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46 F
New York
September 19, 2024
hinykorea
연재소설 타운뉴스

<실록(實錄)소설>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10)

 안동일 작

뉴튼, 그리고 파티마의 기적

쿠글러 집안의 한국 사랑은 밥의 부친 에드워드 쿠글러 시장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에드워드는 새들브룩 타운의 시장을 오랜 동안 역임했기에 그는 아직도 쿠글러 시장으로 불리운다. 그는 6.25 참전 용사였다. 에드워드 시장은 2018년 세상을 떠났는데 30년 생이니까 88수를 누린 셈이다.
밥이 들려 준 부친 에드워드의 6.25 참전기는 얘깃거리가 참 많았다. 그 가운데 에드워드가 전역 후 고향에 돌아와 가업이 된 장의사를 차리게 된 까닭은 매우 인상적인 이야기였다. 또 유명한 종군신부인 카폰 대위와의 일화도 그랬다. 이 얘기들은 차차 하기로 한다. 아무튼 밥 쿠글러는 아버지에 이어 일찍 부터 한인 커뮤니티와 돈독한 유대를 가져왔다.

일찍 경찰에 입문해 90년대 중반 벌써 서장직에 오른 밥은 그동안 틈나는 대로 인근 한인 데이케어 센터들을 방문해 노인들에게 위문품을 전달하곤 했다. 데이케어센터는 한국식으로 쉽게 말하면 사설 노인대학, 노인정이라고 할 수 있다. 뉴욕 뉴저지 일원에는 사설 한인 노인정이 무척 많다. 나라에서 어르신 한 명당 하루 백달러 정도의 예산을 지원하기 때문이다.
또 그가 설립한 청소년 교육 봉사단체인 사법 연대 유슬렉(USLEC)은 장학 사업을 벌여 10여년 전 부터 유독 한인 학생들을 선발해 장학금을 제공하고 있다. 그는 경찰 관계 세미나로 두 차례 서울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입만 열면 그때의 얘기를 쏟아 놓곤 한다. 대개 이런 경우 부인이나 제수, 며느리 정도 레벨에서 한국인이 있게 마련인데, 조상은 독일계라는 밥의 경우는 그렇지는 않다. 미국인 부인과의 사이에서 딸만 세 명 두고 있다.
전화 끝 무렵에 내 본론을 꺼냈다.
“밥, 세인트 폴 수도원의 마리누스 수사님 안다고 그랬지?”
“왜 갑자기 수사님은?”
나는 간단히 목조각상에 대해서 설명했다. 하지만 그도 대단한 일이라며 내 흥분에 동조는 해주었지만 거기에 대해서 아는 바는 없었다.
그러면서 자신의 고모가 알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70대 중반인 그의 고모 마사여사는 아버지 에디의 막내 동생으로 어려서 부터 동리 오빠들을 따라다녔던 팜팜걸이었고 입영 영장을 받은 인근 청년들의 마스코트였단다. 후에 역시 제대군인인 동네 오빠이자 교회 오빠인 존 페터슨씨와 결혼했고 중년 넘어서는 카운티 재향군인회 자원 봉사 총무를 오랜 기간 맡았던 활동적 여성이었다. 우리 부부와는 밥의 선거 모임에서 몇 번 얼굴은 마주친 사이였다.
밥은 자신이 고모에게 말해 놓겠다며 오늘 저녁이라도 찾아가 보라고 했다. 밥과는 근일 중에 만나 회포를 풀자면서 전화를 끊었다.
밥과 전화를 끊고 나서 나는 책상 위 책꽂이에 놓여있던 묵주를 만져 보면서 새삼스레 묵주기도에 대해 생각했다. 아내가 하는 것을 보면 무슨 단수가 있던데 사실 한 번도 해본 적은 없었다. 그저 관세음보살이나 석가모니불 염송과 같은 것으로 여기고 있다. 천주교인 들에게는 매우 큰 안식의 하나이기도 하지만 때론 부담과 고역으로 다가서는 것이 바로 이 성모송, 묵주기도란다.
기도는 주기도문을 암송하고 그 다음에 성모 송을 열 번 암송하고 그리고 영광송을 한 번 암송하는 식의 순서를 되풀이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단다. 이때 암송할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어머니인 성모 마리아의 행적과 관련된 묵상과 신비의 회상을 덧붙인다는데 입으로는 복잡한 기도문의 횟수를 세면서 한편으로는 묵상을 한다는 것이 아직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 기도가 그렇게 효험이 있다니 신기했다. 하기는 2천년 가까운 전통을 지니고 있는 기도인 터에야…

그날 저녁으로 가게 일을 마치고 온 아내와 함께 티넥에 있는 마사 패터슨 여사의 집을 찾았다. 패터슨씨 에게 시집을 갔기에 밥 고모의 라스트 네임이 페터슨이었다.
마사 여사는 밥 에게 이야기를 들었던지 마리누스 수사와 함께 찍은 사진을 준비하고 우리 부부를 맞았다. 그녀는 바오로 수도원 성물방에서 함께 찍은 사진을 비롯해 여러 장의 마리누스 수사의 사진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의 장례식 사진도 있었다. 사진 속의 마리누스 수사의 모습은 늘 차분하고 정겹다.
“참 좋은 분 이셨습니다. 말씀을 하신다기 보다 늘 듣는 쪽이셨습니다.”
첫 마디가 남의 말을 들을 줄 아는 경청의 사람이라는 얘기였다.
“혹시 마리누스 수사님이 목각 조각을 하셨다는 얘기 들어 보셨습니까?”
내가 휴대폰에 저장하고 있던 목조각상 사진을 보여주면서 물었다.
“글쎄 그런 얘기를 들은 적은 없고 그런 모습을 본적도 없습니다.”
실망스런 답변이 아닐 수 없다.
“성물방이 아니더라도 나무가 유난히 유명한 그 곳에 목공일을 하는 공방이 있지 않았습니까?”
잘 모르겠다며 그런 기억은 없다고 했다.
“혹시 수사님이 한국 천주교와 관련된 책을 읽으셨다는 말씀 들은 적 있습니끼?”
즉각 모른다고 대답하는 그녀의 표정이 밝지 않다. 아내도 그걸 느꼈던지 내 옆구리를 쿡 찔렀다. 마음이 급해서 너무 취조식으로 물었다는 생각에 그녀의 기억을 떠오르게 하는 일반적인 질문으로 방향을 돌렸다.
“죄송합니다. 마음이 급해가지고 너무 무례하게 여쭸네요. 마사 여사님, 오빠 되시는 엔드류 시장님하고 여사님이 자주 찾아가 뵙곤 했다고 밥이 그러던데, 한 달이면 몇 번 정도 찾아 가셨는지요?”
“한창 때는 한달에 두번 꼭 수도원 성당에서 미사를 드렸습니다. 오빠와 나 뿐 아니라 한국전쟁 베테랑 들과 함께 찾아가곤 했었지요. 에디가 이 지역 한국전 참전용사회 회장 이었으니까요“
“예 알고 있지요 그런데 정확히 그게 언제 입니까?”
“80년대와 90년대 초 중반 까지 그랬지요.”
“수사님은 자신의 선장 시절 이야기를 도통 하지 않으셨다고 그러던데 …”
“아닙니다. 80년대 초반 쯤에 지역 신문에서 수사님 얘기를 크게 썼고 그때 부터 수도원도 알려지기 시작했고 그때 인근의 재향군인들이 찾아갔습니다. 특히 한국전에 나갔던…”
“그랬군요“
그때 수도원 형편이 어려워지자 수도원을 홍보할 생각으로 원장 압바스가 마리누스 수사를 설득해 그랬던 모양이다. 그러면서 수사의 보직도 성물방 근무로 해줬던 모양이다.
“수사님이 특별히 한국전 참전 재향군인들하고 나눈 이야기는?”
“나야 잘모르는 전쟁 때 이야기들 이라서 크게 신경을 안 썼어요.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들 먹을것 신경쓰느라… 수사님은 스트로베리 치즈케익을 매우 좋아하셨어요.”
하지만 역시 엄청난 정보가 이어서 튀어 나왔다. 기자의 발품은 공짜가 없는 법이다. (계속)

위 사진은 생전의 에드워드 쿠글러 시장과 아들 밥 서장이 한국전 기념비 앞에서 포즈를 취한 모습.

Related posts

미리 조망해 보는 이번 중간선거 (Midterm Election)

안지영 기자

AWCA 와 USLEC,  적극 협력해 시너지 효과 노린다 

안지영 기자

‘트럼프 경호 실패’ 비밀경호국장, 청문회 하루 만에 사임

안지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