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바닥에서, 노래로 뿌린 씨앗…‘뒷것의 삶’
학전 만들어 ‘앞것’ 배우·가수들 뒷받침
아침이슬이 끝내 하늘로 올라갔다. 뜻있는 이들의 문화공간 학전 김민기 대표가 21일 세상을 떴다. 향년 73세.
학전은 22일 이 같은 소식을 알렸다. 고인은 ‘아침이슬’ 같은 명곡을 만든 작곡가이자, 학전 소극장으로 대학로 문화를 바꾼 공연 기획자·연출가였다. 고인은 지난해 위암 진단을 받고 투병해왔다. 고인은 통원 치료를 받던 중 19일부터 갑자기 상태가 악화됐다. 20일 오전 자택인 경기도 일산 인근의 병원으로 이송돼 21일 오후 8시26분 별세했다.
1951년 전북 익산에서 10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고인은 어린 시절부터 음악과 미술에 두각을 나타냈다. 서울대 미대 재학 중 음악 활동을 시작했다. 1971년 양희은의 ‘아침이슬’ 작곡가로, 자신의 독집 음반 ‘친구/길’의 작곡가 겸 가수로 본격적인 음악 인생을 열었다. 김민기의 독집 음반은 당시 흔했던 외국 번안곡이 아닌, 대부분 자작곡으로 채워졌다는 점에서 한국 대중음악사의 중요한 이정표가 됐다.
1970년대 김민기 음악의 가치는 당시 시대상과도 맞물려 있다. ‘아침이슬’ ‘친구’ 등 김민기의 노래는 박정희 정권을 직접 비판하기보다는 문학적 은유로 시대를 노래했지만, 당국은 김민기의 ‘불온성’에 눈감지 않았다. 김민기의 노래는 대부분 방송금지됐다. 제도권에서 활동하기 어려워진 김민기는 당대 저항시인 김지하와 만나 함께 작업하기도 했다. 김민기는 김지하가 쓴 희곡 ‘금관의 예수’에 노래를 붙여 무대에 올렸다. 이는 김민기가 무대 경험을 쌓는 계기가 됐다. 군에 입대한 김민기는 퇴역하는 선임하사를 위해 ‘늙은 군인의 노래’를 만들기도 했다. 1970년대 김민기는 야학 활동을 하며 노동자의 삶에 관심을 기울였고, 탈춤이나 판소리 등 전통음악도 공부했다.
김민기의 삶은 ‘저항’과 ‘뒷것’으로 상징된다. 인생 1막에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저항의 아이콘’이 되어 고초를 겪었고, 인생 2막에는 ‘앞것’인 배우·가수들 뒤 어두운 곳에서 묵묵히 그들을 밝게 비추는 ‘뒷것’을 자처했다.
김민기는 서울대 미대에 진학한 뒤 그림 대신 음악에 몰두했다. 고교·대학 동창 김영세와 포크 듀오 ‘도비두’를 결성하고, 1970년 당시 청년 문화의 집결지였던 서울 명동 와이더블유시에이(YWCA) 회관 ‘청개구리의 집’에서 노래했다. 대표곡 ‘아침 이슬’이 태어난 것도 이 시기다. 서울 강북구 어느 묘역의 풍경에서 영감을 얻어 만든 것으로 전해진다.
창작자의 의도와 달리 ‘아침 이슬’은 정치·사회적 맥락을 지니게 됐다. ‘청개구리의 집’에서 만난 가수 양희은이 1971년 9월 데뷔 앨범에 먼저 싣고, 김민기도 한달 뒤인 10월 자신의 데뷔 앨범에 실었을 때만 해도 아름다운 노랫말로 ‘건전가요 서울시문화상’을 받았다. 하지만 유신 정권 반대 시위에서 불리기 시작하면서 돌연 금지곡 판정을 받았다. 이후 김민기는 정권에 요주의 인물로 찍혀 발표하는 노래마다 금지곡 딱지가 붙었다.
대학 졸업 뒤 공장과 탄광을 다니며 생계를 꾸렸다. 그러나 음악은 놓지 않았다. 공장에서 합동결혼식을 올리는 노동자들을 위해 축가 ‘상록수’를 만들어 불렀다. 열악한 환경의 노동자들을 보고 노래극 ‘공장의 불빛’을 만들었다. 1984년 대학 노래패를 기반으로 한 ‘노래를 찾는 사람들’ 음반을 제작했다.
이후 김민기는 새로운 길을 걸었다. 자신의 음악 인생을 정리한 4장짜리 음반을 발매하기로 하고 그 계약금으로 1991년 서울 대학로에 소극장 학전을 열었다. ‘배울 학’(學)에 ‘밭 전’(田) 자를 쓴 이름을 두고 그는 “못자리 농사를 짓는 곳”이라고 말했다. 모내기할 모를 기르는 조그만 논에 빗대 나중에 크게 성장할 예술가들의 디딤돌 구실을 하겠다는 뜻이었다.
그 뜻대로 많은 예술가가 학전을 거쳐 성장했다. 동물원·들국화·강산에·장필순·박학기·권진원·유리상자 등이 이곳에서 노래했고, 김광석은 생전 1천회 공연을 채웠다. 김민기가 연출한 록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은 4200회 이상 공연하며 수많은 배우를 배출했다. ‘학전 독수리 5형제’로 통하는 배우 설경구·김윤석·황정민·장현성·조승우를 비롯해 세계적인 재즈 가수 나윤선도 이 무대를 거쳤다. 윤도현은 1995년 ‘개똥이’로 첫 뮤지컬 출연을 했다.
학전 폐관 당시 김민기는 “좀 더 열심히, 더 많이 뛸 수는 없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학전을 기억해주시는 분들에게 감사하다는 말씀을 꼭 전하고 싶다”는 소회를 전했다. 그는 이제 가고 없지만, 그가 남긴 노래들과 학전의 정신은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아 있다. 유족으로는 배우자 이미영씨와 2남이 있다. 빈소는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발인은 24일이다. 발인 당일 오전에 학전 극장과 마당을 한 바퀴 돌고 장지로 갈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