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혁명 이래 대통령이 임기 중 사망한 적 없어
헬기 추락 사고로 실종된 에브라힘 라이시 이란 대통령이 20일 사망한 것으로 확인되면서 이란 국내 정치 및 중동 정세에 격랑이 일 것으로 전망된다. 차기 최고지도자 후보였던 라이시 대통령의 급서는 대통령직뿐만 아니라 최고지도자 후계 구도를 둘러싼 권력다툼에 불을 지필 것으로 예상된다. 중동에서 반이스라엘·반미 중심축인 이란의 지위를 고려했을 때 이번 사태가 역내 질서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도 주목된다.
이란 국영통신 IRNA는 라이시 대통령이 이란 북서부의 동아제르바이잔주 바르자칸에서 헬기 추락 사고로 “순교했다”고 이날 보도했다. 사고 헬기에 동승했던 호세인 아미르 압돌라히안 외교장관, 말렉 라흐마티 동아제르바이잔 주지사, 타브리즈 지역 성직자(이맘) 아야톨라 알 하솀, 메흐디 무사비 대통령 경호팀장 등 탑승자 9명 전원이 사망했다.
라이시 대통령은 전날 동아제르바이잔주 졸파 인근에서 열린 기즈 갈라시 댐 준공식에 참석한 뒤 타브리즈의 정유공장으로 이동하다가 디즈마르 산악 지대에서 변을 당했다. 수도 테헤란에서 북서쪽으로 600㎞가량 떨어진 곳이다.
이란 헌법은 대통령 유고 시 부통령에게 대통령직을 승계하고, 50일 이내 새 대통령을 선출하는 선거를 치르도록 규정하고 있다. 워싱턴포스트는 부통령 12명 중 선임인 모하마드 모크베르 제1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일단 승계하며, 그가 대선을 준비하는 역할을 맡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에브라힘 라이시 이란 대통령(63)의 헬기 추락사는 가뜩이나 불안정했던 이란 국내 정서와 중동 정세가 또 한차례 출렁이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란은 탄압과 경제 파탄으로 악화된 민심 속에서 차기 대통령과 최고 종교지도자의 후계자를 이른 시일 내 찾아야 한다. 가자지구 전쟁에 휩쓸린 중동에도 먹구름이 드리워졌다.
이란 헌법은 현직 대통령이 임기 중 사망하면 최고 지도자의 승인을 거쳐 제1부통령이 대통령의 권한과 직무를 맡도록 규정한다. 또한 부통령, 국회의장과 사법부 수장은 권한대행 임명 이후 50일 이내로 새 대통령을 선출하기 위한 선거를 실시해야 한다. 이에 따라 모하마드 모흐베르 제1부통령(69)이 대통령 권한대행이 될 전망이다.
신정일치 국가인 이란에서 대통령은 최고 종교지도자의 뒤를 잇는 권력 2인자로 꼽힌다. 쥐고 있는 실권은 별로 없지만 최고국가안전보장위원회, 최고문화혁명위원회 등의 의장을 맡는다. 강경 보수 성향이었던 라이시 대통령은 생전 최고 종교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85)의 측근이자 후임으로 꼽혔단 점에서 존재감이 컸다. 따라서 이제 이란 정계는 차기 대통령과 차기 종교지도자를 동시에 물색해야 하는 상황이다.
권한대행이 될 모흐베르 부통령은 라이시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하메네이와 가까운 사이로 알려져 있다. 라이시 대통령이 2021년 당선되면서 함께 부통령직에 올랐다. 최고지도자와 연계된 투자기관인 세타드(Setad)의 대표로서 ‘하메네이의 자금줄’로 활동했으며, 핵 또는 탄도미사일 활동에 연루된 혐의로 과거 유럽연합에서 제재를 받은 적이 있다.
1989년부터 집권 중인 하메네이는 이미 고령으로 인한 노환과 지병을 앓고 있어 후계자 확정이 시급하다. 후계자로는 하메네이의 아들 모즈타바 하메네이(55)가 라이시 대통령과 경쟁 구도를 형성했던 바 있는 만큼 라이시 대통령 사후 가장 강력한 후계자로 꼽힌다. 최고 종교지도자는 국민의 직접선거가 아닌 임기 8년의 성직자 86명으로 구성된 전문가 회의에서 선출한다. 모즈타바가 최고 종교지도자 자리를 세습할 경우 전문가회의를 비롯한 이란 사회가 ‘이슬람혁명 정신에 어긋난다’며 반기지 않으리란 전망도 나온다.
1979년 이슬람혁명 이래 이란에선 대통령이 임기 중 사망한 적이 없다. 영국 일간 가디언의 패트릭 윈투어 에디터는 “모흐베르를 차기 대통령감으로 보는 시선은 거의 없다”고 평가했다. 그는 “이란의 최고 지도부에게 50일이란 시간은 대통령이자 어쩌면 최고 종교지도자가 될 수도 있는 사람을 추리기엔 짧은 시간”이라고 짚었다.
미 싱크탱크 전쟁연구소(ISW)는 “앞으로 며칠 동안은 최고 종교지도자 승계를 포함해 정권의 역학이 재편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라이시의 죽음은 현 정권의 강경하고 보수적인 국내 정책과 공격적인 역내 정책 궤도를 바꾸지는 못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란은 대내외적으로 격변의 시기에 대통령 사망이라는 악재가 덮친 모양새다. 국내적으로 보면, 이란에선 2022년 대학생 마흐사 아미니가 도덕경찰에 구금된 후 의문사한 사건을 계기로 1979년 이슬람혁명 이래 가장 큰 시위가 번졌다. 현재 시위는 잦아들었지만 정권의 억압적 통치를 향한 반감은 남아있다. 또한 통화 가치가 폭락하고 물가상승률이 30%를 넘나드는 암울한 경제도 정권 위협 요인이다. 정치에 대한 불신과 냉소로 인해 지난 3월 치른 총선에선 투표율이 41%로 역대 최저를 기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