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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實錄)소설>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24)

 안동일 작

 신앙 이란 무엇인가, 너무도 가난한 나라

금대 이가환은 어려서 부터 신동으로 소문 났었다. 집안 내력이 그랬다. 거봉 성호 이익을 종조부로 하여 부친 용휴, 가환으로 내려온 문재와 학재는 주변 남인가의 자랑 거리였다. 가환의 집안은 종증조부 이잠(李潛)이 희빈장씨를 두둔하는 소를 올린 일로 1680년(숙종6)의 경신환국(庚申換局)때 목숨을 잃은 이후로 정권에서 소외되었다. 평생을 안빈낙도 유유자적한 가환의 부친 용휴 선생의 글들은 특히 그 문학적 향취가 뛰어나 남인 학동들의 그 방면 귀감이었다. 반면에 가환은 학구적이었고 과학적이었다.

가환은 이후 영종 (당시의 존호, 영조라는 존호는 후일 고종때 추중 됐다) 의 탕평책으로 나이 30이 돼서 과거를 봤고 대뜸 1년만에 대과에 급제 했고 지금의 상이 즉위한 이듬해인 1777년에 증광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했다. 1778년에는 문신 제술 시험에서 수석을 차지하면서 대번에 6품으로 승진해 규장각에 들었다. 1780년 (정조 4) 비인현감으로 나갔고 2년 임기를 마치고 이조정랑에 오른 터였다.
그런 그의 입에서 뜻밖의 대답이 나왔다.

“이 나라의 산학을 제대로 정립하고 싶어서였습니다.”
‘산학, 수학을 정립하고 싶다.’ 공부벌레 금대와는 어울리는 대답이었지만 그래도 의외였다.
산학이라 부르는 수학은 그때까지 천시받는 학문 이었다. 중인 가운데 특출난 이들이 시험을 거쳐 산사(算士)라는 직위에 오르기는 하지만 이는 역관 처럼 중인계급 에서 거의 내부적으로 돌려 차지하는 하급 벼슬이었다.

금대는 어려서 부터 수학에도 비상한 재능이 있었다. 구할 수 있는 책은 다 구해 읽었다는데 그중 마테오 리치가 썼다는 기하원본(幾何原本)과 수학원류에 대한 경탄과 자랑은 일신도 기억하고 있는 바였다. 천주실의를 쓴 미테오 리치 말이다. 출사를 해야 하는 바람에 강학에는 참여 하지 않았지만 물론 금대도 천주실의와 칠극은 읽었다. 후일의 이야기이지만 가환과 함께 그 시대 천재의 반열에 속하는 정약용은  이가환에 대해 “귀신이 아닌가 의심할 정도였다”는 표현을 사용한 적이 있다. 매형이었던 이승훈을 매개로 이가환과도 깊은 인연을 맺어 성호학파의 막내가 된 약용은 천렵이 있었던 이듬해인 1783년이 돼서야 증광시에 합격해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가게 된다.
성균관에 들어간 다산이 매달 치르는 시험과 열흘마다 치르는 순시(旬試)에 거의 매번 수석으로 뽑혀서 책과 종이와 붓을 상으로 받으며 정조의 총애를 받았는데 그가 자신의 학문이 이가환과 이벽의 큰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군데 군데 언급하고 있는 것은 유명하다.

또 후일 백서사건으로 조선 천주교단에 큰 환난을 불러오게 하면서 금대의 목숨까지도 앗아간 신유박해를 더 크게 발화시켰던 수재 황사영도 이가환에 대해 “읽지 않은 책이 없었고 기억력은 신과 같았다.”라고 교황청에 보내는 백서에 적을 정도였다. 참 몇년 후 있게 되는 이가환과 이벽의 천주교 논쟁이 크게 회자되는데 이는 와전된 바가 크다. 따로 알아보기로 한다.

“그래서 뜻을 어느 정도 이루었는가?”
“아닙니다. 얼마 안가 그렇게 그 일에만 전념할 수는 없겠구나 하는 자각이 들었지요. 급한게 너무도 많았습니다.”
“급한 일이라면 무엇을 말하는가?”
“나라의 형편을 말하는 것이지요, 관리가 되다나니 이를 좌시할 할 수 없었습니다. 상감의 간곡한 뜻이기도 했고요 그래도 수학책은 틈날 때 마다 붙들고는 있습니다.”
후일 그의 천문학과 수학 지식은 일식 ·월식이나 황도 ·적도의 교차 각도를 계산하고, 지구의 둘레와 지름에 대한 계산을 도설로 제시할 수 있을 만큼 정밀한 수준에 이르렀다고 전해진다. 신유박해 당시 “내가 죽으면 이 나라에 수학의 맥이 끊어지겠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그렇겠지, 그래서 어찌할 요량인가?”
“실은 아직 생각 중입니다. 일단은 지금의 임금께서 그래도 영명한 분이라 선왕에 이어 개혁을 추진하고 있기에 거기에 미력이나마 보태려 하고 있습니다. “
학자군주를 자처하는 현 임금이 가환의 박학다식함에 감탄하여 그를 총애했으며 그를 규장각에 붙둘어 두면서 채제공을 이을 남인의 후계자로 보고 있다는 얘기는 벌써부터 자자 했다.
규장각은 본래 역대 왕의 글과 책을 수집, 보관하기 위한 왕실 도서관의 기능을 가지는 기구로 설치된 곳이다. 그러나 현 임금은 여기에 비서실, 승정원의 기능과 문한 기능을 통합적으로 부여하고, 과거 시험의 주관과 문신 교육의 임무까지 부여하면서 새로운 권부로 등장해 있었다. 마치 세종 때의 집현전 처럼.

사실 자신 스스로 어려운 시절과 어려운 일을 겪어야 했던 서출 출신의 영인군, 전 임금 영종이 개혁 성향을 보이면서 결이 다른 정치를 선보이려 했고 현왕도 이를 계승하려 허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무엇 보다 두 임금이 붕당을 없애자는 논리에 동의하는 탕평파를 중심으로 정국을 운영하는 탕평책을 펴고 있는 것은 남인들에게는 무척이나 반가운 일이었다. 탕평은 서경에서 나온 말로, 임금의 정치가 한쪽을 편들지 않고 사심이 없으며, 당을 이루지도 않는 상태에 이르는 것을 의미한다.

선왕 영종은 붕당의 뿌리를 제거하기 위하여 공론의 주재자로서 인식되던 사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고, 그들의 본거지인 서원을 대폭 정리했다. 국방력 강화에도 신경써 국초부터 실시해 오던 5위 제도를 개혁하여, 훈련도감을 비롯한 5군영을 설치했다. 민생 쪽에서는 원성이 자자하던 군역을 개선해 균역법을 실시했고 신문고를 부활 시키기도 했다.
아울러 선왕은 붕당의 근원이 된 이조 전랑 (이 직위를 놓고 동인과 서인이 갈라졌다) 의 권한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그들이 자신의 후임자를 천거하고, 3사의 관리를 선발할 수 있게 해 주던 관행을 없애라는 지시를 하기도 했다. 그래도 그자리의 권세와 신망은 여전했다. 그 이조 전랑 자리에 금대가 제수 된 것이다. 그러니 각오가 남달라야 했던 것은 자명하다.
그런데 동섬은 그런 금대에게 “성심것 잘 해보라”는 덕담이라도 던져 줌직 하건만 그럴 요량이 없는듯 했다. 분명 영종 임금에 대해서도 현 상감에 대해서도 다른 생각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영종 임금의 탕평책은 붕당 정치의 폐단을 근본적으로 해결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려, 노회한 왕권으로 붕당 사이의 치열한 다툼을 일시적으로 억누른 것에 불과한 것 아닌가 싶은데.. 붕당의 작폐는 또 터지게 되어있습니다. 아시겠소? 아우님들. ”
탕평책 뿐만 아니라 영조의 시책들은 통치 체제를 강화하기 위한 것으로서, 근본적으로 사회⋅경제적 폐단을 시정하는 데에는 미흡했다는게 동섬의 야박한 진단 이었다.
“50년을 통치했는데 이런일 저런일이 있었겠지, 잘한 일 좋은 일도 당연히 있었겠지만 그 사이 난리는 좀 많았는가? 무신란에 죽은 사람의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 아는가? 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게 한 끔찍한 일은 또 어떤가?  다 노론소론 붕당때문 아니었는가. 그리고 흉년은 또 얼마나 들었고… 걸른하면 홍수. 물난리가 나지 않았는가? 백성들의 삶은 여전히 고단하기 이를 때 없었네. ”
실제 그랬다. 영조 집권 초기 무신년 일어난 이인좌의 난 때는 3천이 넘는 사람이 처형돼야 했고 크고 작은 재해와 돌림병이 끊이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나마 임금이 상대적으로 근검하고 허례를 배격하는 성정이 있었기에 착한 백성들 사이에 성군이라는 말이 도는 것이라이 그의  평가였다. 그의 이런 평가의 기저에는 경상도 고성의 재지사족인 월봉 구상덕( 月峯 仇尙德, 1706~1761) 이 쓴 승총명록이 있었다. 동섬은 동사강목을 만들기 위해 전국 팔도의 재야 사학자들을 찾아 다녔는데 월봉도 그때 만난 기인이사의 한 사람 이었다. 그는 그 시절의 재난과 돌림병에 대해 핍진하게 기록하고 있었다. 일신도 년전 그 필사본을 동섬이 보여줘서 구경 한 바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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