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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ptember 20,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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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실록(實錄)소설>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6)

 안동일 작

 흥남, 크리스 마스의 기적

“다시 돌아간다고요? 선장님”
선원 가운데 한사람이 볼멘 소리를 던졌다. 제트유를 내려 놓으면 부산에 잠깐이나마 상륙할 것을 기대 했기 때문이다.
선장은 다른 대꾸를 하지 않고 선원의 어깨를 두드렸다.
뱃고동을 울리며 선수를 돌린 메러디스 빅토리는 다시 동해를 가로 질렀다.

12월 20일이면 미군 주력 부대들은 철수를 거의 마쳤고 부두에는 10만명이 넘는 피란민들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을 때였다.
빅토리 호는 흥남의 외항으로 들어온 후 소해정의 안내로 내항의 해안 가까운 지점으로 인도됐다. 빅토리 호가 입항하고 있던 곳은 많은 해저 기뢰가 매설돼 있던 곳으로 여겨지는 지점이었기 때문에 인도하는 소해정은 필수적이었다.
2024년 현재, 빅토리호 승무원 가운데 생존해 있는 사람은 두 명 뿐이다. 두 사람 다 스미스라는 성을 쓰고 있고 한사람은 뉴욕주에 거주하고 있고 한 사람은 플로리다주에 살고 있다. 한사람 뉴욕의 멜은 당시 3등 항해사, 한사람은 벌리는 3등 기관였다. 두 사람 다 20대 초반 약관이었고 지금은 90을 훨씬 넘겼다.
승무원 가운데 라루선장 다음으로 유명한 이가 2등 항해사였던 로버트 러니 제독이다. 제독이라는 호칭 에서 알 수 있듯이 그 항해 이후 빅토리호에서 내려 해군에 입대했고 87년 전역 이후에는 뉴욕에서 유수한 변호사 활동을 했던 인물이다. 정식으로 계급이 해군 장성인 제독에까지 오른 것은 아니었고 제대 후, 빅토리호의 인명구조를 포함해 그간의 공적을 인정받아 연방 해군에서 명예 제독 칭호를 받았고 뉴욕 주지사는 그를 뉴욕 주 해군 방위군 명예 총사령관에 위촉 했기에 자연스레 제독이라 불리운다.
빅토리호의 기적을 각종 인터뷰를 통해 널리 알린 이가 그였고 수사로 은둔 생활을 하던 라루 선장, 마리누스 수사를 수소문에 찾아낸 이도 그였다. 그는 안타깝게 거의 최근이라 할 수 있는 2022년 5월, 9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빌 길버트가 쓴 책 ‘기적의 바다’에서도 주 인터뷰이는 러니 제독 이었다.

빅토리아호가 많은 피난민을 실었던 것은 전적으로 라루 선장의 선택이었다. 군 당국의 강제는 전혀 없었다. 러니 제독은 길버트의 책 말고도 각종 인터뷰에서 당시의 상황을 회상했는데 그의 회상은 늘 소해정이 불빛 신호를 이용해 어떤 화물이 실려 있는지를 물어왔던 것을 인상적으로 술회하는 것에서 그날 밤의 얘기를 시작한다. 그때 모든 미국 배들이 도 감청 때문에 무선통신을 꺼놓은 상황이었기에 금속 조각들을 이용해 신호를 깜빡이는 통신 방법을 썼다고 했다. 모르스 부호였을 게다.
“제트 연료가 실려 있다는 신호를 보냈을 때 놀란 그들의 충격적인 표정을 보지 않았어도 거의 읽을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때 소련 잠수함이 바다 밑에서 잠행 중이라는 얘기가 돌고 있었단다. 당시 소련제 기뢰의 위력은 대단했다.
“자석 기뢰, 미끼 기뢰, 그리고 요즘엔 스마트 기뢰라 부르는 계산기 기뢰 등 상상 가능한 모든 종류의 기뢰가 매설돼 있었습니다. 압력 기뢰도 있었는데, 그녀석은 기뢰 위를 지나가는 배의 크기에 반응해 터집니다. 그런데도 빅토리호 뿐 아니라 그때 동원됐던 그 많은 배들이 기뢰의 피해를 입지 않은 것이 기적 중의 기적 입니다.”

그 무렵 해상의 기뢰는 전쟁의 양상을 바꾸어 놓을 정도로 위력을 발휘하는 무기였다. 인천상륙 후 쫒기는 적을 더 효과적으로 쫒겠다고 미국 10군단이 서울 수복 후 인천 항에 다시 모여 배를 타고 반도를 돌아 원산에 상륙하려 했던 그 작전을 10여일 이상 지연시킨 것이 원산 앞 바다에 깔려 있었던 기뢰 였다. 선발대가 원산 앞바다에 도착한 날로 치면 정확히 열 나흘 동안 미 해병 1사단을 비롯한 미군 정예들이 특공대가 기뢰 제거 작업을 하는 동안 원산 먼 바다 함선 안에서 밥 호프의 코미디 녹화물을 보고 있는 동안, 중국군은 동부전선 장진호와 서부전선 청천강 넘어 마식령 산맥 운산 방면에서 매복을 마칠 수 있었다. 미군 측 으로서는 통탄할 일이 아닐수 없다. 맥아더의 특장 상륙작전이 만사형통은 아니었던 것이다.

빅토리 호가 외항에 닻을 내리고 추후 지침을 전달받기 위해 하루 쯤 기다리고 있을 때 일단의 미군 장교들이 소해정을 타고 와 승선했다. 그들 중 상급자가 존 차일즈 대령이었는데, 멕아더가 유난히 총애하는 제10군단의 군단장 알몬드 소장의 작전 참모였다. 차일즈 대령은 라루 선장에게 그의 배가 항구에 있는 마지막 배들 중 하나라고 말한 후, 해변의 피란민들을 태우고 부산으로 갈 수 있는지를 물었단다.
옆에 서 있었던 러니는 그때의 상황을 여러 해가 지났지만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들은 상황 설명을 하면서 우리가 그때까지 우리는 자세히 모르고 있었던 철수가 이미 시작돼 거의 끝나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해병 1사단과 육군 보병 7사단이 이미 철수했으며 육군 보병 3사단 일부가 흥남 외곽 방어선을 간신히 지키고 있지만 적군의 포위망이 빠르게 좁혀오고 있는 중이라고 말하더군요.”
대령은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승무원들 외에 20명 정도의 승객만을 태울 수 있도록 설비돼 있으므로 피난민들을 태우라고 굳이 명령하지는 않겠다고 말했단다.
“우리가 선장에게 피란민들 태우라고 명령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선장께서 자원해 배를 가지고 들어간다면 항구의 피란민 중 얼마라도 태우고 나올 수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상급 선원들과 협의해서 결정을 내려줄 것을 부탁합니다.”
이때 라루 선장은 마치 준비하고 있었다는 듯 전혀 망설이지 않고 ‘그럽시다. 배를 가지고 들어가 피난민을 실읍시다.’ 했다고 러니는 기억했다.
“선장님은 아무도 돌아보지 않았고 누구와도 상의하지 않았어요. 즉시 배를 가지고 들어가서 가능한 많은 피란민들을 태우겠다고 흔쾌히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그때까지 우리 배가 사람을 싣게 될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도저히 버릴 수 없는 전략 물자들을 싣게 될 것으로 여겼는데, 아무튼 선장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흔쾌히 응락 했습니다.” 러니는 ‘그레들리’ 라는 단어를 두번이나 사용했다.
메러디스호의 기적은 이렇게 시작 됐던 것이다.

여기서 많은 이들이 지나쳐 버린 러니의 회상이 있는데 이때 라루 선장이 해병 1사단의 철수 문제에 큰 신경을 쓰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 무렵 장진호에서 10배가 넘는 중공군에 포위돼 있던 해병 1사단의 안위는 뉴욕타임스 등 본토의 유력 언론들이 ‘ 미 최고 정예병력의 전멸 위기’라고 거의 실시간으로 크게 보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미국인들의 관심사로 등장해 있기는 했었다. 그렇다 해도 라루선장의 관심은 구체적이었다. 러니의 회상에 따르면 라루 선장은 특별히 1사단 군종신부 였던 소령 한사람의 안위를 혹시라도 알 수 있냐고 대령에게 물었단다.
대령은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모르겠다고 답하면서 참모 본부에 와 있는 해병대에서 파견된 상륙작전 참모 애드 포니 대령에게 물어봐서 꼭 알려주겠다 했다는 것이다. 군종신부의 이름은 기억하지 못했지만 완고했던 알몬드 소장을 설득해 피난민을 싣게한 주역으로 유명한 포니 대령의 이름이 나왔다는 것을 분명히 기억한다면서 이 상황을 러니는 후일 여러 인터뷰에서 언급하고 있다.

러니 제독은 포니 대령을 처음에 설득했던 한국인 통역 장교 현봉학 박사와도 후일 각별한 인연을 맺고 뉴욕에서 절친하게 지냈다. 라루 선장의 필라 성당 교우들은 그때 한국전쟁에 여럿 참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러니 제독은 라루 선장이 평소에도 전황에 대해 유달리 관심이 많았으며 그리고 한국과 한국인에 대해서도 남다른 관심과 애정을 보였다고 한다. 후일 신문기자 시절 뉴욕에서 내가 만났던 현봉학 박사의 증언이다. 이 또한 뒤에 다룬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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