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일 작
장진호 그리고 황초령
카트라이트가 한국인들에 대해 이런 생각을 갖게 된 것은 연원이 있는 일이었다. 당초 이 말은 무려 350년 전에 이곳 한국에 왔던 한 천주교 사제가 한 말이었다. 카트라이트에게 더 의미가 있는 것은 천주교 사제로서는 이땅을 처음 밟았다는 그가 바로 군종신부였다는 점이다.
대신학교, 세인트 조셉 세미나리에 다닐 때 선교역사를 가르치던 쉐르하머 신부 교수의 강의에서 들은 내용이었다. 쉐르마허 신부는 자신도 예수회 소속이기도 했지만 예수회 서간문 연구의 일인자였다. 5백년 역사의 선교 제일 예수회의 서간문은 천주교사에 있어 엄청난 가치와 의미를 지닌 문서였다.
각지의 선교사들이 본부에 보낸 수천 수만통 서한들이다. 거기에는 각 지역의 사정은 물론 역사 문화 그리고 선교사들의 고군분투와 신앙의 이야기가 오롯이 담겨 있었다.
그때 강의로 들었던 것은 로드리게스라는 일본에 파견돼 있었던 예수회 소속 사제단 주교신부의 1600년대 초반 서한들 이었다. 로드리게스 신부는 이 서한들을 묶어 몇년 뒤 ‘일본 선교사’ 라는 책으로 펴내기도 했다는데 그때 쉐르마허 교수는 조각 서한들로 강의를 이끌어 갔었다.
그 무렵 일본은 조선을 침략하는 전쟁을 일으켰는데 그 전쟁에 종군 신부가 있었고 그 신부가 조선에서 상급자인 로드리게스 주교신부에게 보낸 보고 서한에 조선인들의 심성에 대한 내용이 있었는데 바로 그 얘기였다. ‘혼란의 와중에 조선 사람들은 자신보다 어려운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인정이 있었고 작은 일에도 감사 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특히 부모와 나이많은 사람들에 대한 공경은 대단하다.” 는 대목이다. 그러면서 일본군 종군신부(세스페데스)는 조선이야 말로 천주의 가르침을 스스로 실행하고 있는 백성들이 사는 나라라고 했던 것이다. 이 이야기는 추후 따로 자세히 다루기로 한다.
눈에 밟히는 이런 ‘백성’들을 뒤에 두고 또 더러는 길가에서 그들의 처참한 상황을 목도 하면서 카트라이트의 5연대는 12일 오전에 흥남에 도착 했다.
유담리를 떠난 11월 27일부터 17일간 140km의 혈로를 뚫고 흥남까지의 장정에 마침내 성공한 것이다. 5연대는 반쯤 무너져 있던 흥남 시내 위생병원에 캠프를 차리고 휴식과 정비에 들어갔다.
산악 지대를 벗어나니 신기할 정도로 따뜻해졌다. 대부분 병사들이 동상으로 얼어붙어있던 상처들이 녹아 피가 터지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해병대원들은 행복했고 사기충천해 있었다. 해병들의 머릿속은 함흥 흥남에 강력한 교두보를 구축해 겨울을 난 후 반격할 생각에 가득 차 있었다. 후송되는 부상자들도 그때의 반격에 참가하겠다며 자기를 빠트리지 말아 달라고 소대장 중대장 들에게 당부를 거듭할 정도 였다.
하지만 12월 10일 이미 알몬드의 제10군단은 한반도 동북부에서 해상을 통해 부산 포항등 후방으로 완전 철수하라는 동경 사령부 맥아더 사령관의 명령을 받고 있었다.
그때 함흥 지역에 집결한 병력은 총원 10만 5천명에 전차 및 기타 차량 1만 7,500대였다. 전체 병력은 중공군을 상회했고, 압도적인 항공 전력에 해상과 공중의 보급까지 막강 했기에 전열을 가다듬고 다시 붙어볼만 했지만 도쿄에 있는 사령부가 싸움을 포기했던 것이다.
육로로 철수하지 못하고 흥남을 통해 해로로 철수해야 했던 이유는 철수 당시 함흥-흥남 일대를 제외한 함경도 전역이 중공군 수중에 넘어간 상태로 12월 9일에 중공군이 원산까지 점령하면서 퇴로가 끊겼기 때문이라고 했다. 시간과 엄청난 노력을 들여 철수 하느니 오히려 적의 후방을 교란 하며 승기를 잡을수도 있었는데 말이다.
유엔군 사령부는 해상 철수가 이루어지는 흥남항 부두를 중심으로 A구역부터 F구역까지 방어선을 설정하고, 유엔군과 한국군의 철수를 준비했다.
사령부는 대 병력을 후퇴시키기 위해 정규항모 4척, 경항모 1척, 호위항모 2척을 배치했다. 화력지원용으로 중순양함 2척, 구축함 6척, 로켓함 3척이 배치되어 총 2백 척이 됭케르크 철수작전 이후 최대 규모의 해상 철수 작전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중국은 장진호 전투를 ‘항미원조’(미국에 맞서 북한을 도움)의 대표적 승전으로 부각한다. 어쨌든 장진호에서 미군을 몰아냈으니 이겼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총 17일간의 장진호 사투에서 해병 1사단은 4,418명의 사상자와 대부분 동상 환자였던 7,313명의 비전투 부상자를 냈다고 해병 전사에 기록돼 있다. 기록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해병대 병력 1만5000명 가운데 전사 604명, 실종 192명, 부상후 사망 147명 부상 3485명, 비전투 손실 7338명의 피해를 보았다. 중증 동상 환자만 1500여명이었다. 의외로 전사자수는 그리 많지 않다.
중공군의 피해는 훨씬 심각했다. 전사 2만5000명에 부상자가 1만2500명으로 추산됐다. 중공군의 피해는 미군 대비 10배가 넘었던 것이다. 중국은 외부 공개를 꺼려 공식 기록을 기밀로 묶고 제한된 연구자에게만 열람을 허용했기 때문에, 그동안 장진호 전투에서 중공군이 피해를 얼마나 입었는지는도 간접적 추산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2000년대 이후가 되서야 여러 경로로 중국측 자료들이 공개되며 이전보다 상세한 숫자들이 알려졌다. 이 자료들을 인용하는 제9병단의 피해 규모는 전투손실이 사상자 1만 9002명, 대부분 혹한 속 동상이 원인이었던 비전투손실이 사망자 약 4천 명 포함 2만 8954명에 달해 전체 사상자 수는 약 4만 8천 명으로 발표되고 있다.
공식 기록이라 해도 실제 피해를 축소하는 경향이 강하므로 실제 피해는 분명 이보다 더 컸을 것이다. 당시 제9병단이 마오쩌둥에게 보고한 전문에 실린 통계에 근거해, 오늘날 반 공식적으로 인정되는 최종 사상자 수는 전투손실 19,202명, 비전투손실(주로 동상) 28,954명으로 도합 48,156명이다. 중국 문헌들에서는 제9병단 전체 병력을 15만 명으로 잡아 장진호 전역에서 입은 병단 전체의 사상자 비율을 32%로 제시하고 있다. 사상자가 30%만 나도 전투력을 사실상 상실한다.
중요한 사실은 해병 제1사단을 괴멸시키겠다는 중국의 의도와는 달리 수적으로 괴멸적 피해를 당한 중국 제9병단은 거의 와해됐다는 사실이다. 장진호 전투 피해로 전투 기능을 상실한 9병단은 미군이 떠난 함흥 일대에서 머물며 4개월 동안 부대정비를 하느라 이듬해인 1951년 1월4일 서울을 점령했던 중국군 제3차 공세에도 참가하지 못했다. 당시 중국군은 수원에서 남진을 멈췄는데 만약 9병단까지 3차 공세에 가세했다면 대전까지 진출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서부전선 중공군의 18개 사단만 참가한 3차 대공세에, UN군은 서울까지 빼앗기며 물러나야 했는데 만약 동부전선 12개 사단이 온전히 공세에 참가했다면 UN군은 훨씬 위태로웠을 것이다.
그때 유엔군은 한반도를 버리고 제주도로 철수까지 고민했다. 해병 1사단이 9병단의 발목을 잡아 와해 시키지 못했다면 미국은 한반도를 포기했을지도 모른다는 게 전쟁사 전문가들의 얘기다.
이 때문에 한미 전쟁연구자들은 장진호 전투를 두고 중국이 ‘전투’에서 이겼더라도 ‘전쟁’에선 못이겼다고 평가한다.
카트라이트는 그때도 그랬지만 후일에도 자국의 애꿎은 청년들과 선량한 한국 백성들을 처절한 고통으로 몰아 넣었던 중국군의 참전에는 결코 하늘의 뜻이 없었다고 단호하게 여기고 있다. 당초 이 전쟁을 일으킨 저들 공산 권력자들이 말하는 인민의 해방, 민족해방이란 것이 하늘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었던 것 처럼.
카트라이트 소령은 흥남에 도착 하자 마자 5연대 병사들을 캠프에 두고 10군단 군종 참모본부로 달려 갔다. 당초 함흥지역 진출 때는 군단 본부를 비롯해 대부분의 참모부가 함흥에 자리 했었는데 전황이 치열해 지자 모두 흥남으로 이전해 있었다. 흥남은 함흥의 항구이고 두 도시는 연장 15마일의 좋은 시멘트 포장도로로 연결되어 있었다.
군단 군종실은 신학교 동기인 패트릭 클리어리 중령이 실장을 맡고 있었다. 군종실에는 개신교 군목들이 훨씬 수도 많았는데 그때 동경 사령부 군종센터도 그렇고 10군단 군종실도 공교롭게도 가툴릭 군종 신부들이 지휘하는 체제가 돼 있었다. 카트라이트에게는 하느님의 뜻이라고 여겨 졌다.
개신교 군목들이 들으면 무슨 소리냐 하겠지만 사실 군대에서는 군목 보다는 군 신부가 훨씬 병사들에게 인기가 많았고 또 헌신적이었다. 군신부는 가톨릭 방침에 의해 병사로서 군복무를 했던 신부를 우선적으로 임관하기에 나이도 그렇고 병사들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가정을 꾸리고 있는 군목에 비해 몸을 사리지 않았고 헌신적일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개신교에서는 왠지 대개 금기시 하는 음주와 흡연 문제에 있어서도 병사들과 잘 통했다.
그곳에서 반갑게 해후한 두 신부는 2명의 프로테스탄트 군목과 함께 흥남항에 정박해 있는 병원선 콘솔레이션호로 향했다. 그곳에 그리핀 신부와 또다른 개신교 군목이 입원해 있었기 때문이다.
병원선으로 가는 길에는 도처에 이고 지고 애들 손을 잡은 피난민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카트라이트가 며칠전 말한 피난민 문제 어떻게 되는가 하고 물었다. 고토리에 있을 때 어렵사리 클리어리와 야전통화를 했었다.
클리어리 중령은 코앞에 닥친 공산군들로부터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탈출하려고 미친 듯이 날뛰는 수천명의 한국 민간인들을 남으로 호송할 배편을 구하기 위해 자신도 요 며칠 가능한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 뛰어다니고 있다고 했다.
미친듯이 날뛰고 있다는 표현이 자극적이기는 했지만 상황을 웅변하고 있었다.
“스테파노, 자네 아는가. 나야 말로 며칠전 부터 아침부터 밤까지 필사적으로 살아남으려는 수백명의 한국인들에게 시달리고 있어. 하긴 그들과 그들의 가족에게는 생사가 달린 문제니까. 오늘만해도 오전 내내 흥남 가톨릭 선교원에서 계속해서 조그마한 용지에 사인을 수도 없이 해주었는데 훌륭한 가톨릭 신자임을 증명하는 신분증이자 일종의 통행증이지, 얼마나 효력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