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지영 기자
평북 벽동의 유엔군 포로수용소 쓰레기 더미에 뒹굴던 십자가 철모
“십자가와 예수님은 항상 이세상 가장 낮은곳에 계시기 때문일세”
지금부터 정확히 73년전인 1951년 1월, 평안북도 벽동의 제5 유엔군 포로수용소 마당 쓰레기 더미 앞에는 십자가가 새겨져 있는 철모가 며칠째 뒹굴고 있었다. 이곳에 포로로 잡혀있는 미육군 1사단 군종신부 에밀 카폰 대위의 철모였다.
새로 입소한 19세의 미군 포로 병사가 금새 아버지 처럼 따르게 된 그 철모의 주인공에게 물었다.
“신부님, 왜 저 철모를 저렇게 뒹굴도록 방치하고 계십니까?
“중국군들이 저 철모를 쓰고 있으면 너무도 싫어하기 때문일세.”
“그래도 그렇지, 십자가가 새겨져 있는데…”
“그 때문일세, 십자가와 예수님은 항상 이세상 가장 낮은곳에 계시기 때문일세”
굶주림과 추위 그리고 중국 공산군의 폭력에 시달리던 포로 병사들은 그 철모를 바라보며 큰 위안을 얻었고 기도를 계속 했다.
그 에밀 카폰 종군 신부의 철모 모형이 지금 평택 캠프 험프리스 미군 기지에 기념비로 제작돼 전시되고 있다. 에밀 카폰, 익숙한 이름은 아니지만 우리 한국인이 꼭 기억해야 할 인물이다. 특히 재미 천주교인들 에게는 더욱 그렇다. 그는 6.25 동란때 미 육군의 종군 신부로 참전했던 참전용사다.
카폰신부는 ‘한국전쟁의 성인’, ‘전장의 그리스도’라고 불린다.
한반도에서 북한 공산군의 침략으로 6.25 전쟁이 발발했을때 카폰 신부는 미 육군 제1 기병사단 8기병연대의 일원으로 한국전에 참전했다. 전쟁 초반 미국 주도의 UN군이 북한의 공세로 후퇴를 거듭하는 와중에도, 카폰 신부는 의연하게 장병들을 격려하고 그들과의 신앙 활동에 주력했다. 당시 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지던 와중에 단독으로 낙오된 병사를 구출하는 수훈을 세우기도 했으며, 이 공로로 동성무공훈장을 받았다.
인천 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자, 그 역시 한반도 이북으로의 북진에 동참했다. 그러나 중국군의 참전으로 전세가 불리해졌고, 당시 카폰 신부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병사들의 안전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결국 병사들의 후퇴를 돕던 도중인 11월 2일, 중국군의 포로가 되어 수용소로 끌려갔다.
수용소에서 영양실조와 질병을 앓고 각종 가혹행위를 강요받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함께 붙잡힌 포로들을 격려하면서 사제로서 의연함을 잃지 않았다. 철모 일화도 그때의 일이다. 그러나 수용소 생활 도중에 폐렴, 이질에 걸려 건강이 악화되었고, 결국 수용소 생활 6개월만인 1951년 5월 23일, 향년 35세로 세상을 떠났다.
신부님은 1916년 미국 중부 캔자스주의 필슨(Pilsen)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 성장했다. 1940년, 24세의 나이에 세인트루이스의 켄리크 신학교(Kenrick Theological Seminary)를 졸업했고, 캔사스주 위치타 교구에서 사제로 서품되었다. 이후 1944년 동부 매사추세츠주에 있는 미 육군 군종학교에 들어가 본격적인 군종 신부로서 사목활동을 시작했다. 군종사제 생활을 시작한 이듬해이자 제2차 세계 대전이 막바지였던 1945년, 인도로 발령을 받아 버마 전선에서 복무했다. 1948년에는 미국에 항복한 일본에서 군정을 실시하던 주일미군으로 발령받아 군종사제의 생활을 이어나갔다. 일본으로 부임받은 지 2년만에 한반도에서 북한의 침략으로 6.25 전쟁이 발발하자 한국전에 자원했다.
반가운 소식은 그에 대한 가톨릭 교황청의 시복 시성 절차가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어 조만간 좋은 결과가 발표 될것이라는 소식이다. 그가 가경자에 들었다는 애기다.
가톨릭에서는 신앙의 모범으로 살다가 죽은 인물을 교황의 공식 선언을 통해 공경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시복 시성제도를 두고 있다. 한국의 선대 순교자등 103명이 성인에 들었고 기타 124명이 그 바로 밑의 복자에 들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성인과 복자의 시성 시복이 진행되는 이들을 가경자, 또는 ‘하느님의 종’ 이라고 한다.
그가 천주교 성인의 반열에 들어야 한다는 주변의 친지, 신도들의 바람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게 된것은 그의 유해가 기적적으로 발굴된 이후다.
사후 70년만인 2021년 3월, 미 국방성 산하의 전쟁포로·실종자 확인국(DPAA)은 하와이의 무명용사 묘지에 묻힌 유해들 가운데 카폰 신부의 것을 확인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그의 유해는 캔자스주의 고향으로 이장되었고, 장례미사와 함께 고향땅에 묻혔다.
이보다 앞선 2013년 버락 오바마 당시 미국 대통령에 의해 미군 최고 수훈인 명예 훈장(Medal of Honor)을 사후 수여받았으며, 휴전협정 체결 68주년이자 그의 유해가 확인된 후인 2021년 7월 27일에는 한국 정부가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했다.
지난해 5월에는 카폰 신부를 기리는 추모비 제막식이 경기도 평택 캠프 험프리스 미군 기지에서 열렸다.
동상 건립을 처음 제안했던 사람은 보이스카우트 대원, 이언 모가도(14, 위 사진 가운데)군이었다. 주한 미군 자녀인 모가도군은 지난해 카폰 신부의 유해가 발견된 데 이어 유족이 방한해 청와대에서 태극무공훈장을 받았다는 소식을 접하고 고인의 삶을 널리 알릴 수 있는 추모공간을 만들면 좋겠다는 제안을 주한 미군 측에 직접 했다.
모가도군의 기특한 제안이 사령관 등의 재가와 협조속에 받아들여지면서 험프리스 기지 내에 부지가 마련됐고, 주한미군 안팎에서 자발적인 모금운동이 펼쳐져 5370달러(약700만원)가 모였고 마침내 멋진 추모비가 건립됐던 것이다.
그 추모비의 메인 디자인이 철모였다. 멋지지 않은가. 추모비에는 카폰 신부의 이름과 그의 참전기록과 함께 태극기와 성조기가 새겨져있다. 또 ‘기도를 열심히 하자, 병사들을 위한 전례를 자주 하자, 무엇보다도 병사들의 모범이 되자’는 그의 평소 신조도 새겨져있다.
다만 이처럼 뜻깊은 기념비가 미군부대 안에 있어 우리 한국인들이 자유롭게 찾아가는 것이 여의치 않다는 단점이 있기는 하다. 미 8군 관계자는 “청소년의 제안이 받아들여져 미군 시설 내에 전몰장병 추모 공간이 새로 들어선 유사한 사례를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미8군 군목 카렌 미커 대령은 “나는 개신교 목사이지만, 카폰 신부는 ‘신과 나라를 위한다’는 신조와 일치했던 군종병들의 완벽한 본보기”라고 했다. 그러면서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다 목숨을 바친 카폰 신부의 삶은 한미동맹이 얼마나 굳건하고 앞으로도 그래야 하는지를 말해준다”며 “ 앞으로도 한국 지역 사회와 협력해 그의 삶을 알리는 활동을 전개하고 싶다”고 말했다.
지지난해 선종한 고(故) 정진석 추기경은 카폰신부 일대기인 ‘종군 신부 카폰’을 직접 번역했고, 심혈을 기울인 개정판을 유작으로 우리들에게 남겼다.
철모 에피소드를 비롯해 카폰 신부의 영웅적인 행적, 지고지순의 신앙심은 6.25 전쟁 당시 전장, 포로수용소 등에서 함께 생활했던 참전용사들을 통해 알려졌으며, 사후 3년 만인 1954년에 <종군 신부 카폰>(원제: Chaplain Emil Kapaun)이라는 전기가 출간되었다.
이 책을 1956년에 당시 신학생이었던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이 번역, 출간했고, 이후 몇 차례의 개정판이 나왔다. 가장 최근의 것은 정 추기경이 2021년 4월 선종하기 직전까지 작업에 몰두했던 바, 결국 그의 유작이 되었다. 카폰 신부의 순수하고 치열했던 가톨릭 정신과 특히 포로 수용소에서의 순교 직전 까지의 적군과 아군을 가리지 않았던 헌신적인 모습은 읽는 이의 가슴을 심연까지 흔든다.
이 철모 기념비를 보면서 지한파로 성장할 주한미군 자녀들과의 유대관계를 돈독히 해 나가야 할 것이며, 생면부지의 남의 땅에서 피흘리며 죽어간 미국 청년들 그리고 그들을 성심을 다해 축원했던 성직자들을 기리는 그런 운동이 한미 동맹이 위기에 있다는 이 즈음, 활발하게 재미 동포 사회를 중심으로, 한 미 양국에서 힘차게 전개 돼야 한다는 뜨거운 목소리가 양국에서 한파를 녹이고 있다. (안지영 기자)