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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實錄)소설>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41)

안동일 작

장진호 그리고 황초령

황초령 수문교 복구 작업과 관련해 또 하나의 유명한 전설이 있는데 준비된 부품은 7m였는데 끊어진 다리는 9m였기에 중공군 포로를 시켜 철도 침목을 날라 돌출부에 목재 받침을 설치하는 것으로 해결했다는 얘기와  모래주머니가 부족해 다리 하중을 지탱할 밸러스트를 형성할 수 없었는데 이 문제는 사방에 깔려있는 중공군 시체를 다리 하부 구조에 집어넣어 했다는 전설이다. 얼어붙은 시체들은 교량 무게를 충분히 견딜 수 있을 정도로 튼튼했다는 전설이다.

하지만 카트라이트가 알기에도 이는 명백한 부풀리기식 와전이었다. 카트라이트도 후방에 있어서 9일 오전 부터 진행된 수문교 복구 작업을 직접 지켜 볼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현장에 있었던 사람의 하나라 할 수 있다. 며칠 뒤 공병대원에게 들어보니 철제 부교를 들어올려 안착시킬 크레인이 없어서 그랬지 연결이나 운반에는 큰 문제가 없었단다. 7미터 짜리 철제 부교 두개를 14미터로 연결해 미리 바닥에 뉘워 놓고 뒤에서 천천히 밀어내는 방식으로 설치 했다고 했다.

설치보다 힘들었던 것이 공중투하였다. 당초 지상의 해병공병들은 차량과 탱크, 화포를 옮기기 위해서는 16피트(5m) 길이의 교량 빔(교각 받침대를 포함하면 7.3m) 두개 4세트, M-2 부교(treadway bridge) 4개가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이를 공병창에 알렸다. 언급한 대로 제작은 신속하게 진행 돼 여분까지 포함해 완성 됐지만 이런 중장비는 단 한 번도 수송기에서 투하된 적이 없었다. 부교 하나는 무게가 2900파운드(1.3톤)에 달했다. 7일과 8일 사이에 , C-119 1대가 흥남 연포비행장 인근에서 시험 투하했지만, 결과는 대 실패였다. 24피트짜리(7.3m) 낙하산 두 개를 사용했지만, 화물은 그대로 지면으로 떨어져 박살이 났다. 확실히 더 큰 낙하산이 필요했다. 48피트(14.6m) 캐노피의 G-5 낙하산들이 조립 정비사들과 함께 동경에서 연포로 긴급 공수됐고 9일 실제  공수 작전의 결과는 말한대로 성공이었다.  2차대전 때 만들어져 한번도 펴본 일이 없었던 그 대형 낙하산들이 우려와는 달리 활짝 활짝 펴졌던 것이다. 미군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같이 대담하고 신속한 공수작전으로 끊겼던 다리를  신속히 복구한 해병대원들은 사기 충천해서 중장비를 앞세우고 차례로 수문교를 건넜다. 선도에 속했던 카트라이트 부대는 밤 9시쯤 다리를 건넜다. 고토리의 별이 다른 별들과 함께 그들을 비추고 있었다.
해병사단의 수많은 차량과 전차가 다리 위에 선 유도병의 형광봉 안내를 받으면서 별빛 아래  수문교를 유유히 지나는 모습을 보면서 인근에 매복 중이던 중공군은 처절한 절망감을 맛 보았을 법하다. 1091고지 말고도 조금 떨어진 1080고지며 인근 산악에 아직까지 중공군들이 추위와 굶주림에 떨며 숨어 있었다. 아무리 장비가 열악했다 하더라도 아직 망원경은 지니고 있을 터였다.

말한 대로 당시 중공군의 체력과 전선보급은 이미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수문교 복구를 위해 미군이 보인 매우 인상적이면서도 입체적인 작전 수행능력은 적들의 전의를 완전 상실하게 만들었고 중공군은 이 시점 이후부터는 제대로 된 공격을 전혀 펼치지 못했다.

해병 부대 본진은  험난한 고개 황초령을 통과해 진흥리에 진입할 수 있었다. 그런데 작은 사고가 하나 있었다.
해병대 선두가 산악지대를 벗어나 막 진흥리에 도착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대포와 박격포 포탄 세례 가 쏟아졌다. 알고 보니 미 육군 3사단의 오폭 이었다. 이에 해병대의 육군 혐오는 극에 달했다.  이때의 육군 부대는 3사단 65연대 2대대로 주로 푸에르토리코인들로 구성된 부대였다.  이 오폭으로 ‘천주교계에서 거의 성인처럼 존경 받는’ 다는 표현을 받는 7연대 군종 신부 그리핀 중위가 부상 당해 후송되어야 했다.

카트라이트는 며칠 뒤 함흥 병원으로 그를 위문 갔는데 그리핀은 턱뼈가 부서져 꽤 오래 고생을 해야 했다.
“신부님, 얼마 전에 레마르크의 서부전선 이상없다를 다시 읽었는데 제가 바로 그 짝입니다”
그가 웅얼대며 한 소리였다.

해병 부대는 진흥리에서 그곳에서 야영을 하며 하루를 지낸 뒤 12월 11일 오전 무렵 부터 선두 부대가 흥남에 도착했다. 그 엄혹했던 장진호 전투, 후방으로의 전진 작전이 완료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카트라이트와 이종연의 작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한국인 피난민 문제였다.
고토리에서 황초령을 넘어 진흥리로 들어가는 구간에서 카트라이트와 종연은 바로 앞 뒤에서 함께 했다. 그런데 이번에도 포로들을 후송하는 종연은 한국인 부대의 지휘관이 돼 있었다. 육군 7사단 소속 카투사 한국군인들이었다. 20명 남짓 됐는데 유담리서 하갈우리로 후퇴해 올 때 호수를 건너 구사일생으로 해병 부대와 조우했던 운 좋은 병사들이다. 그때 외모로 보아 중국군 패잔병으로 오해 했던 7연대 병사들에게 난사 당할뻔 했던 저들을 종연이 나서 한국군이니 쏘지 말라고 했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다시 고토리를 떠날 때   참모장은 한국군 카투사들을 종연이 지휘해서 중공군 포로들을 감시하는 임무를 맡뎠던 것이다. 대대 규모 정도로 까지 축소된 육군 31 전투 연대는 그때 편제를 다시 짜고 말고할 겨를이 없었다. 한국인 카투사에는 일본군 출신도 있었고 중국어를 할 줄 아는 늙수구레한 병사도 있었다.  종연은 아저씨뻘인 그들과도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참 유담리에서 후퇴할 때 종연이 맡았던 중국군 포로들은 여러명이 죽고 다치기는 했어도 도망친 포로는 거의 없었다고 했다.

종연은 카트라이트를 만날 때 마다 한국인 피난민들에 대한 걱정을 했다. 신부님이 좀 힘을 써 달라고 얘기하곤 했다. 그의 부탁이 아니더라도 어떻게든 아군에 협조했던 주민들을  적진에 남겨서는 안된다는 것이 카트라이트의 생각 이었지만 그러면서도 어떻게 뾰족히 힘을 쓸 방법이 없었다.
“신부님, 상급자(수퍼리어)들에게 말씀 좀 해주세요”
“열심히 그러고는 있어 존”

유담리 부터 시작해 하갈리에서 고토리를 거쳐 천신 만고 끝에 황초령을 넘어 진흥리로 들어오던 그때 까지 상당수의 장진군 피난민 들이 해병 부대를 따라왔다.

특히 하갈우리 남쪽 평지에는 3백호 1천5백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었다. 상당수 그곳 주민들이 정든 고향을 포기하고 미 해병대를 따라 피난을 선택했다. 혹한의 추위 속에 먹을 걱정, 자는 걱정 따위는 아예 하지 않고 무작정 따라 나섰던 것이다. 몇차례 언급한대로 하길우리 주민들과 해병대는 유난히 친했다. 특히 공병대가 그랬다. 주민들이 매우 협조적이고 우호적이었기 때문이다.
해병대는 행군 내내 이런 피난민들이 부대에 섞이지 않도록 통제하며 일정 거리를 유지하게 했다.

고토리로 들어 오는 과정에서 사건이 몇번 일어났었기 때문이다. 그때는 피난민 행렬이 거의 후미 부대 행렬과 섞여 있다 시피 했는데 길가에 숨어 있던 중공군들이 어느 틈엔지 피난민 사이로 숨어 들어와 해병들에게 총을 쏘아대고는 도망치는 일이 발생했던 것이다. 당연히 해병은 응사를 했는데 이때 죽어 나가는 것은 피난민 들이었다. 그뒤 부터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게 통제 했고 경계도 게을리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토리에 도착 해서는 유담리, 하길우리 주민들은 저들이 아는 집으로 흩어진 모양인데 수문교 다리를 건널때 많은 사람들이 건너지 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수문교가 해병 부대만 건넌 뒤 다시 폭파 되는 바람에 장진호 주민들은 한사람도 그 다리를 건너지 못했다는 이야기는 와전된 것이다.
마지막 경계를 하던 공병대에 앞서 주민들이 건넜던 것을 카트라이트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고, 실제 진흥리에 도착했을 때 군인들에게 인사를 꾸벅 하고 마을쪽으로 걸어가는 사람들이 다수 있었다. 고토리 연대 본부에서 미사를 드릴 때는 그 자리에 하갈리 이장이며 고토리 천주교 한인 신자 몇몇이 참석 하기도 했었다. 때문에 고토리의 별 전설에는 한국인 기독교 신자들도 열심히 기도했다는 얘기가  꼭 나온다.

수문교 복구 공사를 할때 당연히 주민들은 근처에 갈 수 없었고 복구가 끝났을 때는 해병 도하가 먼저였고 주민들은 나중 이었던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도하 작전은 9일 밤 부터 시작돼 거의 이틀에 걸쳐 진행 됐다. 그때 일단의 중공군이 수문교 쪽으로 달려 들고 있었다.

마지막 까지  고토리에 남았던 부대는 기지를 폭파 한 뒤 철수해야 했는데 1연대 수색 중대원들이었다. 그들은 전차 10대를 호위하며 최후방을 지켰는데 처음에는 피난민들을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일만 하다가 나중에 중공군이 오자  결사적으로 포격을 가해 적들의 접근을 막으면서 마지막으로 황초령 답교를 건넜다. 몇 시간 동안 건너편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해병 공병대는 그때 답교를 폭파시켰다. 해병 전사에 따르면 정확히 그 시간이 12월 11일 오전 2시 30분이었다.

그때 카트라이트와 종연은 벌써 진흥리에 도착해 있었는데 다리가 폭파 되는 굉음과 불타는 고토리 기지의 화염을 보면서 남아있는 주민들을 위해 기도를 올렸다. 종연과 주민들의 말을 들으면 수문교 말고도  계곡을 따라 넘어오는 산길이 있다고는 했다. 그런데 그 길은 눈 얼음이 너무 쌓여 있어 도저히 통행이 가능할 것 같지 않았다.

진흥리에서 야영을 하던 밤에도 카트라이트는 한국인들은 굽어 살펴 달라고 다시 기도를 했다. 카트라이트가 본 한국인들은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었다. 기독교나 천주교 신자가 아니더라도 그 혼란의 와중에 사람들은 자신보다 어려운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인정이 있었고 작은 일에도 감사 할 줄 아는, 콩 힌쪽도 서로 나누는  사람들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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