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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ptember 20,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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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實錄)소설>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25)

 안동일 작

 신앙 이란 무엇인가,  승총명록 (勝聰明錄)

“직암 기억 나는가? 월봉선생의 승총명록.”
“어찌 잊을 수 있습니까? 그 끔찍한 기록을…”
“거기에 아주 잘 나와 있지 않던가?
월봉 구상덕은 10여년 전에 세상을 떠났는데 승총명록을 양근의 조동섬에게 갖다 주라는 유언을 남겼고 그 아들이 고맙게도 필사를 마치고 양근으로 가져왔었다.

승총명록(勝聰明錄)에는 구상덕이 20세 되던 1725년(영조 1) 7월 29일부터 세상을 뜨기 사흘 전인 1761년(영조 37) 8월 25일까지 장장 37년간의 기록이 절절하게 담겨 있었다.
이에는 날씨와 기후 변화는 물론이고 향촌에서의 생활, 농사 작황과 물가 변동, 부세와 부역, 진휼 정책, 중앙의 지시나 지방관 교체와 같은 행정 사항, 전국에서 발생한 각종 사건ㆍ사고 등이 망라되어 있었다.
만년에 구상덕은 “문 앞 몇 발자국도 위태로운 세상을 보았다” 고 술회 했는데 이를 반영하듯 승총명록에는 재난에 관한 서술의 비중이 상당했다. 닥쳐온 재난을 기록함으로써 앞으로 다가올 재난의 징후를 포착하고 대처하는 데 활용하기 위함이었다. 구상덕은 기록 자체를 중시한 사람이었다. 제명(題名) 자체가 ‘총명함을 뛰어넘는 명료한 기록’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아무리 기억력이 뛰어나고 영리한 재주가 있어도 기록에는 미칠 수 없다는 것이 구상덕의 소신이었다.

“지금 사적을 기록하지 않으면 훗날에 무엇으로 거울을 삼겠는가” 라고 썼던 말도 기록에 대한 그의 인식을 잘 보여준다.

승총명록에는 매년 말 한 해를 종합적으로 개괄하면서 풍흉, 재난, 질병, 지방관에 대한 품평, 민생의 어려움 등을 기술돼 있는데 연말 종합 기록은 해가 지날수록 작성되는 내용이 풍부해지고 구성 요소도 일정한 체계를 갖추는 모습으로 진전했다. 전체적으로 흉년일수록 기록의 양이 많고 충실도가 뛰어났다.
1752년(영조 27)은 전국적으로 흉년과 기근이 가장 극심했던 시기로 꼽힌다. 영조대를 통틀어 가장 많은 급재결(給災結)을 기록한 해였다.  급재는 재해 정도를 따져 부세를 경감하는 조세제도다. 그때 직암은 만 10세 때로 모두 고생했던 기억이 상기도 남아있는 해였다.

<금년 1월과 2월 사이에 날씨가 가물어 우물물이 다 말라서 물 긷는 자들이 모두 하천 도랑으로 갔다. … 5월 장마 이후에는 큰물이 드물었고 6월에 큰 가뭄이 이어 졌기에 병충해가 매우 심하여 들판이 온통 황폐해졌다. 염병, 역병, 이질 세 가지 재 앙이 또 번져 사람들이 죽어나가는데 그 수를 알 수가 없다. 겨울 내내 먼지 적실 정도의 비조차 내리지 않고 혹독한 추위 또한 옛날에도 없던 추위라서 굶주림과 추 위 그리고 질병으로 얼어 죽은 시체가 삼대처럼 많아 마을 사람들이 새끼줄로 시체 의 발을 묶어 끌어서 구덩이에 던지니 길에 시체를 끈 자국이 마치 수레바퀴 자국 같았다. 統營은 거지 시체를 이루 다 매장할 수가 없어서 마을 사람 4명이 한 조가 되어서 시체 하나씩 끌어다 묻는데 각각 묻기가 어려워 여러 시체를 한데 쌓아서 흙 을 가져다 덮었다고 한다. 본현의 각 마을에는 監官과 監考를 두어 시체를 매장하였다. 게다가 도처에서 화재에 대한 소식이 봄철보다 더하니, 사람들이 잠자리에 등을 붙이고 편히 잘 수가 없다. … 길거리에서 들은 말에 의하면 사람을 먹는 일이 발생했다는데 湖南에서는 자식을 바꿔서 잡아먹은 자가 있다고들 하였다. 전하는 자가 한 두 사람이 아니다.>

마지막 부분은 확인되지 않은 풍설이었지만 너무도 끔찍한 기록이 아닐 수 없었다.
영조시대 59년 동안 풍년이 들었다고 하는 해는 극히 드물어 손에 꼽을 정도였다. 태평성대 라는 말이 전체 기록을 통털어 1757년에 처음으로 나온다.

 <금년 농사는 모든 곡식이 풍년이었는데, 들깨만 도리어 지난해에 미치지 못했다. 그리고 6ㆍ7월 사이에 보리의 궁핍이 특히 심했고, 지금 시가는 7,8 말 (단위당 수확량을 말하는 둣)에 지나지 않는다. 목화는 처음에는 잘 되다가 장맛비에 손해를 입어 6ㆍ7근에 지나지 않는다. 금주령이 여전히 매우 엄격한데 세시를 앞두고 성상의 하교가 거듭 내렸다. 민간에 질병이 없고 기아가 없어 태평시절이라고 말할 만하다. 1757.12.29>

반백년 치세를 이루었다는 영종의 시대가 이럴진데 다른 시기는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임란과 호란 이후 이땅은 이상 저온과 기후 불순의 여파가 사람들을 강타한 재난의 시기였다. 인조대 병정대기근(1626~1627)과 계갑대기근(1653~1654), 현종대 경신 대기근(1670~1671), 숙종대 을병대기근(1695~1696) 등이 전대미문의 재앙으로 회자되고 있다.
영종 연간에서도 대살년(大殺年)의 참상은 여전했던 것이다. 해마다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가뭄과 물난리는 흉년과 기근을 불러왔고 삶의 터전인 향촌사회를 피폐하게 만들었다. 돌림병의 창궐은 끝이 어디일지 알 수 없었다. 느닷없이 호랑이가 집안까지 들이닥쳐 사람의 혼을 빼놓고 인명과 가축을 해치는 일도 적지 않았다. 자연재해로 인한 피해 못지않게 사람에 의한 재난도 심각했다. 어려운 때일수록 마을에는 도둑이 들끓었고, 폭력적인 세금 징수는 삶의 의욕을 앗아놓는 경우가 많았다.
금대는 구상덕에 대해서도 승총명록에 대해서도 아는 바 없었기에 직암이 간략하게 이에 대해 설명했다. 끔찍한 기록을 완화해서 설명해 줬다.

“설마 그런 일까지 있었겠습니까? 뜬 소문이겠지…”
“사람이 그만큼 무서운 겁니다. 사람이 궁지에 몰려 광분하면 못하는 일이 없지요, 자연재해 보다 무서운게 인재입니다. 사람 때문에 일어나는 재난과 황액이 더 끔찍한 법입니다.”

서로들 생각에 잠겨 사이가 있었다. 금대는 속이 답답한지 자신 사발에 남아있던 탁배기를 벌컥 들이켰다. 사실 금대는 술도 잘하지 못했다.
“월봉이란 어르신 왜 그런 기록까지 남기셔가지고… 어찌하면 좋을까요? 이 나라는 영 가망이 없습니까? 동섬 형님.“
“근본적인 해결책이라고 까지 할 것은 없지만 월봉 어르신도 한마디 해 놓기는 하셨지.”
동섬이 금대의 질문에 답하면서 직암을 쳐다 보았다. 이 또한 금대에게 일러주라는 뜻 같았다.

월봉 구상덕은 자신의 책에서 주목할 만한 제안을 하고 있는데 ‘농자지 천하대본’의 틀을 과감히 바꿔야 한다는 것이었다. 조선 땅은 원천적으로 농사, 특히 쌀농사에 적합한 땅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벼농사에는 1년에 8백척 이상의 물이 필요한데 조선땅의 평균 강수량은 6백척 남짓으로 물부족을 태생적으로 안고 있어야 했으며 4, 5년 마다 찾아오는 홍수는 논밭을 쓸어버리기 일쑤라는 것이었다.

이 땅의 농업에 대해서는 남인 실학계열에서 큰 걱정들을 하고는 있었지만 오랜 통계를 통해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진단한 이는 그가 처음이었다. 스승 성호선생도 이땅의 농업발전의 저해요인으로서 노비제도·과거제도·벌열제도(閥閱制度)·기교(技巧, 妓敎)·증니(憎尼)·유타(遊惰) 등 여섯 가지를 열거하여, 이와 같은 요인만 제거하면 농업은 발전할 것으로 보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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