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일 작
양근 마을의 빼어난 형제
그때 현지 적응적이고 관용의 폭이 넓은 예수회 그라몽 신부가 마침 북당에 머물고 있지 않았다면 조선 천주교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또 고지식한 구베아 주교가 몇 년 뒤 잠시후 살펴볼 가성직 제도를 엄청 꾸짖으며 조상 제사는 당장 멈춰야 한다고 호령하지 않았다면 조선 천주교 역사는 또 달라졌을 것이다.
실제 권일신 선생도 그런 저간의 사정을 알았기에 형조에서 국문을 받을 때 조상제사 엄금은 천주교의 일시적인 정책이라고 누누이 항변 하기도 했다.
아무튼 셰례 받은 이승훈의 귀국으로 교회법 내 합법적으로 여겨지는 대세에 의한 정식 신도가 양산되게 되면서 직암은 가장 바쁜 사람이 되어 자신 가족과 장형 녹암의 문하생을 중심으로 활발한 전도 활동을 펼쳐 앞서 말한대로 각지, 각계의 인재들을 발굴 해내는 큰 성과를 내면서 초기 천주교 공동체 형성을 이루게 된다. 공동체의 집회를 소수 정예가 아닌 대중 집회로 확장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창 했던 이가 직암 권일신 이다.
천주교 공동체는 형성초기 부터 이벽 이승훈 권일신을 중심으로 북경의 가르침 대로 7의 배수가 되는 날 집회를 갖고 나름대로의 첨례, 미사를 거행했다. 그무렵에는 예배와 축일 행사등을 모두 첨례라고 했다.
처음에는 이같은 종교집회를 교단의 중심 이벽의 수표교 집에서 거행했지만 참여자 수가 점점 늘면서 보다 넓고 대중들의 출입이 용이한 명례방(명동) 김범우의 한약방을 겸한 너른 집으로 장소를 옮겼다. 그 무렵 권일신은 아예 거처를 서울로 인척 집으로 옮겨 상학 상문 두 아들과 함께 명례방 집회에 열심히 참가했다. 매제인 이윤하의 집이었다.
그 집회, 첨례 미사에 있어서 중심이 되는 성찬례(?)와 강론 강의는 광암 이벽이 주로 맡았지만 연장자인 직암은 세례자인 만천 이승훈, 소문난 자타공인의 천재 청년 정약용과 그 형제들과 함께 문헌을 뒤져 조직과 의례 정립에 큰 몫을 담당했다. 천주교 미사의 꽃이라 불리우는 성찬례, 예수의 몸과 피로 변했다는 떡과 포도주를 나누는 예식을 당시 제대로 시행 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백방으로 찾아 봤지만 기록을 찾을 수 없었다.
호사 다마라고 했던가 명례방의 집회는 시작한지 1년도 채 못 돼 추조라 불리 웠던 형조의 관리들에게 적발되고 참가자들이 모두 끌려 가는 사태를 맡게 된다. 이른바 을사 추조 적발 사건이다. 끌려간 양반 참가자들은 집주인인 중인 김범우만 남기고 모두 이내 석방 됐지만 그 여파, 후 폭풍은 매우 심각했다.
당초부터 천주교단을 공개 조직으로 일떠 세우고 싶었던 권일신은 추조에서 석방된 다음날 큰 각오를 하고 아들 상문과 이총억 최인길 등과 함께 형조를 다시 찾아가 압수된 성상이며 서책을 돌려 달라고 항의 했지만 당시형조 판서 김화진은 응하지 않았고 다시 되돌려 보냈다. 그러면서 오히려 이 일을 공론화 시켰다. 성균관 유생들을 중심으로 상소와 격문을 돌리게 했던 것이다. 그 여파는 충격적이었다. 이때까지 내재돼 있던 신서파와 공서파의 갈등이 발화된 것이 바로 이 시기였다. 상소와 통문 돌리는 일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부류가 남인 공서파 였던 것이다.
형조에서 끝내 풀려나지 못한 중인 김범우는 장살을 맞고 경상도로 귀양을 가야 했고, 유생들의 빗발 치는 통문 때문에 참여자들은 문중과 부친의 집요한 반대와 탄압에 직면해야 했는데 이를 못이긴 이승훈이 배교문을 짓고 교단을 떠났으며 교단의 중심역할을 했던 이벽은 세상을 떠나야 했다.
이 가운데 모임의 중추 이벽의 죽음은 다른 무엇보다 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광암 이벽은 부친 이부만 선달(무과 급제자)의 우악스런 강압에도 천주교를 단념할 수 없다고 완강히 버텼던 모양이다. 급기야 그의 부친은 대들보에 목을 메는 자살 소동까지 감행했다. 그러자 광암은 “아버님의 말을 쫒아 나가지 않겠습니다.” 했단다. 광암은 그 날 이후 방에 틀어 박혀 식음을 전폐했고 열흘 쯤 뒤 세상을 떠났다. 집안에서는 돌림병에 걸려 죽었다고 소문을 냈는데 장례도 제대로 치루지 않았고 조문도 받지 않았다.
이승훈도 부친의 강압에 천주학 서적을 모두 불태우고 천주학을 사학이라 배척한다는 취지의 벽이문(闢異文)을 작성해 다시는 천주를 믿지 않겠 배교를 선언해야 했고 정약용 정약전 정씨 형제들도 부친의 강권에 못 이겨 서학과 거리를 두겠다고 약조해야 했다. 다행히 장년의 권씨 형제분들은 부친이 이미 세상을 떠났고 문중 에서도 권위를 인정받는 위치였기에 큰 탄압이나 문제는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일신의 장인인 안정복 선생과의 관계가 더 벌어져야 했다. 아무튼 막 꾸려지기 시작했던 교단이 풍비박산난 것이다.
그런 폭풍이 몰아친 몇달 뒤인 1785년 초가을 권일신은 조동섬과 양근 땅 강건너인 용문산 용문사에 들어 열으흘 쯤의 수양의 시간을 갖는다. 앞서 말한 대로 천주교 사가들은 이 일을 직암의 용문산 피정이라고 부른다. 피정은 천주교에 있어 일종의 개인 기도회 수양회를 말한다. 피정이란 말은 권선생이 사용한 것 같지는 않고 다블뤼 주교가 그렇게 썼다.
다블뤼는 권, 조 두 도반이 여드레 동안 기도와 묵언 수행을 했다고 하는데 저간의 사정으로 미루어 이는 와전인 듯 싶다. 묵언 기도만 할 것이면 굳이 불교사찰을 찾을 필요까지 없기 때문이다.
직암이 그때 천착한것은 다시 교회, 공동체 건설 이었다.
용문산에서 직암과 동섬은 초대교회 성립 과정과 사도 바울에 대해 철저하게 탐구 했고 연구 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용문산에서 각오와 채비를 단단히 하고 나온 직암은 이승훈 정약종 최창현 등을 불러모아 교단 재건에 나선다 탁덕(鐸德)이라고 번역돼 불렸던 신부의 역할을 나눠 맡자는 파격적인 제안이 나온것이 이때다. 전에는 그런 호칭을 쓰지 않았다. 당초 최초 세례자인 이승훈을 좌장으로 하려 했지만 승훈은 자신의 벽이문 작성등의 이유로 고사 했고 좌중의 추대로 일신이 탁덕, 신부들의 주장인 도탁덕, 주교에 임했고 나머지 아홉명이 신부에 올랐다. 본격적인 직암의 이른바 공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서울 반촌과 수표동, 경기도 양주 일대, 충정도 천안 일대, 충청도 예산 내포지역, 전라도 전주 일원 그리고 경상도 양산 일대에 지방 조직 일종의 공소가 꾸려진 때가 이때였다. 탐구와 고심에 따른 나름 대로의 첨례순서와 내용이 정해져 각 지역 마다 7의 배수 날 미사를 거행했고 가성 신부들이 나서 성사를 집행했다.
천주교 첨레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성찬례에 대해서는 어떤 순서로 어떻게 진행 했는지 아니면 워낙 까다로운 문제 였기에 생략 했는지는 언급한 대로 알려진 자세한 기록이 없으나 지역 공소 마다에서 예배, 미사가 끝나면 공식(함께 식사) 혹은 공찬이라 해서 다같이 식사를 하게 했는데 조선 사회서는 유례없는 이 공동 식사가 많은 화제를 뿌린다. 워낙에 부호 였기에 이 공찬에 아낌없이 사재를 털었던 전주의 유항검 같은 이는 이 공찬의 시간에는 어김없이 야소가 그곳에 강림해 좌중이 모두 나눔의 기쁨, 평등의 진면목을 알게 하는 뜨끈한 경험을 했었다고 쓰고 있다.
후일 엄혹한 탄압시기 많은 여종 출신 등 천, 상민 여신도들이 추국하는 고을 사또며 형관들이 ‘네가 뭘 안다고 그러느냐, 앞으로 천주를 믿지 않겠다고 한 마디만 한다면 살려 주겠다’고 하는데도 하나 같이 “ 우리 진사님이 뜨거운 국밥을 손수 날라다 주시며 ‘자매님 오늘은 우리 남정네들이 일 할테니 편하게 맛있게 드십시오’ 했던 말과 그때 눈믈을 흘리면서 먹었던 고기국밥의 맛을 배반할 수 없습니다.”고 하고는 형장으로 향했다는 것 아닌가. (계속)
*위 사진, 양근 성지에 있는 권일신 동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