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일 작
장진호 그리고 황초령
1950년 11월 하순, 함경남도 장진.
미 해병대 1사단 군종신부 얼 카트라이트 스테파노 소령은 오늘도 얼어붙은 참호에서 군종병 마이클 스태들러와 단 둘이 새벽 미사를 올려야 했다. 개신교 군목 이라면 새벽기도라고 했겠지만 신부가 올리는 아침 전례는 미사여야 했다. 며칠 전 까지만 해도 신자 병사들 몇몇이 참여 했지만 전투가 치열해 지면서 굳이 올 필요 없다고 했기 때문이다.
제대도 없이 부서진 미사 가방 위에 양쪽 날개가 부서진 십자 고상을 올려 놓고 신부는 이 전쟁이 빨리 끝나 애꿎은 젊은 생명들을 구해 달라고 천주께 간절히 기도를 올렸다. 오늘 따라 현해탄과 동해 바다를 분주히 오가고 있을 레너드 생각이 떠올라 그와 그의 선원들의 안전도 지켜 달라는 기도를 올렸다. 그리고 서부전선에서 실종됐다는 아끼던 후배 군종신부 카폰 대위를 위해서도 기도를 했다
레너드 라루는 얼 카트라이트의 고향 성당 후배였다. 레너드는 자신의 친형이 있었는데도 형과 동갑인 세살 위 얼을 더 따랐다. 교리반도 같이 다녔고 여름학교도 함께 했다. 필라델피아 북쪽 조그만 동네 체스넛 힐의 성당에서는 라루가 신부가 될 재목이라고 처음부터 점 찍고 있었는데 정작 라루는 배를 탔고 카트라이트가 신부가 된다고 했을 때 다들 놀랐다.
젊은 군인들은 자신을 친 아버지 처럼 따르고 좋아했다. 가톨릭 신자건 신자가 아니건 대부분이 그랬다. 갓 스물, 열여덟 열아홉의 소년 티를 막 벗은 청년들이었다. 실제 자신이 세속에 있었으면 아들 뻘이기도 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이라는 말이 실감이 났다. 한 사람 한 사람 누구도 절대로 미워할 수 없는 선량한 청년들이었다. 성경 속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어린이의 모습, 바로 그것 아닌가 싶었다.
고향 성당에서 그 또래 소년들이 보였던 짓궂고 반항적인 그런 모습들은 머리를 깎고 제복으로 갈아입는 순간, 던져 둔 모양이다. 전장의 청년들은 젊음의 상징이자 과정인 그것들 마저도 타의에 의해 강제로 던져 버려야만 했기에 더 가슴이 아팠다. 이런 천사들이 총탄이 빗발치고 포탄이 터지는 전장, 그것도 남의 나라 전장에서 죽어 나가고 있었다. 철철 흐르던 그들의 피 마저도 이내 얼어붙는 맹 추위 속에서…
동상에 걸려 팔다리에 진물이 나고 이내 덜렁거리게 되면서, 종국에는 잘라내야 하는 딱한 천사들이 너무 많았다. 총탄에 맞고 수류탄과 박격포탄에 맞아 피를 흘리고 팔다리가 너덜거리면서도 저들은 위생병 보다는 “빠드레(신부님)”를 먼저 찾았다. 마침 그때 신부의 모습이 눈 앞에 보였기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파드레는 지난번 7연대 에서 어느 히스페닉 병사가 그렇게 부르자 모두들 따라했다. 영어 파더 보다 더 정감이 간다고 했다.
저들을 품에 안으면 피를 흘리면서 “빠드레 저 죽는거죠? “ 했다. “아니야 죽긴 왜 죽어” 그러면서 꼭 안아 주는 것 밖에 할 일이 없었다. “우리 기도하자 꾸나” 소리는 한참 뒤에나 나왔다.
카트라이트 스테파노 신부는 지금 몇달 전 아니 한 달 전 까지도 이름도 생소했던 한국 땅 북부 고원 지대의 뼈를 에이는 맹 추위속에 청년들과 함께 중국군의 포위망 속에 있었다. 그와 1사단 5연대 병사들이 있는 곳은 부대원들이 ‘초신 폰드’라고 부르는 한반도 북부 개마고원 장진호 일대였다.
사단 본부 G2 소속으로 되어 있어 참모장이나 심지어 사령관 스미스 소장 까지도 만류했지만 카트라이트 소령은 언제나 선봉부대, 척후부대와 함께했다. 카트라이트 안에 있는 예수의 가르침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 있는 곳이 정확히는 장진호 서쪽 맨 위 마을인 유담리라는 곳이었다.
5연대는 해병 1사단의 정예 부대였다. 인천 상륙 작전 때도 선봉에 서서 가장 먼저 상륙한 부대였고 서울 수복 전투에서도 가장 치열했던 연희고지 전투며 녹번리 전투를 치러낸 부대였다. 지금도 유엔군 병력으로는 적의 임시 수도라는 강계 쪽으로 가장 척후, 전방에 있는 부대가 바로 5연대 였다.
어제 전투에서는 다섯 명 병사들의 종부성사를 해야 했다. 바티칸에서는 종부성사라 하지 말고 병자 성사와 함께 통일해서 쓰라고 했지만 전장, 그것도 무구한 청년들이 총탄과 포탄 파편을 맞고 죽어 가고 있는 순간에 “주여 우리 형제의 이 병을 낫게 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하는 기도는 나오지 않았다. 그들이 병자가 아닌 터에…
해병 1사단 본부가 하갈우리에 꾸려진 것은 11월 15일이었다. 11월 2일 부터 이번에는 배이스 캠프 건설의 임무 때문에 모처럼 척후에 섰던 1연대가 함흥 쪽에서 개마고원 쪽으로 진출한지 2주일 만의 일이었다. 동경의 사령부는 속전을 독려했지만 스미스 사단장은 신중을 기하고 있었다. 그의 감각은 정확했다.
하길우리에 차례로 도착한 정에 연대들은 며칠 전열을 추스린 뒤 다시 5연대와 7연대가 앞장서 호수 북서쪽인 신흥리와 유담리로 진출해 진지를 구축했다. 그때까지 별 전투는 없었다. 추위와의 싸움이 더 큰 전투였다.
적의 공격은 유담리 북방 고지에 5연대 캠프가 거의 구축된 다음날인 27일 밤, 본격적으로 시작돼 사흘째 밤마다 계속되고 있었다. 사위가 칠흑 같아진 저녁 10시 쯤 이면 난데 없는 뿔피리 소리와 함께 캠프 전면으로 대군이 몰아 닥쳤다. 저들 중국군들은 포 지원도 없이 함성을 지르며 달려왔다. 언제 그렇게 대군이 코 앞에 까지 와 있는지 전혀 영문을 모를 일이었다. 처음부터 참호전 백병전이 벌어져야 했다. 불벼락이 따로 없었고 천둥이 따로 없었다.
뒤쪽 포병대도 아군이 다칠까 봐 포를 쏠 수가 없을 정도로 근 거리였다. 그렇게 총을 쏘아대도 적들은 자신 전우들의 시체를 밟고 계속 몰려 들었다. 어쩌면 그것은 무차별한 학살에 가까왔다. 아군 소대마다 가지고 있는 부분 수냉식 AR 유탄 발사기와 M7 기관총 다수가 얼어있지 않았더라면 적들의 피해는 더 컸을 터였다.
쏴도 쏴도 몰려드는 적군들, 심지어는 소총을 던져버리고 양손에 방망이 수류탄 두 자루 만을 들고 달려드는 적들의 무모한 기세는 공포 그 자체였다. 맹 추위는 적 들에게도 큰 적이었던 모양이다. 다수 중국군 병사들의 이른바 따발총은 수냉식이어서 꽁꽁얼어 붙는 통에 무용지물이 됐던 것이다.
첫날은 두 시간 여의 폭풍 같은 전투 끝에 간신히 적들을 물리칠 수 있었고 둘째날은 네 시간에 걸쳐 진지를 사수하는 공포의 사투를 벌여야 했다.
그 공포의 한 가운데서 그 천진하고 무구한 청년 천사들이 퍽퍽 나가 자빠지고 있었다. 대개는 적들의 박격포탄과 수류탄에 의한 피해였다. 차라리 소총이라면 덜 참혹했을 텐데… 그 착한 천사들이 몇달 전 까지만 해도 이름도 몰랐던 동양의 작은 나라에서 팔다리가 잘리고 내장이 터져 나오면서 죽어가야 했던 것이다.
저들은 한결 같이 엄마가 보고 싶다고 했다. “신부님 엄마가 보고 싶어요.” 열이면 열 다 그랬다. 그들에게 뿌려줄 성유도 꽁꽁 얼어 있어 쓸 수가 없었다. 그저 그들을 부여안고 “주님 저희를 용서해 주십시오.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기도할 뿐이었다.
엄마가 보고 싶다고 울부짖는 청년들은 또 엄마 아버지에게 미안 하다고 했다. 자신 때문에 저들이 얼마나 슬퍼하고 힘들어 할 것인가를 생각 하면 그렇다는 얘기였다. 이 착한 청년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다 기성세대 어른인 우리들의 잘못과 죄인 것을…
딱하기는 중국군도 마찬가지였다. 그들도 고향에는 부모형제가 기다리고 있을 청년들 아닌가. 그런 청년들이 아침이면 진지 앞쪽 산처럼 높은 시체더미의 얼어붙은 한 조각으로 변해 있었다. 어제 아침 동이 틀 무렵 시체더미에서 비틀비틀 일어나 손을 들고 살려달라고 하던 한 어린 중국군의 눈빛이 영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백 야드 쯤 되는 거리 였는데도 그 침통하고 간절한 눈빛이 카트라이트의 눈에는 역력히 보였다. 그는 심한 부상을 입고 꽁꽁 얼어 있었다. 처음에는 시체 더미 속에서 꾸물대다 비틀 비틀대더니 일어섰다. 꾸부정하게 손을 들어 올리는 그를 보고 카트라이트는 자신이 달려가 그를 부축해야 겠다 생각하고 막 일어서려는데 어디선가 아군 총탄이 날라갔고 그는 다시 맥없이 쓰러 졌다. 카트라이트는 자신이 조금만 먼저 일어나 그에게 달려 갔다면 그를 살릴 수도 있었는데 싶기도 했지만 그런 자책은 이 살벌한 전장에서 사치일 뿐이었다.
하긴 보스턴 군종 교구의 군종 학교에서는 우리가 치르는 전쟁은 성전이고 적들은 악마여야만 한다고 굳게 그렇게 믿어야 한다고 강조해 가르쳤었다. 군종은 절반은 적과 싸워야 하는 군인이기 때문에 억지 같지만 그래야 한다는 것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