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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ptember 19,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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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實錄)소설>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19)

 안동일 작

  천진암 강학 그날

광암은 그렇게 말했다. 그때는 절실하게 다가오지 않았지만 그 몇년 후 약종, 약용등 정씨가의 형제들이 형수의 제사를 끝내고 광암 이벽과 함께 뱃길로 한양으로 돌아가는 길에 미호 나루 근처의 절경을 보면서 광암에게  감사와 감탄의 의미를 설명 받고 환희에 가까운 큰 깨달음을 얻었다는 경험담을 들은 후에 다시금 고개를 끄덕 일 수 있었다.

저 아름다운 풍경이, 그것을 감탄 하는 인간의 심성이 그냥 우연히 만들어지 것이 아니라 연원이 있고 목적이 있다는 깨달음 이었다는데 꿈보다 해몽이라고 천재 약용의 해설도 그만큼 절묘했다. 광암은 년전 세상을 떠난 약종 약용 등 정씨가 큰 형수의 친 동생이었다.

아무튼 그때의 강학은 도반들에게 일대의 사변이었다. 보유론적 입장에서 서학의 실용적 정신을 현실 후생에 적용 하는 방안을 모색 해왔던 좌중에게 그를 뛰어 넘는 신앙의 원리로서, 혹은 경세의 기본 신념으로서의 천주학이 다가 왔던 것이었다. 얼만큼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느냐는 개인마다 차이가 있었다. 일신도 그랬지만 처음부터 ‘천당과 지옥이 있는데 독생자로 태어나  부활한 야소를 믿으면 천당에 간다’는 그 논리를 덥석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교요 서론의 첫 대목인 십계명은 크게 무리 없이 넘어갈 수 있었다. 하나이신 천주를 만유 위에 공경하여 높이고, 천주의 거룩하신 이름을 불러 헛 맹세를 발하지 말고, 주님 경배일을 지키라는 앞부분이 조금은 한번쯤 생각을 하게 하는 것이었지만 자신 이외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계율에는 오히려 안도감을 느껴야 했다. 야훼가 다른 신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말 아닌가. 중반이후 부분 부모를 효도하여 공경하고, 사람을 죽이지 말고, 사음을 행하지 말고, 도적질을 말고, 망령된 증참을 말고, 남의 아내를 원치 말고, 남의 재물을 탐내지 말라.  백번 맞는 말이었다. 불교의 오계나 유학의 사물잠에서도 강조하는 바였다. 십계명을 유학의 언어로 설명한 칠극을 후에 다시 자세히 살펴 보기로 하고 한번씩 독송하는 것으로 끝냈다.

교요 서론의 순서에 따르면 셋째권에 사도신조가 나온다.
我信上帝 全能的父 創造天地的主(아신상제 전능적부 창조천지적주) / 我信我主耶蘇基督 上帝獨生的子(아신아주야소기독 상제독생적자)/ 因聖靈感孕 因童貞女馬利亞所生 (인성령감잉 인동정여마이마소생) / 在本去被拉多手下受難 被釘於十字架(재본거피납수하수난 피정어십자가) / 受死埋葬 降在陰問 (수사매장 강재음문) / 第三天從死人中復活升(昇)天(제삼천종사인중부활승천) / 坐在全能父上帝右邊 (좌재전능부상제우변) / 將來必從邦裏降臨 審判活人死人(장래필종방리강림 심판활인사인) / 我信聖靈 我信聖而公之敎會 (아신성령 아신성이공지교회) / 我信聖徒相通 (아신성도상통 )/ 我信罪得赦免 (아신죄득사면) / 我信身體復活 (아신신체부활 )/ 我信永生 阿們 (아신영생 아문) .
당시 도반들은 불가에서 주요 소이경전 반야심경을 ‘관자재 보살행 반야 바라 밀다시…’ 한자를 우리말로 그대로 읽듯이 ‘아신상제 전능적부…’로 읽었고 후에도 그렇게 외웠다.

유학 경전을 탐독한 경험이 있는 대중 들에게 해석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언급한 대로 야소가 출가 하지 않은 동정녀 소생 이라는 것과 사망한지 사흘만에 다시 살아 났다는 것은 다수 도반들에게는 아직 납득되지 않았지만 종국에는 신앙으로 다가 서게 하는 일종의 상징적 설화로 다가 섰고 그렇게 이해 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직암에게 거의 충격으로 다가왔던 빛과 같은 대목이 있었다. 바로 ‘아신 성이 공지 교회’라는 대목이었다. 믿는 이들의 신앙의 공동체, 교회를 천지 창조, 예수 독생, 예수 부활 만큼 믿고 의지 한다는 고백 이다.  야소교에서는 신자들의 공동체 교회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얘기 아닌가. 그 교회가 끝내는  서구의 최강대국 라무 (羅瑪  로마)를 평정해 그 뛰어난 문화를 건설 했다는 얘기 아닌가.
경세 공동체 건설의 열쇄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 됐던 것이다. 이승훈과 정약종도 그랬다고 했다.
“숙사께서도 그러셨군요, 저희 들도 그 대목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떨어야 했습니다.”
“공동체, 교회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강학 일동은 일신을 숙사 (塾師) 라고 호칭했다. 불가나 무림에서 쓴다는 사숙과는 또 다른, 작은 스승이라는 유가의 호칭이다. 지아비 숙 자를 써서 숙사(叔師)라고도 쓰기도 했다. 그때 약종, 승훈은 20대 초 중반이었고 일신은 벌써 30대 후반이었다.  숙사와 동학 들은 서로를 쳐다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조선 땅에 빛이 내리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런 강학 일동에게 제대로된 야소(예수)의 일대기는 진작부터 궁금한 사안이었다. 광암의 집에 비장돼 있던 ‘천주강생언행기략’은 좌중들이 궁금해 했던 야소의 일생을 제대로 소개한 책이었다. 그때의 강학 때 교요서론을 끝낸 후 모두들 이 책에 흥미를 가지고 매달렸던 것은 후일 성서, 천주경전 성경을 이해 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

광암의 조부는 병자호란 때 청나라 심양으로 끌려 갔던 소현 세자의 수행원으로 몇년 뒤 귀국할 때 아담 샬 신부의 주선으로 많은 서학 서적을 갖고 귀국 했었다.  천주강생언행기략도 그중 하나였다. 이처럼 광암의 천주학은 남다른 인연이 있었던 것이다.

나흘쯤 언행기략 강독이 진행됐다.
이태리 출신인 알레니 신부가 1600년 대 후반에 쓴 이책은 세례 요한의 잉태부터 교회 탄생까지 예수 그리스도 의 생애를 서술하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단편적으로 접했던 야소의 일생을 대략적이지만 일어난 순서에 따라 설명하고 있는 것이 매우 유익했다.

그리고 무엇 보다 이 책은 성경과 복음이라는 말을 적확하게 설명해 알게 했고 그 성경의 개괄을 알게 한 것이  으뜸 공덕이었다. 저자는 천주교의 소이 경전 성서를 “기쁜 소식, 복음”(譯言好報福音)이라고 번역했고 ‘성경'(聖經)이라고 한마디로 집약해 소개했다.  또  계속해 이어지는 신구약의 소개 또한 일목요연 했다. 천주의 거룩한 가르침 성경에는 구약과 신약이 있는데 구약(舊約) 이 천주강생 이전에 옛 성인에게 장차 일어날 강생의 일과 뜻을 천주께서 계시하여 널리 전하게 하는 것이라면, 신약 (新約)은 천주 강생 이후 제자들과 당시의 성인들이 기록한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아무리 읽어도 이해 되지 않아 독서백편 의자현이 당치 않았던 것을 단박에 깨우치게 했던 것이다.

그뿐이 아니었다. “신약 가운데는 중요한 네 복음경이 있으니, 이는 네 성인이 예수께서 강생하셔서 33년 동안 세상을 구원하시고 사람을 구속하시고 하늘에 오르기까지의 모든 일과 내려주신 가르침을 기록한 것이요, 천주에게서 나와 네 성인에 의해 기록되고, 그 후에 교황(敎宗)과 교회에 의해 정경으로 승인 되었다.”면서  신약 성경 가운데 가장 중요한 복음서인 4대 복음서를 설명하고 있었다.  이 복음서 들을 기록한 네 성인은 마태오 (마태,  瑪竇),  마루고 (마가, 瑪爾謌),  루가 (누가, 路加),  요한( 若望)이며, 마태오와 요한은 제자이고, 마루고와 루가는 당시 성도이며, 마태오는 유대 나라의 글을 택했고, 마루고와 루가  요한은 여러 나라에 통용하는 그리스(厄濟亞) 나라의 글을 택했으며, 지금은 로마(羅瑪) 문자가 사용되었는데, 당시 누군지는 몰랐지만 히에로니무스(熱羅尼莫)라는 선구자가 성 다마수스(達瑪肅) 교황의 뜻을 받들어 번역했다고 썼다.

이어서 4복음서의 특징을 소개한다. ‘마태오에는 구약과 옛 성인의 예언을 많이 인용함으로 예수께서 대중이 오랫동안 바라는 구세주라는 것을 밝혔다면, 마르코에는 예수의 신령한 행적이 사람을 초월한 신의 능력이라는 것을 기록하여 만유의 주가 되신다 ‘ 고 증언했다.  반면 ‘루카는 예수의 거룩한 가르침과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일을 많이 기록하여 예수께서 사람을 속죄하시고 마음의 질병을 치유하신다’ 는 것을 밝혔고,  ‘요한은 천주의 본성을 밝혀 주님께서 사람이 되셨으나 실은 태초로부터 아버지에게서 나셔서 참으로 천주의 아들이라는 것을 밝혔다’ 고 했다 .

그러면서 저자는 겸손하게 ‘경의 뜻을 넘어서지는 않았지만, 감히 경을 번역했다고 말할 수도 없다’고 덧붙여 자신의 복음서 번역이 뜻을 풀이하는데 중심을 둔 자유로운 번역이라는 것을 인정했다.
언행기략이 소개하는 예수 일대기의 차례는 다음과 같았는데 그동안 궁금했던 것을 알게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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