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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ptember 20,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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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타운뉴스

<실록(實錄)소설>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35)

 

안동일 작

장진호 그리고 황초령

 

“신자들은 예배를 시작하자 마자 눈물을 흘렸어요. 이 찬송가 죄짐 맡은 우리구주를 부르면서는 거의 통곡 수준이 되었습니다. 어찌좋은 친군지 이 대목에서는 저와 미군 해병이 예수님이 보낸 정말 좋은 친구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종연이 설명하는 찬송의 가사는 제대로 의역된 것 같았다. 다른 한국 찬송가들을 보면 원곡 가사와는 다른 엉뚱한 내용이었는데 이 노래는 그렇지 않았다. 존리는 안암동에서 미국인 선교사의 집에 허드렛일을 하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영어를 배웠다고 했다. 그런것 치고는 영어를 썩 잘했다.
“신부님, 이곳 신자들이 만약에 만약에 라는 단서를 달면서 우리 해병이 철수하거나 후퇴할 일이 생겨도 자신들을 버리지 않겠냐고 물어 와서 결코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했는데 잘한겁니까? 그런일 없겠죠?”
“그럼 이렇게 이기고 있잖아. 곧 전쟁이 끝날거야.”
이렇게 자신있게 말하면서도 카트라이트의 마음 한구석에는 무언가 석연치 않았다. 로랜드 신부에게 들은 서부전선의 상황 때문이었다.
그날 본부를 떠나오면서 카트라이트는 존리의 손을 잡고 잠깐 기도를 올린 뒤 이 노래를 구성지게 불렀다. 종연은 한국어로 자신과 군종병 마이클은 영어로 불렀지만 화음이 썩 어울렸다.
What a Friend we have in Jesus, all our sins and griefs to bear! <우리 모든 죄와 슬픔을 걸머지신 예수님 안에서 얼마나 좋은 친구를 가지고 있는가!  죄짐 맡은 우리구주 어찌 좋은 친군지>
What a privilege to carry everything to God in prayer! <기도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내어놓을 수 있다니 얼마나 큰 특권인가!  근심걱정 모든 괴롬 우리 주께 맡기세>
O what peace we often forfeit, O what needless pain we bear, <아, 우리는 너무나 자주 평안을 잃어버리고, 쓸데없는 고통을 받고 있구나.  주께 사정 아뢰 잖으면 평화 얻지 못하네>
All because we do not carry everything to God in prayer. <이 것은 모두, 기도로 하나님께 모든 것을 내어놓지 않기 때문이로다.  사람들이 어찌하여 아뢸줄을 모를까;>

찬송가를 부르고 그 여운을 안고 후발 부대와 함께 유담리 까지 올라 오는데는 큰 문제가 없었다. 부대를 인솔하는 참모장 짚차에 동승했었다.
“신부님, 해피 쌩스 기빙데이 입니다”
“예, 마이클 형제님”

참모장 헨리 오도넬 중령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둘이 있을 때 형제라고 부르면 참 좋아했다.
11월 22일 목요일 이날은 이 전장에서는 어울리리지 않는 추수감사절이기도 했다. 뒤에 따라오는 트럭에는 A 레이션 통조림이기는 했어도 터키 고기와 감자요리, 호박 파이 같은 특식이 잔뜩 실려 있었다.
얼음눈 덮인 도로는 군데 군데 파인 곳이 있기는 했지만 선발대에 의해 그런대로 뚫려 있었다. 오는 길에 길가의 주요 고지인 덕동고개에 진지를 구축하고 있는 7연대 F 중대에 들려 특식을 내려 놓았다.
사실 5연대와 7연대는 한 부대 였다. 해병 1사단 병력 가운데 한반도에 가장 먼저 진출한 해병이 5연대 였는데 7월 초순 포항에 상륙한 5연대는 여단 규모의 병력이었고 부대장도 원스타 준장이 맡았었다. 해병은 포항전투 낙동강 방어선 전투에서 큰 역할을 했는데 9월 중순 부산에  집결해 본국에서 새로 파병된 인원을 합쳐 두개의 연대로 쪼개 대령들에게 연대를 맡게 했고 준장은 1사단 부사단장의 보직을 맡게 했다. 그리고 인천 상륙 작전에 참여 했다.

덕동고개 중대 병력들은 참호 파기에 여념이 없었다. 땅이 얼어 있어 보통 난 공사가 아니었다. 몇시간을 끙끙 대며 애를 써도 표면의 얼음을 부수는데 그쳐야 했단다.
중대장 바버 대위의 요청으로 짚차 위에 제대를 차리고 잠깐 미사를 올렸는데 다른 때 미사 보다 더 가슴의 울림이 컸다. 주님의 은총이 이 중요한 고지를 맡게 된 병사들의 머리 위로 가득히 내려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다른 때와는 달리 참호를 파는데 너무도 어려움을 겪고 있으니 도움을 내려 달라는 구체적인 상황까지 저도 모르게 매달렸다. 이 기도가 주효 했던지 F 중대의 병력과 참호는 며칠 뒤 5연대와 7연대를 절체 절명의 순간에 구한 혁혁한 전공을 세우게 된다. 중대 병력 2백여명 가운데 백 40여명이 전상 당했지만 사단규모의 중국군을 격퇴 해 덕동고개를 사수하면서 두 개 연대가 다시 하갈리로 돌아가 집결 할 수 있게 했던 것이다.

덕동고개를 거쳐 당도한 유담리의 상황도 마찬 가지였다. 연대 본부 막사는 그런대로 꾸려져 있었지만 전면의 참호는 재대로 갖춰지지 못하고 있었다. 지휘관들은 움직이는 것 조차 힘이 든 맹추위 속에서 참호 공사를 전력으로 독려하고 있었다.
살을 에이는 맹추위가 문제 였다. 그래도 이날 추수감사절 저녁은 병사 들도 진지 군데 군데 드럼통 속에 피운 모닥불 덕분에 A 레이션 특식을 데워서 먹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데워도 금새 식어 버렸다. 추운 곳에서 얼음 섞인 음식을 먹은 병사들 태반은 장염에 걸려 설사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래도 그날 병사들은 다음달 크리스마스에는 따뜻한 정찬을 먹을 수 있을 것이라 믿고 불평하지 않았다.
스미스 사단장은 연대장 들에게 진지를 단단히 구축 하라고 매우 단단히 지시 했던 모양이다. 특히 각 기지의 참호 건설은 스미스 사단장의 특명중의 특명이었다.

그냥 잠깐 며칠 야영하며 머물다 북방으로 진격할 그런 태세가 아니었다. 스미스 소장은 당초부터 유담리 북쪽으로 진격할 생각이 없었던듯 하다. 그런데도 유담리의 참호 대부분은 도저히 땅을 파는 것이 불가능해 주변의 얼음눈을 긁어 모아 울타리를 만드는 것으로 대체해야 했다. 덕동고개는 그런대로 양지바른 언덕배기였지만 유담리 개활지는 습지 였기에 얼음이 너무 단단 했다.

아무튼 24일을 기해 7연대가 신흥리에 진지를 구축했고 5 연대가 가장 북쪽 유담리에 진지를 구축했다.  장진호 동쪽 후동리 고지에는 육군 7사단이  진출해있었다.  장진호 일대를 일단 유담리까지를 장악하기는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진출은 말한대로 적들의 유인 전술에 따른 일시적 전과 였다.

11월 24일 맥아더의 ‘크리스마스 대공세’ 명령이 나왔다. 크리스마스에는 고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대공세를 펼치라는 명령이었다. 알몬드 10군단장은 현장의 실상을 전하기는 커녕 사령관의 뜻에 부응해 북진에 가속명령을 내린 것이 11월 27일이었고 그날 밤 중공군은 기다렸다는 듯 각 방면에서 물밀듯 밀려와 들판이 일어서서 달려오듯 해병과 동쪽의 육군에게 동시에 덮쳐 왔다.
그동안 아군 정찰기와 폭격기가 장진호 일대를 그토록 누볐는데도 이토록 많은 중국군을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닐수 없었다. 후일 밝혀진 일이지만 저들 중국군들에게는 하얀색 모포와 광목 천이 저들을 엄폐하는 최고의 무기였다.  낮 동안 아군의 정찰기의 탐색과 전폭기들을 폭격을 피해 저들은 수목 사이에 숨었고 개활지에서는 부대 인원들이 눈위에 엎드리거나 누워 그 위를 흰 광목천으로 덮었던 것이다.  하늘에서 보면 하릴없는 눈 밭이었다.

27일 전투에서 미 해병이 적지 않은 피해를 입기는 했지만 보도 듣도 못했던 미증유의 중국군의 무모한 공격을 막아낼 수 있었던 것은 전진이 능사가 아니고 진지를 구축하는 등 방어의 대비를 강조했던 스미스 사단장의 지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랬다. 장진호의 상황, 장진호 전투를 보는 스미스 사단장의 생각은 처음부터 달랐다. 스미스는 진작부터 빨리 북진하라는 알몬드의 명령에 자신의 재량권 안에서 최대한 시간을 끌고 있었다. 산세도 험하고 지독하게 추운 장진호 동북쪽에 엄청난 수의 중공군이 숨어 있을 거라는 강한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알몬드 군단장의 비현실적 요구사항에 진격속도를 거의 명령불복종에 가까울 정도로 지연시켰다.
동부전선의 3개 부대 중 스미스 해병 사단의 북진 속도가 가장 느렸다. 11월 10일부터 26일까지 하루 평균 1.5 km였다. 스미스가 중공군이 덫을 놓고 있다고 확신한 경험적 증거 중 하나는 북으로 쫓겨가던 중공군이 황초령에서 다리를 폭파하지 않은 것이다. 그 다리를 건너오라고 손짓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느꼈다. 그래서 활주로 건설을 그렇게 독려 했던 것이다.
12월 11일 철수 할 때 까지 하갈우리 이 임시 활주로에서 총 240회에 걸쳐 4689명의 사상자를 후송했다. 함흥 흥남 원산 등에 있던 해병대 행정부대원과 부상에서 회복한 병력 500여명도 기꺼이 지옥의 한복판으로 돌아와 사기를 높였다. 해병은 적진에 전우를 두고 오지 않는다는 오래된 전통과 교훈을 제대로 실천했던 것이다. 올리버 스미스 소장의 상부 명령을 거역하지 않으면서도 현장 지휘관으로서 발휘한 이런 신중함과 치밀함이 결과적으로 ‘전략적 후퇴를 하면서도 패배가 아닌 전투’ ‘후방으로 진격하는 전투’로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27일 까지 5연대와 7연대는 추위와 사투를 벌이며 진지 구축에 여념이 없었고 27일 밤부터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 졌고 엄청난 숫자의 중국군이 아군을 포위 하고 있다는 것을 절감하게 됐다. 결과적으로 맥아더의 크리스마스 대공세 명령은 사흘만에 부도가 난 백지수표 처럼 철회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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