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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ptember 20,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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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실록(實錄)소설>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4)

안 동일 작

서(序), 들어가는 장

 

그렇다면 마리누스 수사는 어떻게 해서 권일신 선생을 알게 됐을까. 일단 역사서 같은 책을 통해서 알게 됐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이때 불어로 쓰여진 두 권의 저작이 떠오르게 된다. 권일신 선생을 높이 평가하면서 인간적인 고뇌까지 그려낸 글이 1850년대에 프랑스 신부 달레가 쓴 조선천주교사다. 그 전에 조선에 들어가 전교활동을 펼치다 순교한 역시 프랑스 성직자 ‘다블리 주교의 비망록’을 바탕으로 불어로 쓴 조선 천주교 초기 인물중심 역사서다.
달레의 조선 천주교사는 우리로서는 아쉬운 점이 적지 않지만 선교사들 사이에서는 큰 반향을 불러 일으킨 명저로 꼽힌 책이다. 많은 부분이 축약되고 일부는 주관적 왜곡이 있었음에도 조선 초기 순교자들의 행적과 신앙이 그만큼 감동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후에 더 살펴 보겠지만 다블리 주교의 비망록은 더 구체적이며 인간적이고 감상적이다.

임종 전에 마리누스 수사가 수도원의 아빠스(원장)에게 부탁한 말이 한국 사람들을 만나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의 가슴속에는 늘 한국과 한국전쟁 그리고 한국 천주교가 맴돌아 용솟음치고 있었던 것이다.
나의 상념은 수도원 수사의 작은 방에서 작은 램프를 켜 놓고 몇 날이고 몇 달이고 그 불어 책들을 읽으면서 고개를 끄덕이고 파티마의 성모를 떠올리며 기도를 올리는 그의 모습을 선하게 그려지는 구체적인 모습에 까지 미치게 됐다. 더욱이 라루 선장의 이름은 불란서 식 이름 아닌가.
영어 번역이 나와 있다는 말은 못 들었지만 영어로 읽었건 불어로 읽었건 아니면 라틴어로 읽었건 조선 천주교사, 초기의 성조들은 마리누스 수사에게도 엄청난 빛이었고 기쁨이었을 것이 틀림없다.
자연스레 한국에 대해 애틋하면서도 뿌듯한 감정을 지니고 있었을 마리누스 수사도 내가 성조들의 행적에서 느낀 그 감동을 그대로 느꼈다고 나는 믿고 있다.
그 감동은 용솟음치는 성령의 불길을 가슴에 담고 스승과 동학들에게 이를 전하기 위해 눈보라 속 밤길을 달렸던 광암 선생의 그날에서 시작돼 이를 분연히 받아들인 직암 권일신 선생을 거쳐 1950년 크리스마스 날 라루 선장이 기꺼이 한국 흥남의 부두로 들어가 피난민 만 4천명을 구출해 아무 탈없이 거제도 장승포 항까지 데려왔던 기적 같은 항해의 감동으로 이어지면서 궤를 같이 하는 것이 아닐까.
나로서는 그 감동의 궤도에 미국 기독교, 이른바 개신교가 커다란 한 축으로 들어 있다고 여긴다. 결코 짧지 않은 탐구 끝에 내린 결론이다. 당초 쓰려 했던 6.25에 관한 글의 상당 부분이 여기 할애돼 있었다.

일본 식민지로 전락 하기는 했지만 조선을 본격적으로 개화시켜 민주주의와 자유 평등을 알게 한 당사자가 미국, 그 중에서도 개신교였다. 천주교에 대한 마지막 대형 박해였던 병인박해 이후 20여년이 지난 1894년 그 희생을 바탕으로 이 땅에 개신교가 전해진다. 당시 미국에는 영성을 중시하는 기독교 근본주의 복음이 풍미하고 있었지만 조선에 파견된 선교사들은 교회 보다는 학교와 병원을 먼저 세워 이 땅에 기독교적 영성보다는 자유 평등 진리의 가르침을 먼저 전했다. 천우신조였던 것이다.
이후 헤방도 한국전쟁도 모두 미국과 깊은 관계가 있었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 관계가 마냥 긍정적이었다고 말하면 무슨 ‘태극기 부대’ 같은 소리냐고 할 사람들이 많다는 것도 잘 알기에 ‘결코 짧지 않은 탐구’ 라고 강조하는 것이다. 좀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나는 우리와 미국과의 만남, 특히 기독교와의 만남 그리고 그 바탕이 되었던 그 이전의 가톨릭 과의 만남이 천우신조 (天佑神助) 였다고 생각하게 된 사람이다. 문자 그대로 하늘의 도우심 이고 신의 도움이라는 얘기다. 물론 여기 하늘과 신은 기독교의 신을 직접적으로 의미하지는 않지만 그 만남이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매우 중요한 요인의 하나 였다고 생각하게 되었기에 이 글에서 이를 차근차근 밝히려 한다. 이 글을 쓰는 의의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하게 됐다는 얘기다.

그런 점에서 이벽 선생에 의해 전교의 현장이 되었고 교단 성립의 현장이 되었던 그날 1779년 겨울 천진암 강학의 현장은 모든 것의 출발이다. 다블리 주교도 달레 신부도 조선 천주교의 시작을 그렇게 인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날 도대체 그 현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 일까. 다수 사가들의 기록은 그날부터 열흘 혹은 그 열 이틀 동안 강학에서는 그동안 해 왔던 다른 유학공부는 전폐하고 오로지 천주학 만을 공부했고 토론했다고 되어 있다. 기록에 의하면 그때 모였던 남인계열 소장파 유학자들 가운데 김원성 선생 만이 불만을 표시해 중의에 따르지 않았다고 한다. 그들에게 불현듯 신앙으로 다가선 초기 천주교는 어떤 내용이었고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때 모였던 남인 소장 유자들 가운데 스승이었던 권철신 선생 다음으로 나이가 많았고 그러면서 신망이 남달랐기에 좌장 격이었던 권일신 선생에게는 어떻게 서학, 천주교가 다가섰고, 그 현장에서 그는 무엇을 느꼈고 종국에는 어떻게 결연히 죽음마저 받아들일 정도로 철저해졌는가,
그리고 200여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뒤 조선 땅과는 반대에 있는 미국 동부의 한 수도원 수사는 왜 어떻게 해서 죽음을 앞두고 그의 형상을 조각했는지 그 사연과 사정을 신명을 다해 글로 적기로 했다. 그리고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이나라 우리민족 에게 있어 천주교를 포함하는 기독교 사상은 어떤 의의와 의미를 갖는가, 따져 보기로 했다. 서설, 들어가는 말은 이쯤에서 접는다.

 1. 흥남, 크리스 마스의 기적

 

“형, 뉴튼 수도원 자주 가 봤다고 했죠?”
“그럼, 지난 달에도 가서 나무 자르고 왔는데, 얘기 안했어?”
목각인형을 앞에 놓고 나는 대학 선배인 신장균 형에게 전화를 했다. 이곳 뉴저지 일원서는 알아주는 천주교 신자, 레지오와 빈센지오 활동가였다. 지난 달에도 그 곳에 가 크리스 마스 트리 자르는 봉사 사역을 하고 왔단다. 그곳은 넓은 전나무 농장에는 크리스마스 때면 사람들이 트리 나무를 사러 몰린다. 사람들이 나무를 고르면 봉사자들이 그 나무를 적당하게 잘라 트럭에 실어 주는 일을 한다. 한국의 왜관 분도 수도원이 그곳을 인수한 이후 봉사자들의 대부분은 뉴저지 일원 한인 신자들이다.
“거기 아직 성물방 있죠?”
“응 있어 왜?”
“거기 목각 성물들 많겠죠? 나무가 좋은 곳 이니까..”
“글쎄 그럴 것 같기는 한데 잘 모르겠다. 묵주는 좋은 게 많은 것 같긴 했는데…”
“목각 인형은요? 성모님이나 성인들 조각상.” “본 것 같기는 한데 잘 모르겠다, 왜 그러는데? ”
큰 기대를 하고 전화 한 것은 아니었지만 역시 예상했던 답변이다. 간단히 권 선생 목각 인형에 대해 애기했다. 역시 잘 모르겠다는 답변이다.
리누스 수사님이 직접 조각을 했다는 얘기는 못 들었어. 하지만 안 작가가 그렇다고 생각하면 그런 것 같은데… 그랬을 거야. 하하하 ”

같이 한번 수도원에 가자고 약속을 하곤 전화를 끊었다. (계속)

*위 사진은 뉴튼 베네딕토 수도원에 있는 마리누스 수사의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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