정을 거쳤건 그가 결단을 내리지 않았더라면 ‘적국의 양민’이 상대국의 군대를 쫒아 10만명 씩이나 따라나서는 현대판 모세의 기적, 1950년 크리스 마스의 기적은 일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카트라이트는 다 하늘의 안배였고 하늘의 뜻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맥아더 원수 그가 고압적이고 도도하며, 이기적이고 잘난체하는 사람이라는 평가도 있지만 그의  부하, 사령부 직원들 가운데는 다정하며 용기있고 가식이 없는 사람이라는 상반된 평가를 하는 사람도 많다.
필리핀 총독을 지낸 부친에 이어 그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고 철저한 반공 주의자였다. 맥아더는 자신의 연설 마지막에 자주 주기도문으로 끝마치는 버릇이 있어 ‘주기도문 맨’이라는 별명이 따라다녔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시 연설에서, 그리고 9.28 서울 수복 후 중앙청 연설에서도 그는 주기도문으로 연설을 마무리 했다. 보너스 군대 사건도 하늘을 따르지 않는 공산주의자들의 준동으로 파악 했기에 강경책을 마다치 않았다.

“오, 주여!, 내 아들이 이런 사람이 되게 하소서. 약할 때에 자신을 분별할 수 있는 힘과 두려울 때 자신감 잃지 않는 용기를 주소서. 정직한 패배 앞에 당당하고 태연하며, 승리의 때에 겸손하고 온유한 사람이 되게 하소서.”
“Build me a son, O Lord, who will be strong enough to know when he is weak, and brave enough to face himself when he is afraid; one who will be proud and unbending in honest defeat, and humble and gentle in victory.”
이렇게 시작되는 그의 ‘아들을 위한 기도’는 그의 신앙과 교육관 그리고  가정관을 나타내는 글로 널리 인용되는  글이다.  여기서 맥아더는 “ 그를 편하고 안락한 길로 인도하지 마시고 고난과 도전의 긴장과 자극 속으로 이끌어 달라” 면서 “폭풍 속에서 의연히 서 있는 법을 배우게 하시고 실패한 이들에 대한 연민을 알게 해 달라” 는 감동의 기도를 올리고 있다.
1964년 4월 10일, 그의 타계 직후 뉴욕 타임즈가 ‘맥아더, 영적인 유산을 남기다 : 아들을 위한 기도’ (MacArthur Leaves A Spiritual Legacy: Prayer for His Son) 라는 제목으로 그의 전기 작가를 통해 발굴 확인해 크게 보도 했다.
이 아들을 위한 기도문은 그가 재혼 후 58세 때(1938년) 본 아들을 위해 1940년대 초 태평양전쟁 당시 필리핀에서 만든 것이다. 그의 첫 결혼 상대는 자식이 둘이 있는  이혼녀,  부유한  동갑의 사회 활동가 루이스 크롬웰 브룩스 였고 두번째 재혼 상대는 18세 연하의 여행기 자유기고가 진 페어크로스 였다.  7년간 비교적 짧게 이어졌던 첫 결혼에서는 자식이 없었고 처녀장가 였던 두번째 결혼에서 늦둥이 외아들을 얻었다.

아무튼 그가 자신의 명예를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스타일에 유난히 신경썼던 이른바 ‘폼생 폼사’의 장군이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언제나 뛰어난 언론 플레이를 선보이며 자신을 화제의 중심에 있게 만들려 했고 부하들이 자신을 제치고 유명세를 타는 것을 원치 않았다. 자기 관할의 모든 보도 자료에 공식적인 oo군 사령부가 아닌 자신 이름의 ‘맥아더 사령부’라고 표시하도록 했다.
그 바람에 참모본부, 해군, 해병대 등이 들러리가 되어야 했고  그의 적은 늘어났다. 심지어 대통령도 그가 자신을 무시하고 있다는 인상을 자주 받는 다고 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그의 특유의 패션(빳빳하게 각을 세운 바지와 썬글라스, 담배 파이프)을 두고 “70대의 원수가 20대 소위처럼 하고 다닌다.”며 못마땅해 했다.  또 “누가 대통령이야? 자기가 마치 대통령이나 되는 듯이 행세하고 다니잖아!”라는 말도 남겼다.
그의 오랜 부관 아이젠하워는 “나는 7년 동안 그의 아래에서 필요악 적인  ‘연극적 과장’을 배웠다.”고 말했으며, 해군 니미츠 제독은 책상 위에 맥아더 사진 액자가 왜 있냐고 묻는 정보 참모의 질문에 계면쩍었는지  “그건 나에게 제우스처럼 벼락까지 쳐가며 요란하게 떠드는 얼간이(horse’s ass)가 되지 말라는 점을 상기시켜 주거든.”이라고 역설적으로 답하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이런 그에게 명예를 드높이고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다는 설득은 신의 한 수였던 것이다.
그런데 같은 부관 출신이라도 알몬드는 달랐다. 알몬드에게 있어서 맥아더는 거의 신이었다. (실제 일본과 한국의 무속인 가운데는 그를 장군신으로 떠 받드는 무속인들도 꽤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인천 상륙 작전때의 유명한 사진, 전함 메킨리호 선상의 광경을 보면 맥아더 옆에서 설명을 하는 투스타 알몬드의 태도와 표정에서 그의 신심에 가까운 존경심을 여실히 읽을 수 있다.
알몬드는 한번도 자신의 주군과도 같은 맥아더의 명령에 토를 단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 흥남 철수 작전 민간인 수송 문제에 있어서 만큼은 역정을 들어 가면서도 직언을 여러 차례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알몬드를 이렇게 변하게 한 일등 공신이 닥터 현, 현봉학 이다. 세브란스 출신 의사로, 미국 유학을 했던 현봉학은 묘한 인연으로 미 제10군단에 근무하게 된다. 그 사연은 매우 운명적이었다.
1950년 6월28일 서울 함락 때, 그는 귀가할 여유조차 없어 그냥 피난민 대열에 섞여들었다. 그는 피난지 부산에서 해군에 입대했다. 미국 유학에서 귀국한 지 3개월, 그는 의사로서 보다도 고급 영어를 하는 통역관으로 중용되었다.
10월 중순, 현봉학 한국 해병 통역관은 미 제10군단장 에드워드 알몬드와 처음 만났다. 알몬드가 마침 38선 북쪽 금강산 남쪽인 강원도 고성에 주둔했던 해병대사령부를 방문, 신현준 해병대사령관과 회담할 때 현이 통역으로 배석했다. 알몬드의 참모장 포니도 동행했었다, 회담이 끝나자, 알몬드의 시선은 통역관으로 향했다.
군내에 영어를 제대로 말하는 한국군이 그리 많지 않았던 시대였던 만큼 당연한 관심이었다.
“귀관의 고급영어에 깜짝 놀랐다. 어디서 배웠는가?”
현봉학은 이때 28세. 알몬드는 그 두 배의 연령이었다.
“버지니아주 리치몬드에서 배웠습니다.”
“버지니아? 놀랄 일이네. 나는 루레이 출신이야, 유명한 종유동굴이 있는 곳, 같은 버지니아지. 리치몬드에서 그리 멀지 않아. ”
“루레이 종유동굴, 저도 그 곳을 가봤습니다..”
“그레이트! 수만리 떨어진 한국 땅에서 내 고향을 잘 아는 청년이 있다니… 그럼, 자네는 버지니아주립대 의대에 다녔겠군.”
“그렇습니다.”
“귀관의 출신지는?”
“함경남도 함흥입니다.”
현봉학은 함흥의  신망있는 개신교 목사의 아들이었다.
“뭐라고? 우리는 영어를 잘 하면서 함경도를 잘 아는 사람을 찾고 있어. 자네가 딱이야!”
함흥에 사령부를 설치할 계획인 미 제10군단은 영어를 하는 현지인이 없어 몹시 난처해 하던 참이었다. 현봉학의 등장은 안성맞춤이었다. 알몬드는 신현준 사령관에게 강청해, 현봉학을 미 10군단의 민사부 고문으로 스카웃했다. 참모부장 에드워드 포니 대령이 옆에서 강력히 거들었다. 전날 밤 고향 함흥에서 교회 친구들과 뛰노는 꿈을 꿨던 현봉학도 상당히 들떴다고 한다.

이 만남이 두달 여 뒤 흥남철수작전 민간인 수송으로 이어져 알몬드와 포니는 ‘한국의 쉰들러’로 칭송 받게 되는 현봉학과 함께 적어도 한국내에서 만큼은 맥아더와 더불어 역사적 인물이 됐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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