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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ptember 20,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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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實錄)소설>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38)

안동일 작

 장진호 그리고 황초령

그런데 정말로 놀랍게도 하갈우리 여기저기 안전한 곳에 텐트촌이 건설되어 있었던 것이다. 조립식 텐트 설치 였기에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하더라도 많은 자재가 필요한 일이었다. 무엇 보다 텐트 촌 건설에는 튼튼한 목재가 다량으로 필요했다. 미군의 크고 작은 텐트들은 반드시 튼튼한 지주목(支柱木)이 필요했고 측면 버팀목이 필수 였는데 많은 대형 텐트를 세우려면 그 양은 막대했다. 급조된 비행장 비행기로는 도저히 나를 수 없는 양이었다.

그런데 신이 도왔는지 그 목재들이 하갈우리에 쌓여 있었던 것이다. 원래 그곳은 일대 최대의 제재소가 있던 곳이었다. 때문에 협궤 철로 까지 가설돼 있었다. 하갈우리에 진격한 1사단 공병대가 철로를 따라 돌아가 보니 초벌 다듬어진 아름드리 목재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이내 마을 주민 중에 제재 기술자도 수배할 수 있었다. 존리가 나섰음은 물론이다. 북한이 해병들에게 본의 아니게 선사(?)하고 떠난 통나무 원목은 텐트 지주목으로 밤을 세워가며 가공되었다.
하갈우리에서 발견한 제재소와 통나무들이 이 엄혹한 시기에 나타나 준 것은 해병들의 큰 행운이었다.

전투와 추위에 지친 해병들은 북한군의 선물로 세운 텐트 안에서 열을 뿜는 최신 석유난로의 불을 쬐며 뜨거운 식사와 휴식을 즐겼다.
이러니 여기저기 동상에 시달리고는 있었지만 해병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2만에 가까운 정예들이 한데 뭉쳐 있는 본부 고지에는 중공군의 휴먼 웨이브, 인해 전술이 범접을 못했다. 호수 오른쪽 후동리에 진출했던 육군 7사단 31연대는 산산조각이 나서 연대장과 연대장 대리가 전사하고 연대기를 빼앗기는 대패를 했지만 그래도 상당수의 병력이 호수 얼음을 통해 탈출해 왔고 또 계속 해 오고 있었다.

그때 해병 병사들 사이에서는 함흥으로의 후퇴가 아니라 이곳에서 전열를 정비하고 다시 북쪽으로 적진을 돌파해 전쟁을 끝내는 것이 상부의 작전일 것이라는 예측이 팽배 했고 그렇게 전의를 다지고 있었다. 그때 해병 병사들이 가장 신경 썼던 것은 챙겨오느라고 챙겨 왔지만 부득이 해서 두고 와야만 했던  동료들의 시신이었다.

경계를 게을리 하지는 않았지만 달콤한 휴식이 사흘 쯤 계속 됐다.
카트라이트는 그 사이 하갈우리에 남아있었던 존 리와 7연대에 배속된 후배 군종신부 그리핀 중위와 시간을 함께 하며 꽤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열흘만에 만나는 것이었지만 워낙 일들이 많아 몇달만에 만나는 것 같았다.
당연히 자신이 겪은 전황에 대한 이야기가 먼저 나왔다.
그런데 의외로 그리핀도 그렇고 존리도 적군인 중공군이 너무 불쌍하기 짝이 없다는 얘기를 먼저 했다.  어떻게 포병도 없이 진지에 몰아 닥치느냐는 것이었다.
미군 같으면 적의 진지를 공격하기 전에 포격을 퍼부어 적진을 초토화 한 뒤 보병이 전진하는 것이 일반 이었는데 중국군은 포 지원 전혀 없이 무모한 돌격을 해왔다면서 저들 지휘부가 너무도 잔혹하다고 했다.
“물론 졸지한 당하는 육탄돌격의 기습 이었기에 너무도 당황스럽고 무섭기는 했지만 맨몸으로 달려드는 저들에게 총격을 퍼붓는 것은 살육에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카트라이트도 같이 느꼈던 일이다.  중국군에게도 포병 부대가 있기는 했다. 1개 사단에 1대대 쯤이 있었다는데 포대는 장비도 심하게 노후돼 있었고 초기에 아군 공군의 공중 폭격에 박살이 나 버렸고 저들이 말하는 유격 전투에는 큰 효용이 없었기에 전혀 힘을 발휘하지 못했던 것이다.

동경 사령부의 안일한 대처도 도마에 올랐다.
본부에 있었던 존리가 그 사정을 두 신부들 보다는 잘 알고 있었다.
하길우리로 들어오기 전 수동에서의 소규모 전투에서 중공군 16명을 생포했단다. 이들은 자신들이 124사단 박격포 부대 소속이라며 3개 사단이 북쪽에서 장진호를 향해 오고 있다고 털어놨다. 즉각 동경 사령부에 보고했지만 사령부는 놀라지도 않고 관심도 갖지 않았다. 극히 일부의 패잔병 일것이라는 반응이었다.

27일 공세 하루 전에는 장진호 서쪽 유담리에서 중공군 3명이 민가에 숨어 있다가 7연대 정찰대에 투항했다. 이들은 “20군의 60사단, 58사단, 59사단이 유담리에 6일간 주둔해 있었으며 2개 해병 연대와 육군 전투단이  하갈우리와 유담리 사이 덕동고개를 통과한 뒤 해병항공대의  지원을 피해 어두워진 후에 공격할 것”이라고 매우 구체적으로 진술했다.
하지만 말단 병사가 대규모 작전계획을 알고 있을 리 없다, 허위 정보를 전할 임무를 띠고 민가에 남겨진 미끼일 수도 있다며 포로의 말을 믿지 않았다.  후일 밝혀진 일이지만 계급도 없었다는 중국군은 민주화 된 인민의  군대여서  전 부대원에게 작전의 대강을 알려 준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인민의 생명은 어찌 그리 경시 했는지…

이 정보는 장진호 동쪽의 미 7사단 31연대에 전혀 전달되지 않아 아무런 대비를 하지 못해 ‘장진호 동쪽의 참극’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존 리는 하갈우리에서의 한국인 주민들의 협조적인 태도와 활약상에 대해 다시금 강조하면서 후퇴시 그들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큰 걱정 이라고 했다.

그리핀은 자신이 속했던 7연대 F 중대의 치열했던 덕동고개 전투 상황에 대해 얘기하면서 천주교 병사들의 이야기를 들려 줬다.
해리슨 포머스 일병은 다른 두 명의 해병과 함께  소대의 진지에서 참호 하나를 지키고 있었다.
누군가, ‘적이 온다’라고 소리쳤고, 바로 나팔과 호루라기가 울리면서 따발총 사격소리가 뒤따랐다. 헤리슨은 탄띠에서 8발들이 클립들을 꺼내어 참호가에 가지런히 놓고, 중공군이 가까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유담리쪽 하늘에서 터지는 조명탄 불빛에 적의 모습이 실루엣으로 보였고, 아군 진지의 기관총이 불을 뿜을 때마다 예광탄 빛에 적군의 얼굴이 붉게 비쳤다. 먼저 든 생각은 너무나 시끄럽다는 것이었지만 더 생각이고 자시고 할 겨를도 없었는데,  중공군은 물밀듯이 공격해 왔다. 헤리슨은 적군의 목과 허리 사이를 겨냥해 쏘았고, 너무 바빠 무서워할 새도 없었지만 방아쇠를 연신 당기면서 기도할 수는 있었단다. 그의 기도가 이랬단다.
“하느님, 제가 죽어야 하더라도 바지에 똥을 싸게 해주지는 마세요.’ 나는 설사병을 앓고 있었고, 그때 설사가 줄줄 새나오고 있었거든요.”   많은 병사들이 그랬던 모양이다.

F 중대 맥카시 소대의 진지에서 우측 최 전방 참호에 배치되었다 부상 당해 지금은 함흥으로 후송된 역시 천주교 신자 헥터 카페라타 일병과  그의 동료 케네스 벤슨 일병의 활약상도 대단했다. 그날 이후 헥터의 별명은 맨발의 4번타자 였다.  헥터 카페라타는 중대에서 가장 덩치가 큰 병사라고 했는데 카트라이트도 기억이 날 것 같았다. 그 친구가 확실한지는 모르겠지만 지난번 덕동리에서 간이 미사를 올릴 때 유난히 덩치 큰 병사가 오른쪽 끝에 서 있었는데 영성체  때 손으로 받는게 아니라 큰 입을 떡 벌려서 한참 팔을 올려 넣어준 기억이 있었다.

그날 밤 카페라타는 작은 참호에서 깜빡 잠이 들었었다가 시끄러운 총소리 때문에 깨어났는데, 눈을 뜨자 중공군이 쌓여 있는 눈 위를 넘어 접근해 오는 것이 보였다. 너무 가까이 다가와 총을 들 겨를이 없었다. 배운 대로 머리를 처박고 엎드려 있어야 했다. 다행히도 중공군이 아무도 없는 줄 알고 그들의 진지를 통과한 뒤 지형지물에 가리어 모습이 안 보이자 카페라타와 벤슨은 운반할 수 있는 탄약은 다 들고서 나머지 소대원들이 간신히 버티고 있는 옆 뒷쪽 진지로 달려갔다. 벤슨이 헥터에게 너 군화를 두고 왔다고 알려 주었지만  그걸 가지러 돌아갈 수는 없었다.
벤슨과 카페라타가 뛰어든 참호는 중공군이 맥카시 소대와 피터슨 소대를 분리시킬 목적으로 엄청난 압력을 가하고 있던 F중대 진지의 요충이었다.
그때 장교들은 전사 했거나 부상당한 진지의 공백을 메우려고 병력을 이리저리 옮겨 배치하고 있었는데, 카페라타와 벤슨이 때마침 떨어져가는 탄약을 들고 나타나 큰 도움이 되었다.
수류탄이 빗발처럼 많이 날아와서 참호에 떨어지자 카페레타가 몸으로 수류탄을 덮쳤는데, 쾅 하고 터져 그 충격에 몸이 튕겨나가 참호 맞은편 벽에 부딪히면서 철모가 벗겨진 뒤 바로 다른 수류탄이 쾅 하고 또 터졌다.
카페라타는 잠시후 정신을 차렸는데 한쪽 팔은 움직일 수가 있어 머리를 손으로 문질렀더니 피가 흐르고 있었다. 철모를 다시 썼는데 귀가 전혀 들리지 않으면서 양쪽 귀에서 윙윙 거리는 소리가 났다. 누군가가 자신의 이름을 계속 부르는 소리는 들렸다. 처음에는 마리아님 인줄 알았단다.  위생병이 옆에 쭈구리고 앉아 머리를 흰눈으로 씻어 주면서 ‘괜찮아?’ 라고 말했다.
벤슨은 그때까지도 머리가 멍했지만, 소총을 쥐고서 간신히 카페라타에게 포복해 갔다. ‘네가 심하게 다친 줄 알았어’라고 말했고,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라고 카페라타가 답했다. 세열 수류탄이 아나라 충격 수류탄이었던 것이 행운이었다.
이내  ‘후아, 저 개자식들이 또 오네’라고 카페라타가 말했다. 총을 들고 맹렬히 사격을 했는데 이번에는 수류탄이 벤슨 옆에 떨어져 폭발하면서 그의 안경을 날려보내 그는  앞을 볼 수가 없었다.
총을 쏠 수 없게 되자 벤슨은 주위에 널려 있는 소총의 실탄 클립을 손으로 더듬어 주워, 카페라타의 M-1 소총에서 빈 클립이 튀어나오는 소리가 날 때마다, 실탄이 든 클립을 카페라타에게 전달해 주었다.
“이제 보이냐?”
“아니.”
“그런데도 잘 전해 주는데…”
카페라타는 중공군들에게  욕을 퍼부으면서 소총에 실탄을 계속 재 장전하고는 클립이 빌 때까지 사격을 했다.
사격을 할 때마다  카페라타는  그 큰 상반신을 노출시켰는데, 그는 기적을 연출하는것 같았다는 게 벤슨의 회상이었다.  “적군이 우수수 추풍 낙옆 처럼 쓰러지는게 정말 다 보였습니다.”
“실탄이 떨어지자 소총을 야구 배트처럼 거꾸로 잡고는 맨발로 일어서서 날아오는 수류탄을 야구공을 때리듯 맞춰 멀리 날려 버렸는데 대단했습니다. ”
공식적인 해병대 기록에도 중공군이 그 지점에서 진지 침투에 실패한 것은  헥터 카페라타와 케네스 벤슨의 분투 때문이었고, 이들은 “2개 중대 규모의 적군을 ‘전멸’시킨 공로를 인정받아 최고 무공훈장을 받았다”고 씌어 있다.

카트라이트와 두 사람은 이번에도 손을 잡고 맨발의 4번타자 헥터의 빠른 쾌유와 함께 이 참혹한 전쟁이 빨리 끝날수 있도록 은총을 내려 달라고 주께 간절히 기도했다.

병사들의 예측과는 달리 동경 사령부는 10군단의 함흥으로의 재 집결을 확정 했다. 원산이 중공군에게 장악 됐기에  함흥에서 교두보를 만들겠다는 구상이었다.  스미스 사단장도 해병의 철수 준비를 지시했다. 해병 1사단의 하갈우리 철수 작전은 6일 부터 준비 돼 8일 부터 본격적으로 철수가 진행 됐다. 짐을 싸는 일이 보통일은 아니었다.

6일 오전에  공군 전투 수송사령부의 윌리엄 터너 장군이 직접 하갈우리로 날아와 ‘최대한 수송기를 보내 포위된 병력들을 항공편으로 철수시키겠다.’고 제안했지만 스미스 사단장은 이번에도 보유한 중화기와 장비를 포기할 수 없다고 거부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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