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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ptember 20,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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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實錄)소설>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36)

안동일 작

장진호 그리고 황초령

다시 11월 29일 밤 유담리 전투 현장.

“신부님, 신부님”

저쪽 참호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박격포탄 터지는 소리가 귓가에 너무도 크게 들리더니 얼음 흙먼지 속에서 터져  나온 절규였다.   허리를 숙이고 그쪽 참호로 급히 갔더니  테드와 샘이 쓰러져 있었다. 주변에 서 있는 병사들의 눈망울이 너무도 처연했다.  조금 전에 그 참호를 지나오면서 벙어리 장갑을 낀 테드의 손을 꼭 잡아 주면서 투시롤 케러맬을 한웅큼 집어 주었었는데… 그가 쓰러져 있었던 것이다. 테드야 말로 모태신앙을 지닌 천사중의 천사 였다.

“신부님,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요.  저는 아무래도 연옥으로 가게  되겠지요.  거기 가면 열심히 기도 하겠습니다. 그래서 천당에 가야 엄마를 만날 수 있겠죠? ”

신음을 내면서 이렇게 띄엄띄엄  말하는 것이었다.

실제 테드는 가망이 없어 보였다. 복부가 절반쯤 파열 돼 밖으로  흐르고있었다.  달려온 위생병도 어떻게 손을 써야 할지 허둥대기만 할 뿐이었다. 계급장도 견장도 없이 십자 표시만 있는  카트라이트의 군복이 테드의 피로 흠뻑 적셔지고 있는데도 어떻게 손 쓸 도리가 없었다.  원망의 절규가 절로 나왔다.

“주여 어디 게십니까?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파드레, 제가 맞았어야 했는데 테드는 저 대신 맞았어요.”

샘이 엎구리를 움켜 쥐면서 일어서며 말했다. 그도 부상을 잎었으면서도 동료의 걱정을 먼저 했다. 샘은  다시 주저 앉아 태드의 손을 쥐면서 “태드 정신 차려 응?  넌 살 수 있어. 왜 내 자리에 서 가지고는…” 하며 울부짖었다.

동료를 걱정하는 어린 병사들의 전우애가 눈물 겹다. 하늘을 원망했던 자신이 부끄러워지기까지 한다.

그랬다. 카트라이드가 본 해병은 자부심도 대단하고 전투력도 강했다.  무엇보다 동료들을 전적으로 신뢰한다는 점에서 남달랐다. 동료가 죽느니 차라리 자기가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군인들이었다. 날아오는 수류탄에 맞서 ‘해병답게 죽자’고 외치며 동료를 위헤 목숨을 던진 병사가  많았다. 해병이 저들을 그렇게 만들고 있었다.

사실 동경 사령부 종군단 에서 지난 여름, 이번에는 해병과 함께 하라고 1사단에 배치 했을때 처음에는 잠깐 해병은 거칠고 훈련도 고될텐데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었다. 지난번 까지는 유럽 에서도 인도지나에서도 육군과 함께 했었다. 나고야에서 해병들을 만나고 며칠 생활 하면서 이들이야 말로 진짜 군인들이었다는 것을 이내 알게 됐고 그런 생각을 했던 자신이 부끄러워져 동료 선배 신부에게 고백 성사까지 했었다.

숨이 넘어가는 테드 일등병의 손을 잡고 간절한 기도를 올리고 성호를 그으면서 카트라이트는 며칠 동안 종부 성사를 올렸던 병사들의 얼굴들을 다시 떠 올렸다. 오늘은 다행히도 미사가방에 넣어둔 성유로 쓰이는 올리브 유가 얼지 않아있어서 테드의 이마에 성유로 십자가를 그려 줄 수 있었다. 묵주를 꺼내들고 꼭 쥐고 있는 그의 손은 피범벅이 돼 있어서 성유를 바를 수 없었다.

“주님께서 당신의 자비로우신 사랑과 기름 바르는 이 거룩한 예식으로 성령의 은총을 베푸시어 이들을 도와주소서. 또한 이들을 죄에서 해방시키시고 구원해 주시며 자비로이 그 고난도 가볍게 해 주소서.”

미카엘 천사 테드를 내려다 보는 그의 눈에 이슬이 가득 맺혔다.

참혹한 전투는 계속 됐고 카트라이트는 여러차례 종부 성사를 해야 했다. 요한 복음의 말씀은 그나마 한가닥 위안이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고, 나는 마지막 날에 그를 살릴 것입니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며 내 피는 참된 음료이기 때문입니다.”

장진호 일대의 전투는  악몽처럼 계속 됐다. 29일 전투는 다음날인 30일  동이 터온 아침 까지 계속 됐고 아침 햇살에 바춰진 장진호 주변에는 피아의  시신이 산을 이루고 있었다.

해병 5연대와 7연대의 피해 상황도 만만치 않았지만  장진호 동쪽을 맡았던 육군 7사단 31연대는  괴멸에 가까운 피해를 받아야 했다.  31연대는 장교만도 맥클린 연대장, 페이스 대대장 등 40여명이 희생됐다. 연대장 대대장을 잃은 부대는 이미 부대가 아니었다.

이들의 희생이 헛된것 만은 아니었다. 이들이 이 며칠간  중공군 80사단의 공세를 받아 막대한 피해를 입었지만 중공군 내에서는 막강 화력인 80사단이 아군 본부가 있는 하갈우리를 공격하는데 참여하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사단 지휘부가 있는 하갈우리가 넘어가게 되면 유담리의 주력부대의 후방이 차단되고, 각 부대의 연계도 끊기게 된다.

전방의  이들이 희생되면서 버틴 며칠동안 하갈우리 는 상대적으로 약한 공격을 받아 적을 물리칠 수 있었고 무엇보다 야전 활주로를 건설할 수 있는 시간을 벌 수 있었던 것이다.

육군 31 전투단의 괴멸에는 지도부의 판단 착오도 크게 작용했다.  28일 오전 알몬드 군단장은  전날 엄청난 적의 기습이 있었다는 소식을 듣고 단숨에 헬기를 타고 후동리  31 전투단 방어진지를 찾아 병사들을 치하했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그는 한반도 북부, 특히 장진호 주변에 중공군  병단은 존재하지 않으며 전날 공격한 부대는 패잔병들이므로 적에게 빼앗긴 고지를 탈환하고 북쪽을 향한 공격을 재개하라는 명령을 다시 내렸다. 그러면서 그는 1대대장 페이스 중령 등 3명에게 은성훈장을 주고 떠났다. 페이스 대대장은 그가 떠나자 훈장을 눈에 던져 버렸다고 했다. 말한대로 페이스 부대는 그날밤 북방으로 진격 했다가 고립되어 전투에서 전멸하다시피 했다.

그날 알몬드는 흥남으로 돌아오는 도중 동경에서 열리는 전쟁대책회의에 참석하라는 지시를 받고 그길로 동경으로 날아가야 했다.  이 회의에서도 그는 10군단은 계속 진격해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했으나 다음날 새벽에 끝난 회의는 10군단은 함흥-흥남지역으로 병력을 집중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극동사령부도 중공군의 개입을 워싱턴에 보고했고 워싱턴도 공세에서 수세로 전환하려는 맥아더 사령부의 계획을 승인했다.

11월 30일 알몬드는 하갈우리를 찾아와 해병 1사단장과 육군 7사단장에게 “하갈우리에 병력을 다시 집결시킨 뒤 사단 내 모든 편제화기와 장비는 파괴하고 수송기를 이용해 함흥으로 후퇴하라”고 지시 했다.  알몬드 소장은 부지런 하기는 했다. 부하들을 사지에 몰아 넣기는 했어도 자신 스스로도 밤낮을 가리지 않고 경비행기와 헬기를 동원해 전장을 찾았고 동경의 호출에도 응했고 계속 명령을 쏟아놓았던 것이다. 능력이 없는 사람이 부지런 하면 더 낭패를 본다고 했던가.

 

그래도 카트라이트는 다른 해병 장교들 처럼 알몬드 소장을 나쁘게 평가하지 않는다. 며칠 뒤의 일이기는 하지만 한국인 피난민을 철수선에 싣게한 결정을 내린 일은 그가 저지른 많은 실수와 잘못을 상쇄하고도 남기 때문이다.  (위 사진 스미스 소장(왼쪽) 과  알몬드 소장)

아무튼  그날 아침 스미스 사단장은 명령이라고 까지는 할것은 없었던 이 제안을 단호히 거부했고 육군 7사단장도 동조했다. 아직 전장에 남아 있는 부하들을 결코 버릴 수 없으며 미국민들의 세금인 그 무수한 주요 장비를 맥없이 그냥 버릴 수 없다는 논리였다. 현실적으로도 수송기로 후퇴하면 수송기가 이륙한 후 활주로를 지켜야 하는 최후의 병력은 포기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스미스 사단장은 “중공군의 공격을 무력화시키면서 모두 함께 걸어서 이동하겠다”고 고집했고, 결국 그렇게 했다.

스미스 사단장은 30일 오전 전방의 5연대와 7연대에게 본부인 하갈우리로 귀환 하라는 명령을 공식적으로 내린다.   이대로는 전군이 전멸 할 수도 있겠다는 위기감이 함흥이나 동경 뿐 아니라  하갈우리 사단 본부에도  들었던 것이다. 병력이 지금처럼 분산 돼 있는 것은 중국군이 바라던 바 였기 때문이기도 했고 사단 본부와 비행장을 지켜야 했기 때문이었다.

일단 7연대가 먼저 나서 퇴각로를 확보하고 5연대는 후위를 살펴 가며 한명의 전우도 적진에 남겨 두지 말고 귀환 하라는 명령이었다. 육군 31 전투단의 지휘권도 가지고 있었던 스미스 소장은 임시 연대장 체제의 육군에게도 조심해서 후동리를 빠져 나오라는 명령을 하달 했다.

스미스 사단장은 그날 하갈우리 본부에서 많은 기자들의 질문을 받았는데 유담리에서 하갈우리로의 이동이 ‘후퇴하는 것이냐’는 질문이 이어졌다. 한 종군 여 기자가 ‘후퇴 작전’이냐고 물었다. 뉴욕 헤럴드 트리뷴의 동경 특파원 마거릿 히긴스 기자였다.

“후방이 없으면 후퇴가 아니다. 포위당해 있을 때는 후퇴도 철수도 할 수 없다. 유일한 방법은 돌파해 나가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격해야 하는데 지금 우리가 하려는 것이다”

스미스의  이 말은 24시간도 안돼 미국 전역에서 발행되는 신문에 “후퇴라니, 빌어먹을 우리는 다른 쪽으로 공격 중이라구!”이라는 말로 보도됐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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