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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實錄)소설>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22)

 안동일 작

   신앙 이란 무엇인가,  천렵놀이에서

신라는 당나라를 몰아낼 만큼 군사력이 있었고 고구려는 수나라를 멸망에 이르게 한 군사 강국이었고 고려도 요나라 거란을 두번이나 무찔렀고 세계 최강 몽골에게 끝까지 항전해 나라는 빼앗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반면에 조선은 일본이 쳐들어 오자 마자 임금은 백성을 버리고 도망가기 바빴고 청나라가 쳐들어 왔을때는 임금의 이마가 깨져 피투성이가 될 정도로 조아려야 했다는 것이다.
이게 다 조선이 유학을 신봉 하면서 모든것을 다 뒤로 돌린 명분싸움의 정치에 몰입되면서 필연적으로 일어나게 된 일이라고 했다. 이런 그의 정치 과잉론은 과격했지만 경청할 만했다. 몇변을 들어도 직암은 그때마다 속이 시원해 짐을 느꼈다.

된장에 고추가루 까지 짙게 푼 쏘가리 탕에 탁배기 한잔이 들어가자 동섬의 언사가 더 적나라해졌다. 옆에 있는 현직 관료 기환은 좌불안석인 모습이다.
이날 천렵의 주인공, 수훈갑은 동섬이었다. 실은 쏘가리탕도 동섬을 잘 아는 청학리의 손씨 아낙이 있었기 때문에 맛갈지게 끓여 낼 수 있었다. 손 아낙은 청학천 변에서 밭일을 하고 있었는데 참외 밭 한처사 처럼 반갑게 인사를 해왔고 일행의 고기잡는 수작을 계속 지켜본 모양인데 어렵사리 건져 올린 쏘가기 대 여섯 마리를 놓고 상문과 상덕이 쩔쩔 매는 모습을 보고는 썩 나서서 “도련님들은 저리 비켜나시오” 하면서 익숙한 솜씨로 칼질을 하더니 이내 끓여 냈던 것이다. 집에 달려가서 준비해 왔던지 당시로서는 귀한 고추가루며 깻잎, 푸성가리 등을 들고 왔었다.
쏘가리 건져올리는 일도 동섬이 주역이었다. 직암과 금대의 그물질은 형편 없었는데 동섬은 요령을 꿰고 있었다. “저리들 가서 이쪽으로 몰기나 해, 그물을 바닥에 까지 놓으면 흙탕물 일어나 고기들이 더 빠져나가는 법이지 요렇게 잡고 재빨리 건져야지.”
그런 그의 손그물에는 손바닥 만한 금린어, 쏘가리가 들어 있었다.
“형님이 어부로 나섰다가는 남한강 쏘가리가 남아나지 않겠습니다. 허허”
바지를 허벅지 까지 걷어 올렸지만 밑단은 벌써 흠뻑 젖은 금대가 한마디 해서 같이 웃었다.

정치 얘기가 나온 것은 금대가 쏘가리탕을 끓여낸 손 아낙에게 감사를 표하느라  “모처럼 한가롭게 원족을 왔는데 강상 마을에 민폐만 잔뜩 끼칩니다. 그려” 했기 때문이다.
“금대 자네도 그런 언사 쓰시는가 민폐?.”
대뜸 동섬이 한마디 반응했고 “자네같은 당상관이 이 정도를 민폐라고 안다면 세상이 이리 곤하지는 않을 걸세” 하고 말을 이으면서 시작 됐다.
동섬은 이땅의 정치가 온통 민폐 투성이이라는 평소의 지론을 폈다.
“이 땅의 양반이라 일컫는 사람들은 천자문을 읽는 순간부터 유학으로 포장된 정치의 물결에 휩싸이게 되게 마련이지. 세상의 이치와 도리를 깨달아 성인이 되는 길이라 하여 도덕을 애기하고 군자의 도를 얘기하지만 다시 말하지만 군자란게 뭣인가? 군왕의 아들 아닌가. 실제는 자신과 가문의 이익, 당파의 이익을 쫒아 온 것이 조선 사대부들 조선 군자들의 본 모습이 아닌가. 사대부들이 그토록 중시한다는 제사도 따져보면 가문의 위세와 후광을 과시하고 내세우는 정치 행위로 변질되지 않았는가. 도처에 난립하는 문중 서원들을 보게나, 그게 어디 공부의 집인가?”

반면에 가환은 언제나 처럼 그래도 유학이 본래 인간 세상을 바로 살기 위한 학문이기에 너무 모든 것을 부정하고 타파해야 한다고 몰아세울 것 까지는 없다는 온건론을 폈다.
가환은 사색당쟁 까지도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고 했다. 하긴 자신 스스로가 당쟁의 한복판에 서 있는 조정 신료였기 때문에 그럴지도 몰랐다. 붕당의 시작이 훈구에 대립하는 사림의 개혁사상에서 나왔다는 얘기를 전가의 보도 처럼 사용했다.
“물론 상대방을 무조건 반대하고 이기려 하는 붕당이 바람직하다는 것은 아니지요. 하지만 서로 견제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고 볼 수 있는 측면이 있어요. 그런 붕당이 없었으면 더 부패하고 더 문제 투성이의 나라가 됐을 것이라는 게 내 생각이오. 지금이 바로 그렇지요.”
“아우님은 아직도 그렇게 양반 습속을 버리지 못하고 계시오, 그게 문제에요. 문제”
동섬이 가환을 몰아 세웠다.
“참 형님도 젊은 사람들 앞에서. 제 얘기는 붕당의 역사가 피비린내 나는 살육의 반복 이었다고들 하지만 내 얘기는 반대파의 집권으로 목숨까지 잃은 예는 손에 꼽을 정도라는 겁니다.”
일신은 두 동학의 티격태격에서 일종의 안도감을 느꼈다. 조선땅에서 이런 논쟁을 할 수 있는 벗을 둔 자신이 대견 하기도 했다.
동섬은 조선이 임란이나 호란이 있었을때 진작 망했어야 하는 나라라고 단언 하곤 했다. 직암과 둘이 있을때 그랬다. 큰일 날 소리였지만 맞는 소리였다. 동섬은 특히 조선의 노비 제도에 대해 분기 탱천해 있었다.
이날 천렵장에서도 그말은 또 나왔다. 노론 소론 남인 사색당쟁보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이 조선의 신분제도라는 것이다. 실제 붕당도 이런 질서, 신분제도 속에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야합이기도 하다는 얘기였다.
“세상천지에 제 누이 제 아들을 노비로 만들어 성도 쓰지 못하게 하고 아비라 부르지도 못하게 하는 족속은 우리 조선인 밖에 없소.”
망해버린 명나라도 진즉에 노비제도를 없앴고 청나라도 노비는 세습되지 않았다. 어미가 종이면 아들 딸도 종이 되는 때론 아비가 노비면 아들은 무조건 노비가 되는 그런 나라는 세상에 없다는 것이다. 왕권이 취약하고 지방 세력도 강성하지 못했던 조선에서는 왕은 왕대로 사대부는 사대부 대로 자신들의 이권을 지키기 위해 일천즉천 독특한 노비제가 생겨났다는 얘기였다.

“자네들 세종임금의 막내 아들이었던 영응군 애기 아시는가?”
“들어는 봤습니다. 그렇게 노복들의 숫자가 많았다면서요? ”
“약간의 과장은 있다고 생각 되지만 노비의 숫자가 만명에 이르렀다고 하지 않는가?”
영응대군 이염(李琰)은 세종의 여덟째 아들로서, 막내라서 그런지 몰라도, 생전에 부친의 애정을 크게 받았다. 본인 역시 어학에도 재능이 있었는지 한글창제에도 도움을 줬고 명황계감을 번역했던 실적이 있다. 그는 부친(세종)과 형(문종)으로부터 막대한 재산을 분할받았기 때문에 그의 부는 상상을 초월했다고 한다. 노비 숫자가 무려 1만명에 달했다는 얘기는 성종조의 실록에 나오는 이야기란다. 실록이야 읽을 수 없었겠지만 실록청의 사관들의 입을 통해 전해져 구전돼 오는 얘기였다.
“우리가 금쪽 처럼 떠 받들고 있는 퇴계 선생도 수백의 노비를 거느린 지주였다는 사실 알고 있는가?”
“듣기는 했는데 과장이 좀 있겠지요. 한 몸 뉘우시기에 한 평방도 넓다하셨던 어른이…”
“그걸 지금 따지자는게 아니라 조선조 초 중반기엔 노비의 숫자가 어마어마해 성종조에 이르러서는 인구의 4할이 노비였는 얘기를 하고 싶은 걸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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