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일 작
천진암 강학 그날
세례자 요한의 탄생을 시작으로 예수 유년기 예루살렘 성전 방문, 예수의 세례와 열두 제자, 산상수훈 오병이어의 기적, 물 위를 걸으심, 선한 목자, 72제자의 파송, 나사로의 부활, 유대인들의 모의, 최후 심판 예고, 유월절 준비, 십자가 사건과 매장, 그리고 부활과 사도들의 선교로 이어지는 예수 일대기가 차례로 망라 되어 있었다.
한번도 가본적이 없고 본적이 없지만 중동의 삭막한 사막 마을과 오아시스, 바다처럼 넓은 호숫가를 철환하는 장발의 청년 야소의 모습과 그를 따르는 투박한 촌부, 어부들의 모습이 선연히 그려지며 강학 일동의 뇌리를 흔들었다.
강학 도반들은 교요 서론과 언행 기략을 끝낸 뒤에 칠극을 다시 들여다 보았다. 직암을 위시해 강학 좌중들에게는 진작부터 칠극은 매우 절실하면서도 친근하게 다가온 책이었다. 칠극은 중국에 나와 있던 역시 예수회 신부 판토하가 인간의 보편적인 7가지 죄악의 근원과 이를 극복하기 위한 7가지 덕행에 대해 서술한 천주교 수덕서다. 죄악의 뿌리가 되는 탐욕, 오만, 음탕, 나태, 질투, 분노, 색과 더불어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덕행으로 은혜, 겸손, 절제, 정절, 근면, 관용, 인내의 일곱 가지를 소개하고 있다. 하나도 버릴게 없는 금과 옥조의 이야기였다. 특히 천주실의와 마찬가지로 유학의 언어로 설명하고 있어 더욱 친근하게 다가 섰다.
이 책은 천주실의와 함께 일찍부터 조선에 전래되어 연구되었는데 직암 녹암의 스승인 성호 이익(李瀷) 선생도 생전에 이 칠극에 대해 유학의 극기설(克己說)과 같다고 전제한 다음, 절목(節目)이 많고, 처리의 순서가 정연하며, 비유가 적절하며, 간혹 유학에서 미처 발견하지 못한 점도 있다면서 이는 극기복례(克己復禮)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는 것이 있다고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성호의 직계 이자 직암의 장인인 순암 안정복(安鼎福) 선생은 칠극은 공자(孔子)의 사물(四勿)의 각주에 대한 단편적인 지식으로 포장한 것에 불과하며, 비록 심각한 말이 있다 하더라도 취할 바가 못 된다고 폄하했다.
실은 칠극 뿐 아니라 천주실의 등 초기 서학서적을 광범위하게 이 땅에 소개한 이가 바로 성호 이익이다. 성호는 “초기선교사들이 저술한 책이 수십 종이나 됐는데, 천문과 지리를 관찰하고 역법(曆法)을 계산해 내는 오묘함은 중국에서 일찍이 없던 것이다.” 고 말해 서양의 천문·지리·역법의 우수함을 인정했고 마테오 리치 또한 중국 학자 못잖은 호걸이라 인정했었다.
성호는 서양문화에 대해 나름대로 존중하는 자세를 가졌지만 그의 서학은 일종의 박문기람 차원에 머물렀던 것이 사실이다. 천주학을 통한 사회 변혁은 언감생심이었다. 하지만 그 때 천진암 강학 도반들에게는 사회 변혁의 열망을 실현해 줄 새 빛으로 다가왔던 것이 틀림없다. 칠극이 특히 그랬다.
그런데 성호는 천주교의 종교 교리적 측면, 특히 예수 독생자론, 천당 지옥론에 대해서는 상당히 비판적인 태도를 취했다. “마테오 리치가 불교의 가르침을 극도로 배척하면서 자신들도 결국은 똑같이 황당무계한 데로 귀결된다는 것을 도리어 깨닫지 못했다”고 했다.
스승은 이처럼 황당무계란 표현을 썼다. 그런데 실은 스승의 이 같은 비판은 권일신 자신과 같은 제자들에게 천주학에 대한 호기심을 더 크게 불러일으켰다. ‘천주교의 황당무계함’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궁금했고, 그래서 천주실의를 비롯한 천주교 책들을 더 열성적으로 읽게 됐던 것이다.
그러면서 그정도의 고등 문화를 이룩해낸 천주 사상이 그저 황당무계할 뿐만은 아닐것 이라는 호헤적 의문을 가지고 탐구를 했던 것이다.
이런 제자들을 앞서 말한대로 ‘신서파(信西派)’라고 했는데, ‘ 서학을 믿는 파’라는 뜻이었다. 권철신, 권일신, 이벽, ·정약전, 정약용 등 천진암 강학 도반들과 이가환, 이병휴 등이 대표적인 신서파로 꼽혔다.
반면 천주교 책을 읽은 성호 이익의 제자들 중에는 스승처럼 천주교를 황당무계한 종교라고 결론지은 제자들도 적지 않았다. 그들은 ‘공서파(攻西派)’라고 불렸는데, ‘서학을 공격하는 파’라는 뜻이었다. 대표적인 인물은 안정복·신후담·이기경·홍낙안 등이었다. 신서파를 성호 좌파(左派), 공서파를 성호 우파(右派)로 부르기도 했다.
안타까운 일은 언급했듯이 아는 적이 더 무섭다고 후일 천주교를 고발하고 규탄하며 탄압에 앞장섰던 사람들이 같은 남인 공서파들 이었다는 사실이다. 후일 이어지는 탄압은 대부분 공서파 들에 의해 촉발 됐다. 하지만 공서파라고 해서 양명을 했던 것이 아니다. 오히려 무고한다 하여 귀양을 가기도 했고 결국은 남인은 공멸했고 사색 당쟁은 세도정치로 이어지면서 조선은 망국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아무튼 그때 강학 일동은 광암 이벽이 돌연 운반해 온 이른바 신앙의 불씨를 소중히 지피는 과정에서 다시 만난 칠극을 다시 들여다 보면서 몇 차레나 고개를 주억 거렸는지 모른다. 마치 한비자를 공부할 때의 망징을 떠올려야 했다. 그때 이미 강학 도반들은 보유론에서 한발 벗어나 최대 관심사로 천주학이 조선 사회를 어떻게 바로 잡을 수 있는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할 수 있느냐에 쏠려 있었다. 진작부터 직암 등 강학 일동에게 유학을 근간으로 하는 조선 사회는 망조가 들어도 단단히 든 사회였다. 무엇보다 백성들의 살림 살이가 말이 아니었다. 근본적이 변혁이 없고서는 바로 잡을 수 없는 사회로 전락해 있었다.
파티마의 아동들에게는 기도와 반공사상으로서의 천주가 다가왔다면 조선의 천진암에는 변혁이념 으로서의 천주사상이 찾아왔던 것이다. 특히 천주교의 평등사상이 그랬다.
파티마의 아동 성인들은 그때 목초지 ‘코바 다 이리아’ 라는 곳에서 작은 돌담을 쌓으며 놀고 있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번개와 같은 섬광이 내려치면서 아이들 앞에 있는 작은 떡갈나무 위에 성모 마리아가 나타났다. 루치아 수녀는 당시 자신이 목격한 성모의 모습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지금까지 어느 곳에서도 본 적이 없는 매우 아름다운 젊은 부인이었는데 그 부인이 입은 옷은 반짝거리는 물이 채워진 수정 유리보다 더 강하고 밝은 빛을 쏟아내는 찬란한 것이었습니다”
부인이 입은 옷은 발밑 에까지 늘어뜨려졌으며 그 경계 부분은 별들로 장식되어 있었단다. 나이는 열여섯 살 정도 되어 보이며 표현할 수 없이 아름다운, 천상의 빛으로 가득한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무엇인지 생각에 잠긴듯한 슬픔도 배어 있었습니다. 가늘고 섬세한 그 부인의 손에는 진주 같은 것으로 엮어진 묵주를 들려 있었는데 가슴 부분에서 서로 맞잡고 있었습니다.”.
직암에게 예수의 가르침은 자유와 평등 그리고 박애 사랑으로 요약될 수 있었다. 직암에게 천주학은 공부 하면 할수록 세상을 바꾸는 인생을 바꾸는 사상이었다. 뒤에 살펴 보겠지만 결국은 질서와 기강만을 중시하는 유학과는 확연히 대비되는 피조물 로서의 자유와 평등의 정신이 그랬고 구원의 실천 덕목으로서의 사랑의 강조가 그랬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